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달라진 마음(6)
‘2왕자의 어머니였던 둘째 왕비께서는 원래 첫째 왕비님의 친한 친척이었다고 해요. 어떻게 보면 마님과 먼 친척 사이지요. 마님의 어머님께서는 첫째 왕비님의 조카셨으니까요.’
비앙카의 어머니가 첫째 왕비와 혈연지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둘째 왕비 또한 그런 줄은 몰랐다. 비앙카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침묵으로 이본느를 재촉했다.
‘촌수가 그리 가깝지는 않았지만, 또래라서 친하게 지내다 보니 첫째 왕비님이 결혼하셔서 라호즈로 오셨을 때, 둘째 왕비님도 참석하셨다고 해요. 그리고 그때 전하께 반하셨지요. 당시의 전하께서는 고티에 왕자님이나 자코브 왕자님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미남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왕에게 한눈에 반한 둘째 왕비는 왕가의 기품을 배우겠다는 명목하에 성에서 머물렀다. 하지만 첫째 왕비에게 홀딱 반한 왕이 그녀에게 눈길을 줄 리가 만무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첫째 왕비가 고티에 왕자를 임신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왕비와 왕의 사랑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 사랑이 어그러진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
‘첫째 왕비는 몸이 약했어요. 고티에 왕자님을 낳으시고 한동안 요양을 하셨는데, 그사이에 일이 터졌지요. 바로 술에 만취한 왕과 둘째 왕비가 동침한 거였어요. 왕께서는 술에 취해 기억이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지요. 통정한 사내들이 하는 흔한 변명들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건 왕으로서는 무척 난감한 상황이었다는 거예요. 그토록 사랑하는 첫째 왕비를 두고 다른 여자를 품은 것도 모자라, 그 상대가 첫째 왕비의 친척이었고, 심지어 그녀는 처녀였으니까요.’
왕은 청천벽력 같은 일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왕이 애인을 두는 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상대가 처녀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씻지 못할 부덕의 소치. 왕은 그녀를 허겁지겁 자작가로 결혼시켜 내보냈다.
‘하지만 둘째 왕비는 그 하룻밤으로 임신을 해버렸어요. 그녀의 배를 빌려 태어난 사내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는 굳이 따져 보지 않아도 명백했지요.’
그 일로 첫째 왕비가 심한 마음의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믿었던 남편과 친구에게 배신당한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을까. 그 때문에 왕은 한동안 첫째 왕비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노심초사했고, 이내 첫째 왕비는 왕을 용서했다.
그 용서의 증표가 바로 오델리 왕녀였다. 하지만 얄궂게도, 첫째 왕비는 오델리 왕녀를 낳고 오래지 않아 산욕열로 죽게 되었다. 왕은 3년 동안 첫째 왕비를 그리며 슬픔에 젖어 있었지만, 언제까지 왕비의 자리를 비워 둘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남은 왕비의 자리는, 결국 둘째 왕비가 얻게 되었다.
둘째 왕비의 남편이었던 자작은 이미 둘째 왕비에게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뒤였기에 이혼의 절차는 간단했다. 그렇게 자코브와 둘째 왕비는 라호즈에 입성할 수 있었다.
왕은 자코브를 홀대하지 않았다. 태어나서 지금껏 얼굴 한번 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일까, 안쓰러움에 시선을 한 번 더 주곤 했다. 하지만 둘째 왕비에게는 아니었다. 왕은 둘째 왕비를 피했고,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그들 부부가 나란히 서는 것은 공식 석상에서 뿐이었다.
둘째 왕비는 그토록 바라는 바를 달성했지만, 왕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왕의 사랑을 갈구하며 점점 미쳐 간 그녀는 친아들인 자코브마저 외면하고 방치했다. 분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렇게 자코브는 사생아로 태어났지만 결국은 왕자가 되었고, 나름 왕자로서의 대접을 받으며 자라났다. 하지만 그와 첫째 왕비의 소생들 사이에는 명확히 줄이 그어져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부과된 원죄가 자코브의 목을 죄었고, 왕자로서 떠받들어져 자란 그가 그런 차별에 반발하는 건 당연한 흐름이었다.
‘자코브 왕자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고티에 왕자님과 수도 없이 다투었다고 해요.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는 형제다 보니 싸우며 자라는 것도 당연하기는 하지만…. 뭐, 눈치가 빠르신 분이니 자신이 처하신 상황을 아셨겠지요. 억울한 응어리가 져도 이상하지 않아요. 그래도 왕께서는 제법 차별 없는 평등한 대우를 하려 노력했다 해요. 속내로는 고티에의 편을 든다 해도 말이죠.’
그런 왕의 속내가 확실히 까발려진 것은, 바로 오델리와 자코브가 다툴 때였다. 어린 시절부터 오델리와 자코브는 앙숙이었다. 고티에가 나름 형 노릇을 하려고 하지만 자코브가 반발했다면, 오델리와는 쌍방으로 적대감이 오갔다.
