#128 진실의 파편(4)
비앙카는 뒤에 있는 가스파르의 그런 고충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오델리와 카트린과의 대화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의외로 카트린이 수다쟁이였기 때문이었다.
연회에서의 이야기와 셀린느에 대한 이야기를 가볍게 나누고, 이내 대화의 주제는 토너먼트로 향했다. 카트린이 동경 가득한 시선으로 비앙카와 오델리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둘 다 너무 예뻤다. 지금 상황이 솔직히 반쯤은 믿기지 않았던 그녀는, 약간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두 분 다 예쁘고…. 인기도 많으셔서 부러워요. 이번 토너먼트에서도 장미를 많이 받으셨죠?”
“정말로 장미를 받을 만한 레이디는 왕녀님이었고, 저는 제 남편에게 잘 보이려는 자들에게 받은 뇌물일 뿐이었죠.”
“그래도 자코브 왕자님께서 건네주신 장미는 진심인 것 같던데요. 자코브 왕자님이 아르노 백작님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잖아요.”
자코브와 비앙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카트린은 자코브가 비앙카에게 준 장미를 그저 기사가 레이디를 숭배하는 정도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궁정 연애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비앙카는 그냥 자코브라는 이름 자체가 언급되는 것이 싫었다. 자코브라는 단어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비앙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훅 치고 들어오는 이름에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혐오감이 끓어올랐다.
순간 굳어버린 분위기를 재빨리 읽은 오델리가 재빠르게 카트린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하지만 아르노 백작의 심기를 건들 수는 있겠죠. 그리고 달갑지 않은 상대에게 받은 장미는 거추장스러울 뿐이에요. 안 그래요?”
“아…. 죄송해요, 아르노 백작 부인. 제가 부러워서 눈치 없는 말을 했어요.”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카트린이 쩔쩔매며 사과를 건넸다. 거듭 말실수를 하는 것 같아 민망했다. 아르노 백작 부인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카트린의 귀가 새빨개졌다.
하지만 카트린의 잘못이 아니다. 솔직히 승전 연회 날 밤, 정원에서 있었던 일만 아니었다면 비앙카도 능청스레 받아쳐 줄 만한 말이었다. 다만 그 일로 인해 자코브라면 질색을 하게 되는 경향이 더 심해졌을 뿐…. 비앙카는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왕자님께서 다가오실 때마다 조마조마하답니다. 알다시피, 제 남편은 1왕자님을 모시고 계시잖아요. 2왕자님은 1왕자님과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으시고…. 산불의 근원은 작은 불씨인 법. 혹시나 저와 관련된 사소한 일로 큰 문제가 생길까 두려워…. 제가 소심하다 보니, 마음을 졸이게 될 수밖에 없네요.”
카트린은 비앙카의 말이 맞는다는 듯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곰곰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오델리가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2왕자가 경우 없는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기는 합니다만…. 2왕자가 그 전에도 백작 부인에게 치근덕댄 적 있지요?”
“…네.”
비앙카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아무래도 여기저기 큰 소리로 떠들 만한 일은 아니었다. 비앙카의 답을 들은 오델리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러면 오라버니도 알았을 텐데…. 미안해요, 아르노 백작 부인.”
“아니에요. 1왕자님 잘못은 아니지요.”
“아니요. 오라버니의 잘못이에요. 오라버니가 진작 더 강한 경고를 했으면, 토너먼트에서의 그런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하여간 오라버니는 너무 물러요.”
오델리는 쯧 혀를 찼다. 그녀의 눈에 들어찬 경멸과 한심함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명백했다. 고티에와 자코브, 둘 다 오델리에겐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전자는 그나마 가족의 정으로 끌어안기라도 한다지만, 후자는 얄짤없었다. 그녀의 입술이 비스듬히 올라가며, 이 자리에 없는 그들을 향해 독설을 퍼부었다.
“토너먼트의 일에 대해서도 별로 중요하게 생각 안 할 걸요? 토너먼트는 남자들의 축제니까요. 별거 아니라며 당연시 생각했을 거예요. 말이 돼요? 관중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친분 하나 없다 못해 정적의 아내에게 대뜸 장미를 건네는 일이? 구설수에 오를 게 뻔히 눈에 보이는데…. 말은 로맨틱이니 뭐니 하지만 결국 치근덕거리는 거잖아요. 쏠린 이목으로 여자가 얼마나 난처해질지는 생각도 않으면서, 자기들은 고백했다는 만족감에 취한다니까요?”
오델리는 질색을 하며 거칠게 손을 내저었다. 다만 찡그린 얼굴마저도 아름다워, 그 짜증이 쉽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어쩐지 카스티야의 기사에게서 장미를 받았을 때도 오델리는 썩 기뻐 보이지 않았다.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이런 일에 물릴 대로 물린 상태였다.
카트린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제야 장미를 받는 것이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걸 눈치챈 카트린이 주저하며 물었다.
“1왕자님께서는 왜 사이도 좋지 않은 2왕자님을 가만히 두시는 거예요? 2왕자님도 나이가 꽤 차셨는데, 차라리 영지를 맡기셔서 내보내시는 게….”
카트린이 의문을 품을 정도로 두 사람의 사이는 이상했다. 나이 차이가 그리 크게 나지 않는 배다른 형제. 자코브는 대외적으로 왕위에 대한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않았으나, 형에 대한 적대감과 반발심은 숨기지도 않았다.
