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잘 짖는 개(8) / 달라진 마음(1)
하지만 비앙카는 별다른 트집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뒤 몸단장을 서두를 뿐이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녀는 호불호가 확실했고, 자기 취향이 뚜렷했다. 그녀가 시키는 대로 일을 하기만 하면 돼서, 하녀처럼 일에 서투른 사람도 모시기가 편했다. 내심 걱정했던 것과 달리 비앙카를 모시는 일이 수월하자, 하녀는 역시 이본느의 말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마님은 속내를 표현하는 것이 서투르실 뿐이야. 정도를 넘어 무례하게 굴지만 않으면, 상냥하게 대해주신단다.’
그러고 보니 비앙카에게서 레이스 짜는 법을 배웠던 하녀들도 그녀의 관대함을 칭찬하지 않았던가. 비앙카의 레이스는 수도에서 선풍적인 인기였다. 그런 기술을 흔쾌히 알려주다니. 혹시 자신도 비앙카의 눈에 들면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생각한 어린 하녀는 성심껏 비앙카의 몸치장을 도왔다.
몸치장을 끝낸 비앙카는 늦은 아침 식사도 물린 채 바로 이본느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비앙카가 방을 나서기가 무섭게 그녀의 방문 앞을 지키고 있던 소뵈르가 냉큼 따라붙었다.
“어디 가세요?”
“이본느에게.”
이본느는 시녀인지라 비앙카의 숙소에 가까운 작은 방을 배정받았다. 비앙카는 그녀의 방에 도착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본느의 방은 비앙카의 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소박했지만, 종자의 신분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대우였다.
이본느의 머리맡에는 가스파르가 있었다. 비앙카의 호위로 소뵈르가 있을 때부터 짐작한 바였다. 비앙카가 들어서자 가스파르는 자리를 비스듬히 비켰다.
침대에 누워 있던 이본느가 비앙카를 보고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비앙카가 재빨리 그런 그녀의 행동을 막으며 다가섰다.
“누워 있어.”
이본느는 비앙카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본느의 뺨은 퍼렇다 못해 보라색으로 죽어 있었다. 뺨이 아픈지 한쪽 입꼬리만 씰룩이는 이본느의 모습에 비앙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앙카는 이본느의 침대 머리맡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애꿎은 입술만 잘근 씹었다.
“미안, 이본느. 내가 고집을 부려서….”
비앙카는 의기소침해진 채 중얼거렸다. 비앙카가 이본느에게 사과하자, 한 발짝 뒤에 물러서 있던 소뵈르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가스파르 또한 놀라서 비앙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비앙카가 사과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정작 사과를 듣는 당사자인 이본느는 자연스레 고개를 내저었다.
“마님 잘못이 아니에요. 못된 놈팡이들의 잘못이죠.”
이본느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지만, 말투는 씩씩했다. 왕자인 자코브와 음유시인인 페르낭을 묶어 놈팡이라 칭함에 한 점 거리낌이 없었다.
“적어도 한 놈은 죗값을 받아 다행이에요. 2왕자님이 그런 무뢰한일 줄은 전혀 몰랐어요. 마님은 괜찮으세요? 다행히 백작님이 와 주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가스파르가 어제의 일에 대해 이야기해 준 모양이었다. 비앙카는 어제의 일을 어떻게 포장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 난 멀쩡해. 별일 없었어. 다만 네가 맞은 일에 대해서는 꼭 따지고 싶었는데…. 어제 경황이 경황이었던지라 차마 이야기를 못 꺼냈어.”
팔이 아직도 욱신욱신했지만 비앙카는 이본느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다쳤다는 사실을 숨겼다. 하지만 답지 않은 거짓말은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평소 그녀의 가까이에 있던 이본느의 눈에는 비앙카의 거짓말이 훤히 보였다. 이본느는 쓰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괜찮아요. 마님을 구하기 위해서였는걸요. 저 때문에 괜히 얽히지나 마세요. 어제 보니 정말이지…. 아셨죠, 마님? 2왕자님 곁에는 가지도 마셔야 해요.”
“걱정 말렴. 애초에 얽힐 일도 없었어. 어제는 운이 없었던 거야.”
이본느의 신신당부하는 말에 비앙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자코브와 반경이 겹치는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셈이었다.
“이래서야 마님께서 좋아하시는 산책도 못 가겠어요. 어제 레이스를 선보이신 일로 사람들이 찾아보러 기웃거리느라 숙소는 시끄러울 텐데….”
“이제는 꼭 호위를 데리고 다니면 되니 괜찮을 거야. 내가 경솔하게 행동했다가…. 다시는 그렇게 멋대로 나가지 않겠어. 그러고 보니 가스파르 경도 어제 백작님에게 많이 혼났겠군. 미안하네.”
