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27화 (127/192)

#127 진실의 파편(3)

“좋은 아침이에요, 아르노 백작 부인.”

“좋은 아침이에요, 왕녀님. 왕녀님께서는 밤새 평안하셨나요?”

“오늘이 너무 기대되어 밤을 설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숙면을 했답니다.”

서로에게 인사를 건넨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빙긋 웃었다. 농담을 건넬 정도로 사이가 제법 친밀해졌다.

그때 비앙카의 시선이 방 한구석으로 향했다. 오델리 왕녀의 뒤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붉은 머리카락은 눈에 띄지 않으려야 안 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왜 여기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 하여 무시할 수도 없다. 비앙카는 치맛자락을 잡으며 우아하게 인사했다.

“다보빌 백작 부인도 좋은 아침입니다.”

“좋, 좋은 아침입니다, 아르노 백작 부인.”

비앙카의 인사에 화들짝 놀란 카트린은 한 박자 늦게 화답했다. 인사를 하며 숙여진 카트린의 고개는 그 상태로 고정이라도 되었는지, 시선이 신발코에 닿아 있었다.

카트린의 소심한 성격은 오델리도 잘 알고 있었다. 앙트의 일에 대한 사과와 친해지는 일은 카트린이 직접 하더라도, 상황 설명 정도는 대신해 주어야겠다 생각한 오델리가 앞으로 나섰다.

“아르노 백작 부인, 당일 통보하게 되어 미안합니다만, 오늘 교회에 다보빌 백작 부인이 동행해도 될까요?”

“저야 괜찮습니다.”

“양해 감사드려요.”

비앙카는 떨떠름함을 애써 감추며 답했다. 나름 감춘다고는 해도 애초에 표정 관리가 매끄러운 편은 아니었던지라, 그녀가 이 상황에 내심 당황했다는 것이 티가 났다.

하지만 카트린과 오델리는 만면에 기쁜 미소를 띠었다. 애초에 비앙카의 긍정적 답 자체를 기대도 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왠지 자신만 성격이 꼬여 있는 것 같은 기분에 비앙카의 미간에 주름이 얕게 패었다.

오델리 왕녀가 뒤에 빠져 있는 카트린에게 눈치를 주자, 카트린이 주저주저하면서 나섰다.

“아르노 백작 부인에게 사, 사과하고 싶었어요.”

“사과요?”

“앙트의 관리에 소홀한 건 제 책임이니까…. 제가 미리 끊어 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허튼 소문으로 백작 부인의 명예에 누를 끼쳤어요.”

“뭘요. 이미 다 해소된 소문 아닙니까. 연회장에서는 제가 다소 날카롭게 말씀드리기는 했지만, 백작 부인에게 별다른 감정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비앙카는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사실 카트린이 이렇게 찾아와서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연회장에서 대놓고 면박을 준 그녀에게 앙심을 품는 쪽이 자연스러웠다.

그래도 카트린과 화해를 해서 나쁠 건 없었다. 다보빌 백작은 유들유들한 기회주의자로, 비앙카의 기억으로는 2왕자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1왕자파였다. 그가 그저 기회주의자이기만 했더라면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그만큼 그가 유능하다는 증거였다.

앙트의 일이야 어쩔 수 없었다지만, 그쪽에서 이렇게 손을 내밀었는데 굳이 쳐 내어 척을 질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비앙카의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비앙카가 이 상황을 더할 나위 없이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는 것과 달리, 카트린은 비앙카의 자못 다정한 대답에 감격할 뿐이었다. 상기된 표정으로 한 발짝 다가오는 카트린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그, 그럼 저희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 친구가 되어주세요….”

카트린은 반색하며 목소리를 버럭 높였다가, 이내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목소리 끝을 흐렸다.

카트린은 사교계의 대화에 약했다. 자신이 눈치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입을 꾹 다물고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주변 대화에 묻어갔는데, 오늘은 누군가가 등을 떠미는 것처럼 조급하기만 했다.

‘조금 더 분위기를 봐서 넌지시 제안할 걸…. 이게 뭐람.’

후회했지만 결국 쏘아 올린 화살이었다. 카트린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비앙카의 눈치를 보았다. 비앙카가 어떻게 대답해줄지 기다리는 시간이 더없이 길게 늘어졌다.

비앙카는 쉽사리 카트린의 제안에 대답할 수 없었다. 비앙카는 어느 정도의 친분, 이득, 계산적인 속셈 등등에는 익숙했다. 그러니 다보빌 백작 부인인 카트린과 친하게 지낼 수 있고,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친구라니….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친구라 불릴 만한 이가 하나도 없었던 비앙카는 친구가 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비앙카가 어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며 뻣뻣이 굳어 있는 동안, 카트린의 얼굴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었다. 푸르게 질렸다가 붉어지는 것이, 마치 토마토가 익어 가는 모습 같았다.