보통은 둘째 왕자를 유배 보내는 식으로 중앙 정권에서 분리시키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자코브는 버젓이 라호즈에서 거주하며, 다른 귀족들과도 자유로이 왕래했다.
카트린의 질문은 비앙카 또한 궁금한 것이었다. 비앙카와 카트린의 호기심 넘치는 시선이 향하자, 오델리는 픽 웃으며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답했다.
“오라버니는 사랑받고 싶어 하거든요. 그래서 2왕자를 가만히 두는 거예요. 아버지가 불화를 원치 않으니까. 착한 맏아들인 척하는 거죠.”
비아냥거리는 말투였지만, 그녀의 목소리 한구석이 어딘지 모르게 씁쓸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좋은 효도가 되겠지요.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오라버니가 받고자 한 사랑도 끝이 나잖아요? 2왕자는 그동안 무럭무럭 세력을 키웠을 테고요. 자코브는 오라버니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오라버니의 무른 성격을 알기 때문이지요. 왕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는데, 오라버니는 마냥 사랑받기만을 원하니….”
자코브의 어머니가 둘째 왕비이기는 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자코브는 사생아였다. 작위를 챙겨 주는 것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상황인 만큼, 그 정도면 왕가에서는 도리를 다하는 것일 터였다.
오델리가 이러한 것을 훤히 알면서도 고티에에게 자코브를 내치라 냉정하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비앙카는 알 것 같았다. 고티에가 그녀의 친오라버니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와 동시에 왕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는 것이 그녀기 때문이었다. 왕의 사랑 대신 실리를 취하라는 오델리의 말은 그저 배부른 자의 이기적인 투정으로 느껴질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도 참…. 아버지는 자식에게 죄를 지었다 생각해요. 정확히는 어머니와 2왕비에게…. 나이가 드시니 점점 물러지시고, 후회만 남는 거지요. 그래서 단호하게 결정 내리시지 못하고 계세요. 하물며 평범한 귀족가에서도 이런 후계 구도는 바람직하지 않은데….”
비앙카나 카트린 둘 다 확고한 1왕자 파이기 때문인지, 오델리는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드러냈다. 비앙카나 카트린을 통해 자카리와 마르소의 귀에 이와 같은 내용이 들어가, 자코브를 라호즈에서 배제했으면 하는 꿍꿍이도 없진 않았다.
오델리의 말에 카트린은 연신 감탄만 내뱉었다. 카트린의 눈빛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였다.
“왕녀님께서는 정말정말 아는 것도 많으시고, 생각도 깊으세요.”
“전 시간이 많잖아요. 결혼할 생각이 없으니 신부 수업을 할 필요도 없고. 사실, 전 자수는 정말 쥐약이거든요. 손재주가 없어요. 그래서 혼자 있는 심심한 시간에는 책을 한 장, 두 장 들춰 보거나 멍하니 이것저것 생각하곤 한답니다. 그 덕에 괜히 말만 많아지네요.”
오델리는 그저 책 한두 장, 멍한 생각 정도로 가볍게 말했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비앙카는 오델리의 현안에 감탄했다. 실제로 오델리의 추측대로 미래가 흘러가게 된다…. 그리고 비앙카는 그걸, 어떻게든 막아야만 했다.
다시 한 번 노골적으로 드러난 끔찍한 미래에 비앙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생각해 보면 예전과 달리 많은 것이 바뀌었다. 자카리와의 관계. 아버지와 오라버니와의 관계. 주변 모든 사람들과의 인연….
그러니 미래 또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비앙카는 스스로를 다잡듯 강하게 속삭였지만, 마음속에 싹트는 불안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똑같은 생각을 몇 번이나 곱씹다 보면, 처음의 확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앞에 의혹이 드리운다. 혼자만의 생각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비앙카는 자카리를 살리기 위해 회귀했다고 확신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정말로 신의 뜻인지, 아니면 자신이 미친 건지 구분이 모호했다. 그녀가 회귀한 첫날, 신에게 올렸던 기도가 귓가에 웅웅이듯 메아리쳤다.
‘…몸의 부활로서 제 죄를 사함과 함께 소원을 들어주시는 그대의 자비를 칭송합니다. 당신에 대한 저의 믿음은 흔들림이 없으며, 당신의 뜻이 저와 함께함을 믿고 행동하겠나이다…. 되살아난 이 목숨을 걸고, 진실로.’
“당신의 뜻…. 그게 정말로 무엇인가요, 신이시여.”
비앙카는 혼잣말하듯 작게 속삭였다. 머릿속이 어지러운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타인의 확신이었다. 그로써 흔들림 없이, 뒤돌아보는 일 없이 앞으로 달려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교회에 가자는 오델리의 말을 반색하고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녀의 회귀는 신의 기적. 그리고 신의 말씀과 행적, 기적을 기록한 대성경은 대교회에만 존재했다. 세브랑에 있는 대교회는 총 셋이었지만, 아르노 영지 근처에는 대교회가 없었다. 회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라호즈의 대교회에 들러야만 했다.
자카리의 죽음까지 그녀에게 남겨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비앙카의 연녹빛 눈동자가 일렁이듯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