“아닙니다.”
가스파르는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비앙카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순진한 것은 아니었다. 비앙카는 쓰게 웃었다. 가스파르는 절대 아니라 할 테니 그에 대해 더 왈가왈부해 봤자 답이 없는 문제였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겠지. 비앙카는 크게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게 하겠네.”
비앙카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어떻게 보면 이번 수도행은 그녀가 ‘아르노 백작 부인으로서’ 처음 영지 밖으로 나선 것이었다. 그런데 첫 여행이 이 모양 이 꼴이어서야. 두 번 다시 수도에 올 자신이 없었다. 실상 따지고 보면 수도에 와서 얻은 게 더 많았지만, 그 이상 가는 정신적 피로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비앙카는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이본느의 손등을 토닥이며 덧붙였다.
“하여간 빨리 나아. 호위가 있어도 네가 없으면 산책할 의욕이 들지 않으니까 말이야.”
“냉큼 일어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마님.”
이본느는 아까보다 좀 더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여전히 한쪽 입꼬리는 그대로인 채였다. 그 모습이 가슴 아팠던 비앙카는, 차마 이본느와 끝까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자신의 섣부른 행동이 미친 결과를 다시 한 번 곱씹었다.
어제 자카리가 자코브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약한 개가 더 잘 짖는다는 건 좀 진부한 표현이기는 합니다만, 가끔은 진부한 표현이 핵심을 꿰뚫을 때가 있지요. 전쟁에선 잘 짖는 개가 먼저 죽곤 한답니다. 저하께서는, 좀 덜 짖으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자카리는 자코브를 지목하여 했던 말일 테지만, 비앙카는 자신이 바로 그 잘 짖는 개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능력 없이, 소리만 높이는…. 그녀의 뒤에 선 자카리가 없다면, 그녀는 무력하게 휘둘렸을 것이다.
지금껏 비앙카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향유하면서만 살아왔다. 그녀의 손으로 직접 쟁취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나마 레이스 사업을 시작했지만, 그것도 회귀 후에 비자금이라도 만들어 볼까 싶어 시작한 것들이었지, 딱히 대의를 위한 일은 아니었다.
귀족 마님으로서 해야 할 의무를 등한시한 것은 수도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사교활동은 일절 하지도 않은 채 유유자적하게 시간만 보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자카리의 이름과 뱅상의 뒷받침 덕에 영지가 굴러가니 괜찮았지만….
이제 몇 년 후, 큰 전쟁이 있을 것이다. 지금껏 소소히 벌어지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전쟁이. 지금껏 수도에서 움직이지 않았던 고티에 왕자도 결국 전쟁에 출전하게 되었고, 그 전쟁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그리고 자코브가 왕위에 오르게 되겠지….
그 전쟁에서 비앙카의 방패가 되어줄 모든 이들이 죽는다. 오라버니, 아버지, 그리고 결국 자카리까지…. 그것을 막아야 한다.
그녀는 약한 개였고, 그만큼 제 주제를 알았다. 비앙카 그녀에게 별다른 능력이 없다면, 그녀를 보호해 줄 방패만이라도 단단히 잡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녀의 방패가 되어 줄 이들을 지켜야만 했다.
다행히도 비앙카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는 별 볼 일 없다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그로서 자코브의 계획을 일그러트릴 것이다. 비앙카의 연녹빛 눈동자가 결의에 차 단호하게 빛났다.
* * *
다행히도, 비앙카는 더 이상 수도에서 자코브와 마주칠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날 저녁, 자카리가 최대한 빨리 영지로 돌아가는 것은 어떠하겠느냐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비앙카는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본래라면 포도 수확의 끝물까지는 수도에 머무를 생각이었지만, 포도 수확 초기에 라호즈를 떠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왕이 붙잡을 테지만, 그쯤이면 토너먼트를 비롯하여 왕세손의 약혼식 등, 어지간히 굵직한 행사는 다 끝난 뒤니 강제할 명분이 없었다. 비앙카의 건강을 핑계로 대기로 하였는데, 사실이나 다름없어 딱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그만큼 비앙카는 지쳐 있었다.
그들이 일찍 떠난다는 사실을 블랑쉐포르 백작에게 전하자, 그는 무척 안타까워했다. 아르노 영지와 블랑쉐포르 영지는 그렇게 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하여 자주 오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귀스타브의 안타까워하는 모습에 비앙카의 속이 복잡했다. 이렇게 헤어지는 걸 안타까워할 거라면 진즉 연락을 하지. 지금껏 감감무소식이었다가…. 하지만 거절당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만큼, 차마 아버지를 탓할 수 없었던 비앙카는 대신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를 다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