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달라진 마음(9) / 진실의 파편(1)
하지만 자카리는 언제나 욕심임을 알면서도 갖고 싶은 것은 꾸역꾸역 취해 온 사내였다. 명예도, 영지도, 작위도, 승리도…. 상대가 건네주었음에도 거절한 것은 비앙카와의 첫날밤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열여덟이 되기 전, 욕망에 무릎 꿇게 되고 말았다.
자카리의 까만 눈동자에 비앙카의 얼굴이 비춰졌다. 미처 숨을 고르지 못한 비앙카는 헐떡이면서도 말갛게 웃었다. 양털처럼 새하얬던 얼굴은 열기로 달아올라 있었는데, 그 모습이 안 그래도 짧은 자카리의 인내심에 불을 붙였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간의 침묵과 함께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 분위기를 깨고 먼저 움직인 것은 자카리였다. 비앙카의 발밑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자카리의 손이 더듬거리며 비앙카의 등 뒤로 다가갔다. 그녀의 옷끈을 손끝의 감각에 의지하여 하나, 하나 풀어내는 그의 머리 위로 햇살이 쏟아졌다.
아직 창밖으로 해가 훤했다. 대낮에 정사를 치러 본 경험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주로 페르낭과의 일이었다. 그들의 밀회는 언제나 다급했고 여유가 없었다. 대낮이고 밤이고를 가릴 만큼 여유가 있지는 않았던 만큼, 비앙카는 사랑 앞에 체면을 집어던졌었다.
페르낭에게도 허락했는데, 자카리에게 허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는 것은, 자카리와의 정사에서 비앙카는 이성을 부여잡지 못한 채 엉망으로 흐트러지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아닌 것처럼…. 마치 짐승같이. 창부의 여인도 그렇게 음란하게 흐트러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훤한 대낮에 생생하게 보여주게 된다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정숙지 못한 모습에 자카리가 실망이라도 하게 되면 어쩌지. 불안하고 부끄러웠던 비앙카는 입술을 얕게 깨물고는 바르작거리며 저항했다.
“아직 해가 떠 있어요.”
“곧 질 것이오.”
“하지만 아직 밝은 걸요. 조금만 있다가….”
“태양과 함께 지켜보고 계신 여신께서도 이해해주실 것이오.”
비앙카의 목소리에 섞인 미약한 흥분을 읽은 자카리는 물러섬이 없었다. 거절을 내포하는 비앙카의 말에 또박또박 답변하는 그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자카리는 비앙카가 정말 싫은 일을 거절할 때 어떻게 표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먼저 뺨을 후려갈기고,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며 한 자, 한 자 씹어 뱉듯 이야기 하겠지. 그에 비하면 지금의 비앙카는 거절하고 있지만, 동시에 거절하고 있지 않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 또한 그의 욕심으로 인한 착각일지도 모른다…. 의혹이 싹트자 확신은 금방 무너졌다. 방금 전까지 강하게 주장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자카리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만약 그대가 정말로 싫다면.”
자카리가 비앙카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때 비앙카가 웃음을 터트렸다. 빙긋이 미소 짓는 것이 기쁨의 전부일 정도로 커다란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그녀가 소리 내어 웃자, 자카리는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어안이 벙벙하여 비앙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비앙카는 배까지 잡았다. 자카리는 도통 알 수가 없어 끔뻑끔뻑 눈을 떴다.
한참을 웃던 비앙카가, 눈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치며 말했다.
“제가 당신이 아까 전처럼 빤히 바라보는 것에 약하다는 거, 알고 있어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아.”
자카리가 웅얼거리듯 답했다. 비앙카가 어렸을 때, 그가 빤히 바라보면 울음을 터트리곤 했다. 아니, 굳이 빤히 바라보지 않아도 울었던 것 같았다. 그냥 그가 시야에 닿기만 하면 우는 것 같아, 비앙카에게 발걸음을 끊은 적도 있었다.
자카리가 얼마나 어린 시절까지 회상하는지 알 수 없었던 비앙카는 그저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을 떠올렸겠거니 지레짐작했다. 딱히 그 시점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비앙카는 짐짓 엄하게 말했다.
“맨날 그렇게 무뚝뚝하게 노려보니까 그렇지요. 조금 더 웃어 봐요.”
“…이렇게?”
