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잘 짖는 개(7)
기실 전생의 연인이자 원수였다고는 하나, 페르낭의 죽음에 대한 충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자코브가 죽이지 않았더라면 결국 그녀가 죽였을 테니까. 애초에 비앙카는 결과만 잘되면 된다는 주의라, 직접 하는 복수 따위에 그리 큰 가치를 두지 않기도 했다.
자코브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아주 치워버릴 수만 있다면, 굳이 비앙카 그녀가 직접 손을 쓸 필요가 없었다. 다만 문제는, 그는 선뜻 아무도 손댈 수 없는 고귀한 신분이라는 것이었다.
“왕자만 아니었다면….”
비앙카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무리 왕이 고티에 왕자를 좋아한다고는 하나 자코브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자코브는 충분히 왕의 면을 세워주는 아들이었고, 왕은 그만큼의 관심과 보답을 주었다.
자코브 왕자의 정적인 고티에 왕자 또한 왕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정적임에도 자코브를 대할 때 방만하다는 점에서 더 끔찍했다.
그는 자신에게 왕위가 주어질 거라는 걸 지나치게 확신했다. 그랬던 만큼 야망을 드릉드릉 숨기고 있는 동생을 항시 못마땅해했지만, 그렇다 하여 자코브를 확실히 밟아 두지도 않았다. 관대한 형인 척하며 호인 행세를 한 덕에, 결국 그는 왕관을 머리에 써 보지도 못한 채 동생의 손에 죽게 되었다.
자코브를 강제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저 모양이니, 오늘의 일을 공론화하여도 별다른 일은 없을 것이다. 자코브가 정말로 비앙카를 겁탈한 것도 아니고, 그저 실랑이라 칭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자카리가 충신이요, 영웅이라고는 하나 고작 이런 일로, 왕가에서 자코브를 벌할 리 없다는 걸 비앙카는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비앙카에게 행실의 문란함을 추궁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왜 그 시간에 시녀와 단둘이 으슥한 정원에 갔냐느니, 페르낭과는 무슨 사이였냐느니 등등. 이런 일은 항상 여자에게 불리하게 흘러가는 법이었다. 궁중 연애니, 레이디를 숭배하느니 해도 결국 본질은 같았다. 성욕 어린 육체의 황홀함이든, 자아도취적인 정신의 고양감이든, 달콤한 말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까지가 사내들의 관심사였다.
그녀가 바라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면, 애초에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 쪽이 현명하다. 괜히 남들 입에 오르내리며 명예만 깎일 뿐이요, 아버지와 오라버니 또한 걱정할 게 뻔했다.
그렇다 하여 비앙카가 오늘의 일을 잊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비앙카는 곁에서 그녀의 안색을 살피는 자카리를 홱 돌아보며 그의 팔을 붙들었다. 비앙카의 행동은 갑작스러웠고, 그에 미처 감정을 전부 숨기지 못한 자카리의 얼굴에 흔적이 남았다.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사라진 감정의 편린. 그것은 비앙카가 지금 느끼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종류의 것이었다.
비앙카는 자카리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전쟁에서 만나면, 죽여 버려요.”
“…….”
“적군의 암살로 가장해도 좋으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쉬어 있었지만,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분명한 의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원한으로 일렁이는 연녹빛 눈동자는 필사적이기까지 했다.
자카리는 아마 비앙카가 자코브에게 험한 일을 당한 분노 때문에 이런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앙카가 자코브를 죽이려 하는 이유에 비한다면, 그녀의 분노는 비견되지도 않을 정도로 작디작은, 사소한 것이었다.
좀 더 미래를 위해서. 아니, 그녀의 인생을 위해서. 과거였고, 미래였을 일. 자카리의 죽음을 완전히 그녀에게서 결별시키기 위해서.
