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20화 (120/192)

#120 달라진 마음(4)

오델리는 결혼을 하지 않은 채로 스물여덟이 되었다. 귀족 여인들의 초혼이 늦어도 스물다섯 이전에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하면, 혼기가 늦어도 한참 늦은 상황이었다.

오델리가 독신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아버지인 왕의 집착 어린 애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왕은 사랑하는 첫 번째 왕비를 빼어 닮은 딸을 시집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딸을 아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딸의 신분에 상응하는 남편감을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위를 한 단계 낮춰 맞이하기도 싫고, 세브랑의 왕실은 결혼 장사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튼튼했다. 왕의 고집을 꺾을 정도로 매력적인 사윗감도 없었다.

하여간 오델리는 아버지 덕분에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문에 아버지가 속박하는 인생의 답답함 또한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결국 오델리는 아버지의 소유물일 뿐이었다. 아버지가 그녀에게 제안한 인생과 그녀가 바라는 인생의 방향이 같지 않았더라면 오델리의 인생도 퍽 불행했을 테지만, 다행히도 그들 부녀의 바람은 같았다.

하지만 그런 왕의 가호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결혼시켜야 한다 주장하는 날파리들이 끊임없이 꼬이니, 귀족 여인네가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누구보다 더 잘 알게 되었다.

연회에서 사내들이 비앙카와 자신을 비교하며 비앙카를 치켜세우는 것이 무슨 의도를 품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오델리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델리를 후려쳐서 그녀가 안달 나게 하려는 속셈이었겠지. 오델리가 그들의 의도를 모를 정도로 순진했더라면 진즉 다른 사내에게 코가 꿰여도 단단히 꿰였을 테지만, 그녀의 벽은 철옹성과 같았다.

자코브가 그런 그녀를 못마땅해한다는 것도 알았다. 귀족 사내들이 계속해서 그녀를 찔러보는 이면에는 자코브의 부채질이 한몫하고 있다는 것도. 그럼에도 오델리가 독신을 고집한다면, 그녀를 수도원으로 보낼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오델리에게 들어가는 돈이 아까운 것이리라. 웃기는 소리였다. 그녀에게 들어가는 돈은 어디까지나 왕의 재산이요, 자코브의 돈은 한 점 없었다.

오델리는 사내들의 시선은 싫었지만, 아름다운 자신의 외모를 돋보일 차림새에는 아주 관심이 많았다. 자코브는 사내들을 꺼리면서도 그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길 원하는 거냐며 비아냥거렸지만, 오델리는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자신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무엇 때문에 수도사처럼 칙칙하게 옷을 입고 외모를 죽이겠는가. 그것은 세브랑의 손실이라 오델리는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여간 오델리는 여인들의 인생에서 결혼이 중요하다며 주변인들이 얼마나 성가시게 구는지 알았다. 그것은 세뇌에 가까웠다. 다들 결혼을 하라 등을 떠밀며 자식을 키우는 즐거움과 남편에게 의지하는 행복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곤 했다.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여인을 장애라도 있는 것처럼 대했다. 그런 식으로 여자들에게 결혼에 대한 로망을 심어주어 가문의 결혼 장사를 수월히 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그 산증인이 오델리 본인이었다. 그녀는 혼자서 보내는 일상이 너무나 만족스러웠고, 행복했다.

만약 오델리 왕녀가 셀린느를 무시했더라면…. 1왕자비나 왕비가 그녀를 데려간 것은 그나마 긍정적인 결과였을 테고, 그녀들마저 셀린느를 거부했더라면 볼네 자작을 따라 자작령으로 돌아갔을 터였다.

1왕자비나 왕비의 밑에서 예법을 배우고 남편이 될 사내를 물색하는 것도 아주 불행한 선택지는 아닐 터였다. 행복의 여부를 상대적으로 따진다면,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런 선택지를 택하곤 하니까.

볼네 자작을 따라갔을 때의 결과는 생각해 봐야 뻔한 일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셀린느의 값이 떨어졌다 여기고, 그나마 그녀를 값비싸게 팔아먹을 궁리를 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오델리의 밑에서는 조금이나마 다른 미래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뒤에 셀린느가 무슨 선택을 하든, 오델리는 충분히 존중해 줄 생각이 있었다. 오델리는 그저 셀린느에게 기회를 하나 더 줄 뿐이었고, 셀린느는 이제 그녀의 시녀가 되었으니 충분히 미래를 봐줄 생각이었다.

셀린느는 자신이 얻게 된 것이 얼마나 값진 기회인지 당장은 모를 것이다. 하지만 알게 된다면, 비앙카에게 고마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델리가 움직일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어 준 것은 분명히 비앙카였으니까.

“셀린느는 너무 걱정 마요. 멍청한 아이는 아니니, 금방 현실을 깨달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에게 엄청난 빚을 졌다는 걸 알게 되겠죠. 솔직히 입을 함부로 놀린 대가치고는 너무 후하니까요.”

