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달라진 마음(8)
“질투하는 줄도 몰랐던 거예요?”
“…이제 알게 되었으니 헷갈리지 않아.”
답하는 자카리의 목소리가 다소 침울했다. 별거 아닌 상대에게도 질투를 하다니. 이건 전혀 긍정적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질투라는 것 자체가 그러했다. 질투는 본디 자카리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었으니까…. 죄책감이 자카리를 사로잡았다.
그와 비앙카는 부부라는 이름으로 얽혔으니, 남편이 아내의 주변을 맴도는 사내에 대해 질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정의 내리기엔 변수가 있었다. 바로 그들의 결혼이 이루어진 계기였다.
그들의 결혼은 장사였다. 사고, 판다. 자카리가 지불한 것은 목숨 걸고 얻어 낸 전쟁의 승리였다. 그렇다면 자카리가 받아낸 것은….
송아지 400마리, 돼지 900마리, 은그릇 100개, 비단 300필, 보석 두 궤짝, 그리고 영지 일부분. 아직도 줄줄이 읊을 수 있는 지참금들. 아르노가의 이 년 치 예산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면, 자카리가 아직까지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죄책감에 머뭇거리지 않을 터였다.
그가 받은 것들 중 제일 귀한 것. 그가 평생을 시체 썩는 냄새와 피 웅덩이 속에서 살아도 결코 갚을 수 없는 것….
그건 바로 비앙카였다.
만약 거래를 하였는데, 지불한 것에 비해 받은 것이 너무나 값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이들은 모르는 척 과한 대가를 삼킬 테지만, 자카리는 그럴 수 있는 성정이 아니었다. 차라리 조금만 더 대쪽 같았더라면 어린 비앙카를 돌려보내고 결혼을 파기했을 테지만…. 스무 살의 그는 어중간했다.
이제 막 남작 위를 받고 도약하던 그때의 그는 도저히 이 거래를 무를 수 없었다. 결국 상황에 굴복해 버린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소화해 내지 못할 비앙카를 받아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곧 비앙카의 희생과 연관되었다.
비앙카는 절대 납득하지 않을 테지만, 자카리는 어린 비앙카의 세상의 중심이나 다름없었었다. 남편이라서가 아니라 어른이라서. 어린 나이에 가족과 동떨어져 낯선 곳에 온 그녀의 보호자였고, 울타리였다. 그것은 생각보다도 무겁고도 힘겨운 굴레였다. 전쟁터에서 장정들의 목을 수백, 수천 베었으면서도, 제 손가락 끝에 달린 비앙카의 목숨의 무게가 더 무거웠다.
그러니 잘했어야 했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자카리는 어수룩했고, 부족한 점이 많았다. 출세하기 위해 전쟁터로 달려 나가는 그의 등 뒤로, 비앙카는 홀로 성에 남겨졌다.
그렇게 자카리가 잠깐잠깐 눈을 돌리는 사이에도 비앙카는 쑥쑥 자라났다. 세월은 쏜살같아, 어느덧 자카리는 백작 위에 오르고 명실상부한 세브랑의 영웅이 되었다. 이제 좀 여유가 생겼다 싶어 뒤돌아보았을 때, 성장하여 자신을 바라보는 비앙카의 눈빛에 서린 거부감. 그제야 자카리는 자신이 너무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비앙카의 유년 시절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했을 것인가. 스무 살이었던 자카리는 채 알지 못했지만, 이제 세월이 흘러 서른을 목전에 두고 나니 눈에 훤히 보였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 성에 홀로 남은 그녀…. 다시 생각해 보아도, 자카리 그는 썩 좋은 보호자가 아니었다.
부채 의식을 짊어진 자카리는 비앙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려 애썼다. 그것이 바로 자카리를 위해 유년 시절을 희생당한 비앙카에게 건네는 속죄였다.
자카리 본인의 유년 시절 또한 엉망이었으니, 상관없지 않으냐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비앙카까지 이런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잘못 끼워진 단추라지만 뒤늦게나마 수습할 수 있다면 수습하고 싶었던 자카리는, 항상 비앙카에게 무언가를 주기 위해 골몰했다. 비앙카가 갖고 싶은 것이 있다 말할 때, 자카리는 차라리 안도했다. 갖고 싶은 것 마저 없었더라면, 그는 어찌할 바 모르며 침몰했을 테니까. 그는 비앙카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꺼웠다.
그렇게 온갖 금은보화를 끌어다 안겨도 부족한 데, 그녀에게서 무언가를 받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것이 감정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자카리가 비앙카에게 약소하게나마 기대 한 점 품는 것도 가당찮은 일이다. 제 풍랑과도 같은 감정에 비앙카를 휩쓸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카리는 더더욱 비앙카의 앞에서 얼굴을 굳혔다.
