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진실의 파편(2)
앙트는 대놓고 마르소에게 추파를 던졌다. 그녀가 내심 카트린을 우습게 보는 것도 마르소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당근 같은 카트린의 붉은 머리카락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마르소를 볼 때마다 자신의 금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으니까. 카트린은 속도 없이 그 옆에서 금발이 정말 예쁘다며 칭찬을 해주고 있으니, 마르소의 속은 이미 타버린 지 오래인 잿더미였다.
그럼에도 마르소가 그녀를 어찌하지 못하고 가만히 두었던 것은, 단지 카트린이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이유 하나뿐이었다.
비앙카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아르노 백작령에서도 똑같은 일이 있었던 듯한데,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카트린은 여전히 앙트를 안타까워했다. 앙트가 자기 남편을 꼬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는 모습이었다. 그게 아니면, 마르소를 믿어서 그런 쪽으로는 생각 한번 해 본 적이 없는 것이던가. 그건 좀 귀여웠다.
하여튼 지금 이 기회에 앙트를 완전히 뿌리 뽑아야 했다.
정말로 카트린이 앙트의 처우에 대해 절절히 간청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다행히도 그의 사랑스러운 부인은 귀가 얇은 편이었다. 그리고 백작은 그런 부인을 자신이 바라는 해결책으로 다가가게 하기 위해 어떻게 몰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노 백작 부인의 말이 틀리진 않습니다. 그녀는 경솔한 자요, 이미 온 귀족들의 눈 밖에 났습니다. 그런 이를 곁에 두는 것은 평판에 좋지 않지요.”
카트린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자칫하면 이대로 땅굴을 파 들어갈 기세였다. 이쯤 해서 당근을 줄 때가 되었다. 한 박자 쉰 마르소는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런 이들보다 아르노 백작 부인과 어울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르노 백작 부인이라는 말에 카트린이 눈을 동글게 떴다. 비록 비앙카가 카트린에게 한 소리 하기는 했지만, 카트린은 그런 것에 꽁해 있는 이가 아니었다. 마르소 입장에서는 조금 신경 썼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오히려 비앙카가 자신에게 실망한 건 아닐까 전전긍긍하는 쪽에 더 가까웠다.
카트린의 주변에는 항상 목소리 큰 여자들이 득실득실했다. 카트린이 기가 약한 걸 핑계로 그녀를 구워삶고 제 목소리를 높이려는 이들이었다. 카트린은 1왕자비의 사촌으로 혈통도 좋으니 허수아비로 앞장세우기 딱이었다. 볼네 자작 영애 패거리도 그런 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에 비하면 차라리 비앙카가 낫다. 연회장에서의 일은 한 사람을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마르소가 본 비앙카는 남들을 이용하여 이런저런 꿍꿍이를 차리느니 차라리 자기가 나설 여자였다. 게다가 신분 또한 카트린 못지않고, 원하는 것 대부분을 그녀의 남편이 전부 얻어다 줄 테니 딱히 카트린을 이용할 이유도 없을 터였다.
그녀는 정말이지, 카트린의 친구로 그린 듯이 완벽했다.
다소 고집스럽고 단호한 구석이 있어 보였지만, 자작 영애를 구원한 걸 보아 할 때 매정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녀가 단호한 만큼 카트린은 덤벙대고 허술하니 괜찮을 것이다. 오히려 마르소는 카트린이 그런 비앙카의 단호한 모습을 배우기를 내심 바랐다.
왕가가 기준인 전통적인 미인은 아니었지만, 비앙카 또한 객관적인 미인에 속하니 카트린이 흥미를 갖기 충분했다. 마르소의 눈이 계략을 꾸미는 듯 빛났다.
아니나 다를까. 카트린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며 조심스레 물었다.
“과연 저랑 어울려주실까요?”
“물론. 그쪽에서도 부인을 마음에 들어 하니, 그리 모진 소리를 한 것이지요. 제가 얼핏 보아하니 정말 관심 없는 이에게는 그 정도의 충고조차 하지 않는 사람인 것 같더군요.”
“그래도요.”
카트린은 우물쭈물 손가락을 얽었다.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마르소의 예상대로 비앙카에 대한 흥미가 풀풀 풍기는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렀다.
카트린이 미끼를 물은 걸 확인한 마르소는 마지막 쐐기를 박아 넣었다.
“부인께서는 제 사람 보는 눈을 믿지 못하십니까?”
“아니요. 그럴 리가요. 백작님의 말은 무엇이든 믿어요.”
카트린은 활짝 웃으며 마르소를 보았다. 신뢰 가득한 눈빛은 마치 강아지가 주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올곧고 선량했다. 마르소는 그런 카트린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그녀의 뺨을 손등으로 훑으며 말했다.
“그러면 왕녀님에게 가 보세요.”
“왕녀님이요?”
“왕녀님과는 1왕자비님과 함께 만나며 낯을 익히지 않으셨습니까. 왕녀님께 가서, 아르노 백작 부인과 친해지고 싶다는 뜻을 넌지시 밝히세요. 오늘 일을 사과하고 싶다고도요.”
