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달라진 마음(2)
“이제는 종종 서신 드릴게요.”
“그래….”
귀스타브는 수긍했지만 못내 미련이 남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인 만큼, 그는 속내를 추슬렀다.
“내 아르노 백작의 앞에서 추태를 부렸군.”
“아닙니다. 언제든지 찾아오십시오. 크게 환대하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하지만 자네는 전쟁으로 바쁘니, 주인이 없는 영지에 내 어찌 자주 가겠는가. 그렇다 하여 영지를 지켜야 하는 백작 부인을 오라 청할 수도 없으니, 내 투정 한번 부려 보았네.”
귀스타브는 껄껄 웃었다. 비앙카는 지금껏 귀스타브가 아르노 영지에 발걸음 하지 않은 것이 그 때문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물론 그렇다 하여 서신 한 통 제대로 보내지 않은 것까지 이해가 가는 건 아니었지만, 하나하나 다 따지면 결국 기분만 상할 뿐이었다. 옛 기억을 들쑤시려 아버지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으니까.
비앙카는 목을 가다듬고, 허리를 똑바로 세운 채 아버지를 곧게 응시했다. 중요한 말을 하려는 것 같은 비앙카의 모습에 귀스타브 또한 자세를 바로 하고 경청했다. 그녀가 하려는 말은 민감한 사항인 만큼, 비앙카는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남편에게 듣자 하니 아라곤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고 해요. 한동안은 잠잠했지만…. 그건 세브랑을 침략하는 걸 포기한 게 아니라, 그저 때를 노리고 있는 것이라고요.”
비앙카의 옆에 앉아 있던 자카리가 비앙카의 말에 맞장구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용기를 얻은 비앙카는 술술 말을 이었다.
“그때가 되면 블랑쉐포르가에서도 참전하라는 압박이 내려올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오라버니가 군을 이끌고 출전해야겠지요. 저도 오라버니가 훌륭한 기사라는 걸 알아요. 토너먼트에서 좋은 결과를 이끌기도 했고…. 하지만 오라버니는 아르노가의 후계자예요.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정말로 위험한 순간이 아니고선 오라버니를 출전시키지 말아주세요.”
비앙카의 말은 거침없었다. 아르노 영지로 일찍 귀환하는 게 정해지자마자, 비앙카는 자카리에게 주변 국가의 정세에 대해 물었다. 뜬금없고 갑작스러운 질문에 자카리는 좀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순순히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알게 된 지식을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의 사실과 적당히 섞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 물밑 작업을 시작했다. 그 계획의 일보가 바로 오늘, 조아생의 출정을 막는 것이었다.
“비앙카, 그건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다.”
갑작스레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화두에 오르자 당황한 조아생이 비앙카를 만류했다. 당황스러운 것은 귀스타브 또한 마찬가지였다. 끙, 낮게 혀를 찬 귀스타브가 비앙카를 타이르듯 말했다.
“우리는 세브랑의 귀족 아니냐. 나라가 위험에 처했는데, 영지의 안위를 위해 출전하지 아니하는 것은 귀족으로서의 명예와 의무에 어긋나는 일이란다. 너도 잘 알지 않니.”
“아버지.”
비앙카는 정색했다. 안 그래도 표정이 드문 편인 비앙카가 하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빤히 바라보자, 조아생과 귀스타브 모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비앙카의 눈썹 끝이 아래로 기울어지며, 처연한 기색을 풍겼다.
“이미 제 남편이 사지를 전전하고 있어요. 항상 죽음의 곁에서….”
반은 연기였지만, 남은 반은 진심이었다. 모든 이들이 자카리를 무패의 신이니 뭐니 추앙하지만, 비앙카는 그걸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그의 실력을 의심한다기보다, 그가 결국 전장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카리의 죽음 또한 불안할진대, 오라버니의 죽음이 아니 그럴 리 없다. 과거처럼 허무하게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떠나보내지 않기 위해, 비앙카는 필사적으로 그들을 설득하려 했다.
“남편에 이어 오라버니까지 전쟁에 나간다면, 전 불안해서 살 수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이이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저에겐 아버지랑 오라버니밖에 없어요. 아시죠…?”
비앙카의 몸이 작게 떨렸고, 연녹빛 눈동자에 물기가 치밀었다. 귀스타브는 저도 모르게 비앙카의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을 덥석 잡았다. 하지만 끝내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다. 갈팡질팡하는 그의 마음속 고민이 여실히 드러났다. 비앙카의 말을 들어주고는 싶지만, 사위가 위험한 전쟁터를 전전하는 데 제 아들은 고이 저택에 두겠다 말할 염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조용히 듣고 있던 자카리가 비앙카를 거들었다.
“그리하십시오, 블랑쉐포르 백작.”
“아르노 백작.”
귀스타브는 깜짝 놀랐다. 솔직히 비앙카가 기사의 명예와 귀족으로서의 의무에 대해 몰라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일 뿐, 내심 자카리는 그런 비앙카의 주장을 불쾌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열여섯 때부터 전장을 전전해 온 당사자가 아니던가. 그리고 그 결과로 블랑쉐포르가와 연이 닿기도 했고…. 비앙카의 말은 자칫, 자카리를 블랑쉐포르가의 투견으로서 내보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착각할 여지를 내어주었다. 그래서 더더욱 비앙카의 말을 들어주지 못해 고개를 내저었던 것도 있었다.