비앙카는 쓰게 웃었다. 별로 기대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비앙카는 낮게 고개를 내저으며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미워할 사람이 하나 정도 있는 것이 긍정적일 때도 있지요.”

“백작 부인께선 마음이 참 넓으시군요.”

“마음이 넓어서라기보다는, 저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하기 때문이랍니다.”

“어머, 그건 저도 마찬가지인데. 저희 통하는 게 많은 것 같네요.”

비앙카와 오델리는 서로를 바라보고는, 이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웃음을 터트렸다. 셀린느에 관한 일에 대한 화두는 이쯤이면 되었다. 비앙카는 자연스레 목적한 대화를 향해 물꼬를 돌렸다.

“그래도 저 때문에 왕녀님께서 셀린느를 거두지 않으셨습니까. 애초에 시녀를 들일 생각이 없으셨을 텐데…. 갑자기 교육을 맡게 된 것이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지 저도 잘 압니다. 저도 염치를 아는 이인 만큼, 그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선물이요? 뭘 그런 걸. 괜찮은데.”

오델리 왕녀는 우아하게 손사래를 쳤지만, 비앙카는 살짝 웃으며 이본느를 향해 손짓했다. 한 발짝 물러서 있던 이본느가 지금껏 갖고 있던 쟁반을 오델리의 앞에 내밀었다. 쟁반 위에 올려 있는 작은 상자를 여니, 하얀 레이스 손수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델리 왕녀의 눈이 크게 떠지며 파란 눈동자가 유난히 생기 있게 빛났다.

“어머, 이것은….”

“한낱 손수건일 뿐이라 왕녀님께 진상하기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만…. 제가 제일 고심해서 짠 손수건이랍니다. 보잘것없는 솜씨를 드러내어 죄송합니다. 왕녀님께서 자비롭게 받아주세요.”

“무슨 소리예요. 지금 수도에서는 이 손수건이 금사로 짠 직물보다도 비싸답니다.”

“그리 반겨주시니 제가 영광이네요.”

반색을 하는 오델리의 모습에 비앙카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갔다. 오델리가 레이스에 별 관심이 없을까 봐 내심 걱정했던 찰나였다.

비록 비앙카는 영지로 일찍 돌아가게 되었지만, 연회에 참석하고 그 소란을 떤 것이 전부 레이스를 소개하기 위한 속셈이 있었던 만큼 마무리까지 완벽히 해야 했다. 그녀의 행동이 수익 창출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의미 없이 일만 벌려 둔 것이 되지 않겠는가.

비앙카가 레이스를 짰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는 만큼, 관심 있는 이들은 아르노 영지로 서신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한때 아름답다 생각했던 것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한풀 수그러지는 법이다. 손수건과 같이, 자주 쓰지만 첫인상을 결정짓지 않는 사소한 물품은 특히나 더…. 옆에서 좀 더 장작을 넣어 갖고 싶은 욕망을 부추길 필요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 비앙카는 오델리 왕녀에게 레이스를 선물했다.

오델리 왕녀가 이 레이스를 마음에 들어 하고, 자주 사용해 주면 사용해 줄수록 더욱 좋다. 아르노 영지로 돌아간 비앙카 대신 오델리 왕녀가 레이스의 홍보 역할을 톡톡히 해줄 테니까.

오델리 왕녀의 드레스, 보석, 장신구 하나하나가 세브랑 귀족들의 흠모의 대상이었다. 오델리 왕녀가 쓰는 손수건이라 하면 너나 나나 다 갖고 싶어 안달 낼 테니, 세브랑 귀족들은 레이스를 찾아 헤맬 것이다. 연회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도!

비앙카가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 찰나, 감탄과 함께 레이스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던 오델리 왕녀가 주저하며 비앙카의 눈치를 보았다. 오만하기로 유명한 그녀가 눈치를 보다니! 비앙카는 내심 놀랐지만, 그런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한참을 갈등하듯 입술을 달싹이던 오델리 왕녀가 물었다.

“혹시 여분의 것도 있나요?”

아…. 비앙카는 안타까이 신음했다. 당장 여유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라호즈로 올 때 레이스 물품을 많이 가져오지 않았다. 그녀가 수도에서 하려는 것은 손수건을 홍보하는 것이었지 판매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손수건은 귀족들에게 있어 소모품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렇다 하여 사라지는 종류는 아니었다. 그러니 많이 푸는 것보다는 조금, 소수의 인간에게만 풀 생각이었다. 그것이 다른 이들을 더 안달 나게 할 테니까.

비앙카는 혹시나 오델리가 불쾌해할까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답했다.

“안타깝게도 제가 손이 느려서…. 그리 많이 만들 수 없다 보니 왕가의 여인분들의 몫까지 만드는 것이 한계였답니다. 게다가 왕녀님께 진상 드린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보니…. 만약 왕녀님께서 하나 더 원하시면 노력해 보도록 할게요.”

“아니에요. 그럼 됐어요. 안 그래도 1왕자비와 왕비 저하에게 드리려고 했던 거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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