두 사람이 선뜻 말을 잇지 못한 채 침묵을 이어 나가자, 듣고 있던 오델리가 거들고 나섰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엇비슷한 나이였지요. 다보빌 백작 부인이 올해 열아홉이 되었던가요?”

오델리는 비앙카나 카트린보다 열 살가량 많았다. 그녀의 눈에는 두 사람이 마냥 귀엽기만 했다. 수줍음을 타면서도 친구가 되자고 들이미는 카트린이나, 대범한 듯하면서도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는 것이 그대로 티가 나는 비앙카나.

오델리를 찾아와 다리를 놓아 달라 하고, 사과를 핑계로 친구가 되자고 청한다라…. 이렇게 딱딱 들어맞는 생각을 카트린이 했을 리는 없고, 아마 소문이 자자한 그녀의 남편의 계략일 터였다. 뒤 사정을 파악한 오델리의 입꼬리가 빙긋이 올라갔다.

“또래 친구 한두 명 정도는 있는 게 좋아요. 특히 여자는요. 남자가 여자를 완벽하게 이해해 줄 수도 있다지만, 그렇다 해도 완벽히 공감해 줄 수는 없으니까요.”

남자가 여자를 공감할 수 없다는 말에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카트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예스맨으로 유명한 다보빌 백작이나, 전장의 영웅이요, 비앙카가 갖고 싶은 건 무엇이든 구해 주기 위해 세브랑을 넘어 타국까지 사람을 보내는 자카리, 둘 다 남편감으로는 따를 자가 없다는 평을 받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들은 내심 부족한 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남편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카트린은 감탄하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우와…. 왕녀님께서는 결혼하지도 않으셨는데도 그런 걸 무척 잘 아시네요.”

“잘 알아서 결혼을 안 한 걸 수도 있고…. 결혼을 안 해서 잘 알게 되는 것일 수도 있고…. 저에게도 또래 친구들은 있으니까요. 물론 대부분 결혼했지만요.”

어깨를 으쓱이는 오델리 왕녀의 우수에 찬 옆모습이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그녀의 또래 친구들이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이러저러해도 결국 카트린이 제시하였으니, 결론은 비앙카가 내려야만 했다. 비앙카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결단한 비앙카가 올곧게 카트린을 보았다. 비앙카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카트린의 어깨가 움찔했지만,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좋아요. 다보빌 백작 부인. 먼저 제안 주셨으니 저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할게요. 솔직히 친구가 되자는 제안은 고맙지만, 전 친구가 없어요. 그래서 친구가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잘 몰라요.”

비앙카의 말에 카트린의 눈이 벌게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려낼 기세였다. 그녀를 울릴 의도가 아니었던 비앙카는 당황하여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저와 친구가 되어주시겠어요?”

“…무, 물론이죠! 제가 열심히 할게요! 저, 저도 친구가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카트린은 벌건 눈매로 활짝 웃었다. 마치 갈색 털을 곱슬곱슬하니 길게 기른, 귀가 긴 강아지 같았다. 맹목적일 정도로 곧은 눈빛에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이본느가 곁에 있고, 자카리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지만 비앙카는 여전히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준다는 사실이 어색했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본느의 얼굴 만면에 미소가 빙긋이 떠올랐다. 마치 대성한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미소 같은 모습에, 그녀의 옆에 있던 가스파르가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비앙카와 카트린 사이로 오델리가 손뼉을 짝짝, 크게 쳐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 그럼 함께 교회에 가는 거로 할까요! 다만 카트린, 너무 들떠서 주교님께 한 소리 듣지 않도록 노력해요.”

“…네!”

카트린이 1왕자비의 사촌이다 보니 몇 번 만날 일이 있었던 만큼, 오델리는 카트린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앙카도, 눈앞의 아가씨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 사람은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며 교회로 향했다. 세 사람의 뒤로 각각의 시녀와 호위까지 늘어서니 제법 큰 무리가 되었다.

카트린과 오델리의 호위가 흘끔흘끔 가스파르를 곁눈질했다. 토너먼트에서 준우승할 정도로 대단한 기사가 고작 백작 마님의 호위라니. 아르노 백작이 얼마나 아르노 백작 부인을 아끼는지 노골적이다 못해 민망할 정도였다.

가스파르는 얼굴을 뚫을 듯한 열렬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앞에 있는 비앙카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미숙한 행동으로 주군께 불충하는 것은 연회에서의 일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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