그런데 자카리가 비앙카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니 귀스타브로서는 아리송할 뿐이었다.
사실, 조아생의 출전에 관해서는 이미 비앙카와 자카리 사이에서 이야기가 끝난 일이었다. 비앙카 또한 귀스타브가 우려하는 것처럼 자카리가 착각하면 어쩌나 싶어 한참을 주저주저한 끝에 운을 떼었지만, 자카리는 생각보다 흔쾌히 그녀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좋은 생각이라며 진지하게 수긍했다. 자카리 또한 자신이 전쟁에 나가 있는 상황에서 비앙카가 홀로 남아 있는 것이 불안했던 찰나였다. 지금까지는 아르노가에 남아 있는 사병만으로도 그녀를 지키기엔 충분했다지만, 이제는 자코브라는 변수가 생겼다 보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아르노가 말고도 비앙카를 지켜줄 사람들이 필요했고, 그녀의 친정인 블랑쉐포르가야말로 그에 딱 맞는 이들이었다.
자카리가 당부하듯 덧붙였다.
“그래야 제가 마음 놓고 전쟁에 나설 수 있습니다.”
“…아르노 백작께서도 그리 생각하시다니, 그러면 최대한 출전하지 않은 채 기다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카리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조아생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혈기가 치솟는 젊은 나이인 만큼, 조아생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전장에 나가 전공을 세우고 싶은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자카리처럼 자신의 한 몸으로서 능력을 입증하고 싶은 치기!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욕심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어깨에 누이의 목숨까지 달렸다 생각하니, 섣불리 전공을 세우겠다 목소리를 높일 수가 없었다.
“내 아르노 백작을 믿겠네.”
귀스타브가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비앙카가 주변 국가의 정세까지 파악해서 가족을 걱정했다니, 아비 된 입장에서 감동적인 일이었다. 드레스를 맞추거나 시를 읽는 정도의 일밖에 관심이 없는 철부지일 줄 알았는데…. 연회장에서의 일도 그렇고, 어린 나이에 부모의 품을 떠나 훌륭하게 자란 것이 너무나 뿌듯했다.
“비앙카, 네가 이렇게까지 주변 정세를 읽고 생각할 줄 알게 되었다니…. 백작 부인으로서 훌륭히 자란 것 같아 이 아비는 너무 기쁘구나.”
딱히 그렇지만도 않았기에 비앙카는 어색하게 웃었다. 귀스타브는 비앙카가 뱅상에게 미뤄 둔 백작 부인으로서의 의무에 대해 알았다면 방금 전의 말을 취소했을 것이다. 다행히 지금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자카리밖에 없었고, 그는 아내의 명예를 위해 입을 다물 줄 아는 좋은 남자였다.
다행히도 비앙카의 생각대로 일이 흘러갔다. 자카리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으리라. 블랑쉐포르가와의 만남이 끝난 뒤 그들은 회랑을 거닐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 비앙카는 슬쩍 고마움을 담아 말했다.
“제 투정을 들어줘서 고마워요.”
“투정이라니.”
자카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진심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비앙카를 곧게 응시했다. 검은 눈동자가 비앙카를 향하자, 비앙카는 이전과 다른 의미로 뻣뻣이 몸을 굳혔다. 당장에라도 그가 비앙카를 끌어안고 입술을 맞출 것만 같은 긴장감. 순간 스며든 바람결이 자카리의 숨결처럼 그녀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자카리는 비앙카를 위로하듯, 부드럽게 덧붙였다.
“블랑쉐포르 백작에게 한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소. 그대가 안전해야, 내가 안심하고 전쟁에 나설 수 있소. 알겠소?”
“…고마워요.”
단호한 자카리의 말은 비앙카의 위로가 되어주었다. 비앙카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자카리, 당신도 전쟁에 나가지 말아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나라의 영웅인 그가 전쟁에 불참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조아생과는 경우가 달랐다. 블랑쉐포르의 작위는 옛날부터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유서 깊은 것이었으나, 자카리에게 아르노의 작위를 내려 준 것은 현왕이기 때문에, 그 사이의 군신 계약은 무엇보다도 강인했다. 만약 자카리가 왕의 명을 거스르고 전쟁에 나서지 않는다면, 그것은 귀족의 지위를 반납하여야 할 정도로 큰 죄였다.
그렇게 되어 좋을 것이 없었다. 일신의 평안함이 무너져 내리기 때문은 아니었다. 영웅의 작위를 내려놓은 그들에게 자코브가 어떻게 나설지 모르는 것. 그게 제일 위협적이었다.
비앙카는 자카리의 뺨으로 손을 뻗었다. 손에 닿는 그의 피부는 비앙카의 피부와 달리 단단하고 딱딱했다. 칼로 찔러도 들어갈 것 같지 않은 강인함. 하지만 실상은….
“당신도, 전쟁에서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비앙카는 애써 웃었다. 절대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비밀을 속으로 꼭꼭 숨긴 채, 미처 토해내지 못한 진심을 가린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