그런데 질투라니. 자카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신이 배가 많이 부른 모양이다. 백작이자 나라의 영웅이 되니 칼 하나 들고 내쫓긴 열여섯 살의 꼬마 기사 시절을 기억 못 하듯, 비앙카가 저를 보고 웃어주니 고새 그녀에게 독점욕이 드나 보다.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며, 자카리는 조용히 사죄했다.
“내가 미안해.”
“뭐가요. 질투하는 게요?”
“…그냥, 전부 다.”
“실없기는.”
비앙카는 입술을 삐죽였다. 생각보다 자기감정에 둔한 남자였다. 질투하는 줄도 모른다는 게 말이 돼? 처음에 자코브를 이용하여 자카리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려 했던 것이 어처구니없을 정도였다. 그때는 질투를 이용해 자카리와의 합방을 꾀할 생각이었는데…. 자코브는 미친놈이었고, 자카리는 자신이 질투하는 줄도 모르는 멍충이였다.
결국 자카리를 비앙카의 침대로 밀어 넣은 것은 질투가 맞았으나, 그 사실을 모르는 비앙카는 자카리가 눈치 없고 둔하다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비앙카가 자코브를 이용하려는 것을 생각만 했을 뿐, 막상 실천으로 옮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생각을 한 건가 반성하며 비앙카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카리는 비앙카를 빤히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자카리의 앞에서 어깨를 굳힌 채 잔뜩 긴장하고 있던 것과 달리, 지금은 다른 생각도 하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생기 있는 모습이 훨씬 보기 좋았다. 비앙카의 붉고 도톰한 입술이 궁시렁대며 옴씰옴씰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자카리는, 저도 모르게 비앙카의 입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비앙카의 매끄러운 입술에 자카리의 손끝이 닿기 직전에서야 자신의 행동을 깨달은 자카리가 손을 멈췄다. 비앙카는 갑작스러운 자카리의 행동에 의아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
“…입술이.”
“입술이?”
“…….”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던 자카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본인조차 무슨 생각으로 그녀에게 손을 뻗은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입술을 만지고 싶었다. 왜? 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는 것이 귀여워 보여서…. 나도 모르게…. 하지만 과연 이 대답이 비앙카의 마음에 들 것인가? 너무 유치한 대꾸라 생각하진 않을까? 차라리 입술에 뭐가 묻었다고 하는 건 어떨까? 레이디의 차림새에 트집을 잡는 거라고 오해하진 않을까?
자카리는 유창한 말주변에는 자신이 없었다. 지금껏 자카리가 비앙카의 앞에서 입을 다물고 침묵한 것은, 혹여나 자신이 괜한 말로 비앙카에게 상처 줄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예전에 몇 번, 그 때문에 비앙카를 화나게 했던 적도 있었다.
이제는 비앙카의 허리에 스스럼없이 손을 감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이런 돌발 상황에는 약했다. 자카리가 입을 꾹 다물고 괜찮은 답변을 떠올리려 머리를 쥐어짜고 있던 찰나, 비앙카가 픽 웃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럴 땐 입술이 어여쁘다 말해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전 수줍게 눈을 내리감고, 당신이 칭찬해주신 입술을 슬며시 자랑할 거예요.”
비앙카의 눈이 감기고, 자카리가 그토록 넋을 잃고 있었던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며 하얀 이가 붉은 입술 사이로 살짝 모습을 보였다. 그녀가 바라는 바는 명백하고도 노골적이었다. 둔한 자카리도 더 이상 착각하지 않을 정도로.
“그러면 당신은…. 으응.”
비앙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를 향해 자카리가 다가왔다. 그녀의 위로 자카리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자카리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맞닿았다.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오가며 입술이 점점 벌어졌다. 비앙카는 눈을 꼭 감고 겹쳐진 그의 입술을 느꼈다. 그는 항상 다급했고, 여유가 없었다.
“하읏, 응….”
자카리의 혀가 비앙카의 예민한 곳, 곳곳을 스치고 지나갔다. 잇몸 안쪽, 혀뿌리, 입천장…. 점점 다리에 힘이 풀리며 허벅다리가 작게 경련했다. 비앙카는 자신이 의자에 앉아 있는 걸 다행이라 생각했다.
자카리의 손이 의자 팔걸이에 걸쳐진 비앙카의 팔을 속박하듯 잡았다. 다른 사내에게 강압적으로 팔이 잡히는 것이 진저리 치도록 끔찍했던 것에 비해, 자카리에 의해 속박되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옴짝달싹할 수 없이 온전히 그에게 안기는 기분이 들어 배 속 깊은 곳이 찌르르하기까지 했다.
이대로 비앙카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발라먹을 것처럼 탐욕스레 그녀를 취한 자카리가, 한참 끝에 떨어져 나갔다. 숨을 몰아쉬는 그의 눈빛에 스민 욕망이 적나라했다.
“…당신에겐 정말인지 못 당해 내겠군.”
비앙카가 내려 준 다디단 해답을 마음껏 취한 자카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은 그에게 너무 과분한 보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