“좋아요!”
오델리를 만날 수 있는 명분이 생기자 카트린의 얼굴이 환해졌다. 미인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있어, 정말 보기만 해도 황홀하다는 것이 느껴지는 오델리야말로 곁에 항시 붙어 다니고 싶은 상대였다. 오델리가 하는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하루 종일 보낼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만큼이나.
다만 지금껏 친해질 마땅한 명분이 없었고 대뜸 들이댈 만큼의 숫기도 없었던지라, 오델리와의 관계는 가끔 안부 인사차 들르는 것 정도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것이 카트린의 최선이었다.
하지만 마냥 좋아하기엔 궁금한 게 있었다. 카트린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물었다.
“왜 왕녀님이죠? 오히려 아르노 백작이 1왕자를 모시니, 1왕자비님께 가는 것이 더 낫지 않나요?”
카트린의 사촌인 1왕자비 쪽이 좀 더 수월하게 다리를 놓아줄 텐데, 오델리 왕녀라니? 카트린이야 오델리 왕녀를 만날 수 있으니 좋다지만….
모르겠다는 듯 눈을 둥글게 뜨고 그를 바라보는 카트린의 모습에 마르소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카트린이 오델리 왕녀에게 가야 하는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오늘 그 자작 영애를 왕녀님께서 데려가지 않으셨습니까. 덕분에 오늘의 일이 무사히 끝이 났고요. 만약 아르노 백작 부인이 은원을 아는 이라면, 왕녀님께 보답을 할 것입니다. 1왕자비님과는 남편을 통해 정치적인 이점으로 묶인 관계지만, 오델리 왕녀님과는 직접적으로 얽히게 되었죠. 부인이 친해지시기 편할 겁니다.”
“백작님은 역시 대단하세요!”
카트린은 높은 목소리로 감탄했다. 역시 내 남편은 대단한 사람이야. 그 짧은 새에 거기까지 판단해 내다니…. 카트린의 초롱초롱한 눈에서는 존경심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마르소는 카트린을 꿀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금슬 좋은 부부는 한참을 서로에게 금칠을 한 뒤, 자연스레 침대로 향했다.
결국 카트린은 앙트에 관한 이야기를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달성한 마르소의 입술이 흡족스레 올라갔다. 이제 앙트를 그들의 눈에서 영영 치워버리는 일만 남았다. 속이 다 시원했던 그는 소리 높여 웃고 싶은 심정을 애써 꾹 누른 채, 카트린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지었다.
* * *
오델리와 같이 교회에 가기로 약속한 날이 되었다. 자카리가 허락해주기는 했지만, 그렇다 하여 걱정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비앙카가 떠나기까지 자카리는 계속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걱정 마요.”
“걱정하는 것은 나의 의무요. 그대는 신경 쓰지 말고 잘 다녀오시오.”
자카리는 고집스레 고개를 내저었다. 마음 같아서는 줄줄이 기사들을 붙여 사방을 둘러싸게 하고 싶었지만, 그 제안을 했을 때의 비앙카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왕녀와 동행하는 만큼, 왕녀보다 호위 기사가 많을 수는 없었다.
비앙카의 외출 문제로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 그의 눈 밑이 조금 퀭했다. 그래도 해결책을 찾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자카리가 내린 결론은 호위는 평소보다 둘 정도 많이. 그리고 교회의 주변에 기사를 배치하는 것이었다. 자칫하면 교단과의 마찰이 불거질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그리 많은 수를 할당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교회 주변에 기사 몇이 어슬렁거리는 것 정도는 법도에 어긋나지 않으니, 크게 문제 되지는 않을 터였다.
비앙카의 호위를 이끄는 일은 언제나처럼 가스파르가 그리고 교회는 로베르가 맡게 되었다. 소뵈르는 아르노 영지로 돌아가기 위한 보급품을 채워 넣는 일을 맡고 있느라 바빠서 무리였다.
예전의 로베르였다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며 작게나마 볼멘소리를 투덜거렸을 테지만, 연이은 자코브의 미친 행동에 기겁을 한 만큼 이번 일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다만 비앙카가 교회에 기사를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질색을 하며 만류할까 걱정되었다. 자카리는 고의적으로 그 사실을 함구했다. 그는 비앙카에게 진실된 사내였지만, 이번 일은 비앙카가 굳이 묻지 않았으니 상관없다 눈 가리고 아웅 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나오지 마요.”
비앙카가 만류했지만 자카리는 부득불 성의 일 층까지 따라 내려왔다. 이대로 가다가는 왕녀의 성까지 같이 갈 것 같았던지라, 비앙카는 자카리를 떼어 놓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뛰듯 성큼성큼 걷는 걸음이 위태위태했다.
비앙카가 넘어질까 걱정되었던 자카리는 그제야 비앙카를 따라가는 것을 그만두고 우뚝 선 채, 비앙카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집 지키는 개 같았던지라, 걸어 나가는 비앙카의 입술이 치미는 웃음기로 바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