자카리는 비앙카의 말대로 고분고분 웃었다. 평소 올라가던 높이보다 더 높게 올라간 입가가 아팠다. 광대는 파르르 떨렸고, 눈은 감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위엄 있는 철혈의 기사 아르노 백작답지 않은 우스꽝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자카리는 한참을 입꼬리를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하며 어색한 미소를 연습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앙카가 실소 어린 웃음을 지었다. 게다가 고개를 내젓기까지 하니, 그녀가 혹시 실망했나 싶어 불안해진 자카리의 입매가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비앙카가 자카리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직도 씰룩이는 광대를, 손가락으로 류트 현을 두드리듯 통통 가볍게 건드린 그녀는 이내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감싸 쥐었다. 비앙카의 손바닥은 약간 찼지만, 시원한 가을바람과도 같이 기분 좋은 온도였다. 비앙카가 바람결처럼 속삭였다.
“그래도 요즘은 예전보다 나아요. 마냥 위협적이지도 않고. 입술도 예쁘고.”
“……?”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자카리가 멀뚱히 비앙카를 보자, 그녀의 얇은 입술이 못마땅한 듯 비틀렸다. 답답해 죽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비앙카는 어린아이에게 셈을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조곤조곤 일렀다.
“그러니까, 당신 입술 예쁘다고요. 제가 이렇게 칭찬하면 당신도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어요.”
자카리는 어색하게 비앙카가 시키는 대로 했다. 두 눈을 내리감자 시야가 차단되고 번개가 튀는 듯한 불꽃이 그의 시야에 가득 피어올랐다.
자카리는 뛰어난 무인이었다. 눈을 감아도 앞에 있는 비앙카의 움직임의 흐름이 마치 보이는 듯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비앙카가 지금 어떤 표정인지 만큼은 전혀 알 수가 없었던 자카리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의 손에 식은땀이 스며들었다. 과연 이건 비앙카가 날 놀리는 것일까. 아니면….
다행히 그의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비앙카가 그대로 자카리의 목을 끌어당기며 입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입술이 닿아 오는 느낌은 어지러이 흩어지는 불꽃 사이에서도 유난히 생생했고 뜨거웠다.
창틀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환한 햇볕 아래서, 두 사람의 몸이 다시 한 번 얽혔다.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그리고 음란하게.
* * *
승전 연회가 끝난 날, 카트린은 머리카락만큼이나 얼굴이 새빨개져서 숙소로 돌아왔다. 그녀의 우유부단한 행동이 다보빌 백작가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
그녀의 남편이 데릴사위로 와서 다보빌 백작가를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 그녀였다. 그랬던 만큼 그녀는 자신이 남편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누를 끼쳤다는 사실이 견딜 수가 없었다. 카트린은 웅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해요.”
“무엇을요?”
독사의 혀라는 이명을 갖고 있는 다보빌 백작, 마르소가 매끈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휘어진 눈매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정돈된 머리카락과 옷은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언제나 완벽한 그를 나타내듯이. 그에 비해 나는…. 카트린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저 때문에 가문의 이름에 오점이 남겨졌잖아요. 이리저리 휘둘리는 백작 부인이라고 얕잡아 보여질 거예요.”
마르소는 비음 섞인 달콤한 목소리로 카트린을 다독였다.
“그럴 리가요.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문제가 된 것은 그…. 자작 영애 아닙니까. 부인께서는 그저 자작 영애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겁니다. 아르노 백작 부인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부인이 사려 깊다고.”
볼네 자작가의 이름을 생각해 내지 못한 마르소가 잠시 머뭇거렸지만, 그래도 작위는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마르소는 비앙카의 날카로운 독설 중 듣기 좋은 말만을 걸러 내어 상기시켰다. 그는 남의 장황한 말에서도 간결한 핵심을 뽑아내는 재주가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제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따로 기억하는 재주도 있었다.
그런 마르소의 위로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지, 카트린은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앙트도 지키지 못하고…. 앙트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제 그런 이에게 신경 쓰지 마십시오.”
답지 않게 마르소의 말이 단호했다. 항상 카트린이 바라는 대답만을 하는 그였지만, 이번 일만큼은 목소리를 높여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앙트는 마르소의 눈엣가시였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다보빌 백작령으로 옮겨 온 그녀. 일감을 구한다며 여기저기 알아보더니 순식간에 왕성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거기까지야 마르소가 알 바가 아니었다지만, 왕성에 취직하게 되고 나서부터가 문제였다.
카트린은 알게 모르게 예쁜 것을 좋아했다. 그것이 사람이라 해도 다를 바는 없었고, 여자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미인을 좋아하는 것은 성애라기보다는 관상에 가까웠다.
그리고 앙트는 전형적인 미인의 생김새였다. 앙트와 마주친 카트린은 그녀를 자신의 시녀로 삼아버렸다. 저렇게 예쁜 아이가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이 보기 안쓰럽다는 이유에서였다.
만약 앙트가 조금만 더 착했더라면 마르소도 그녀를 눈엣가시처럼 여길 이유가 없었다. 아니면 적당히 눈치 있게 굴던가. 하지만 그녀는 못됐고, 눈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