‘하지만 자코브 왕자님과 오델리 왕녀님이 다퉜을 때는…. 가식이나마 평등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셨죠. 주변 사람들도, 그때와 같이 노호처럼 화내는 왕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해요.’
그녀는 왕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첫째 왕비가 그를 받아주었다는 사랑의 증거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첫째 왕비를 쏙 빼어 닮기까지 했으니, 편애는 극에 달했다.
그런 오델리가, 왕이 부정을 저질렀다는 낙인이나 다름없는 자코브와 다툰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오델리와 얽히는 일이 있다면 왕은 자코브를 콱 내리눌렀고, 자코브는 오래지 않아 오델리와 얽히는 일을 극도로 피하기 시작했다.
지금껏 아르노 영지에 콕 박혀 있던 것은 이본느나 비앙카나 매한가지인데, 이본느가 이리도 잘 알고 있는 것을 비앙카 혼자 모르고 있었다니…. 비앙카는 자신이 얼마나 주변에 관심이 없었는지 다시 한 번 느꼈다. 앞으로는 이래서는 안 된다. 초조함에 비앙카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이요.”
“표정이요…?”
비앙카는 그제야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깨달았다. 불안하다 오해하기 딱 좋은 표정이었다. 비앙카는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이렇게까지 그자 걱정을 해야 하는 게 싫어서.”
“…내가 부족하여 그렇소.”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자카리가 자책하기가 무섭게 비앙카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당신이 신경 써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하지만 오델리 왕녀님과 함께하니, 당신이 걱정할 필요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일 뿐이에요.”
비앙카는 오델리 왕녀가 얼마나 든든한 방패막이인지 설명했지만, 자카리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자카리는 딱딱하게 굳은 입매로 중얼거리듯 속삭였다.
“오델리 왕녀를 퍽 믿나 보군.”
“그럼요. 게다가 왕녀님께서는 무척 좋은 분이세요. 나이에 얽매이지도 않고, 생각도 자유로우시고….”
비앙카는 반색하며 오델리 왕녀의 장점을 줄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카리의 뺨이 작게 바르르 떨렸다. 그렇게 눈에 띄는 거리낌을 비앙카가 읽지 못할 리 없었다. 자카리가 꺼려 하는 것은 설마…. 난처해진 비앙카는 자카리의 눈치를 보며 슬며시 물었다.
“혹시…. 제가 오델리 왕녀님과 어울리면 안 될 이유가 있나요?”
“그건 아니오. 다만…”
자카리는 계속해서 머뭇거리며 말하기를 주저했다. 무엇이 그의 혀끝을 옭아맨 걸까. 비앙카의 연녹빛 눈동자가 곧게 응시하자, 자카리는 이내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아니오. 내가 치졸했소.”
“치졸하다니요. 혹시 거리끼는 게 있다면 알려주세요. 제가 아는 게 없어서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
비앙카는 속이 탔다. 무언가 심기가 불편한 게 분명한 것 같은데, 말을 안 해주니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건, 자카리는 비앙카가 오델리와 어울리는 것을 못마땅해한다는 것이었다. 혹시 오델리 왕녀와 친하게 지내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걸까. 하지만 짐작 가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비앙카가 끙끙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 자카리의 입술이 달싹였다.
“…해서.”
“네?”
잘 들리지 않았던 비앙카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자카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전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무척 초조해 보였다. 비앙카를 한쪽 어깨에 앉힐 수도 있을 만큼 너른 어깨는 어딘지 모르게 의기소침으로 쪼그라들어 있기도 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처량한지, 지금의 그를 보면 전장의 영웅, 철혈의 기사라는 칭호가 전부 거짓부렁 같았다.
자카리 드 아르노가 여인네의 눈조차 마주치지를 못한다니! 남이 들었으면 비웃으며 믿지 않을 이야기였다. 그와 마주한 비앙카 또한 두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쉽게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자카리는 비앙카의 눈치를 보며, 마음속 깊은 치부를 고백하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오델리 왕녀는 자유롭게 살고 있지 않소. 그에 비해 그대는 어린 나이부터 결혼을 하여 독신의 생활이 없다시피 하였고…. 그녀와 어울리며 그대가 혹시나 결혼했다는 신분을 답답히 여길까 봐…. 내가 신경 쓴다고 신경 썼지만, 아무래도 독신인 것과는 다르고…. 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부분도 있지 않겠소. 혹시나 그런 점 때문에 그대가 불만을 품을까 잠시 걱정하였던 것이오.”
“…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렇게 불편한 점을 자각한다면, 내가 고치면 되는 일이니 괜찮소. 내가 잠시 사내답지 못한 치졸한 걱정을 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