비앙카는 자신이 회귀한 것이 자카리를 살리기 위해서라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자코브와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처음 자코브와 만났을 때, 비앙카는 혹여 자코브가 자카리를 암살한 건 아닐까 하는 의혹을 품었었다. 그 의혹은 이제 확신이 되었다. 자코브는 고티에 왕자가 죽고, 왕위가 거의 넘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자카리는 알베르 왕세손을 왕위로 추대했다.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자코브가 자카리를 죽이기 전에, 자코브를 먼저 죽이는 쪽이 낫다.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 수도에서 처리하라 말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위험했다. 타국의 사신이 와 있는 데 왕자가 암살당했다는 사실은 자칫하다가는 크나큰 국가적 문제로 번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상황을 꾸릴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 자코브가 전장에 나섰을 때 그를 죽이는 것. 그것만이 별 탈 없고, 의심받을 확률이 적으며, 가장 성공적인 길이었다. 다행히도 자코브는 과시적이고 기세등등한 성향이다 보니, 종종 전쟁에 출전하곤 했다. 자카리야 항상 전장에서 살다시피 하는 사내이니, 상황을 조작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카리는 정쟁을 위해 왕족의 암살 시도를 생각할 정도로 약삭빠른 사내는 아니었다. 고티에 왕자와 블랑쉐포르 백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밑에서 음습한 계략을 꾸미는 것은 기사도에 어긋나는, 정정당당하지 못한 행위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랬던 만큼 그들은 순진했고, 그만큼 자코브는 수를 쓰기 좋았을 터였다.
비앙카는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기사 중의 기사였다. 그런 만큼 비앙카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도, 명예를 모르는 아녀자의 치기라 여겨질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비앙카는 꼭 자카리를 설득할 셈이었다. 자코브가 아라곤의 밀정과 몰래 만나는 것을 발견했다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치부될 것이 뻔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자카리는 비앙카의 복잡한 생각과 달리, 너무나도 빠르고 순순하게 대답했다.
“…내 그리 하리다.”
자카리의 즉답에 당황한 비앙카가 얼떨떨해하는 사이, 자카리는 비앙카를 끌어당겨 침대에 뉘였다. 비앙카의 다리 사이에 매끄러운 이불이 감겼다. 자카리는 비앙카와 마주 보고 누우며, 비앙카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감미롭게 비앙카의 귀로 스며들었다.
“오늘은 피곤할 테니, 일찍 주무시오.”
자카리의 태도가 너무나 천연덕스럽고 당연하여, 오히려 비앙카가 알쏭달쏭해졌다. 정말로 자카리가 비앙카의 말을 진심으로 알아들은 건지, 아니면 그녀가 패닉에 빠져 하는 헛소리로 치부하고 그녀를 달래기 위한 다독임일 뿐인지.
하지만 누워 있기 때문일까, 아니, 그녀의 등을 다독이는 손길이 부드럽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비앙카의 머리가 멍해지며 피로와 뒤섞인 잠이 몰려왔다.
“꼭…. 꼭이에요.”
비앙카는 잠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고동색 속눈썹이 슬며시 내려앉더니, 이내 연녹빛 눈동자가 자취를 감추었다. 슬쩍 벌어진 발그레한 입술 사이로 고른 숨소리만 색색 흘러나왔다.
자카리는 잠에 곯아떨어진 비앙카를 내려다보았다. 피로하고 해쓱한 안색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자카리의 손가락이 비앙카의 뺨을 간질이듯 스쳤지만, 비앙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의 피곤함이 느껴졌다. 연회장에서도 계속해서 긴장하고 있었는데, 밖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평소 비앙카의 체력을 생각하면, 지금까지 버틴 것이 용할 정도였다.
창문을 타고 방 안에 흘러들어 온 달빛이 비앙카의 흰 피부를 비췄다. 흰 모피에 감싸인 가는 팔다리에 남아 있는 푸르른 멍 자국이 선명히 도드라졌다.
비앙카를 토닥이는 손가락은 깃털을 쓸어내리듯 부드러웠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자카리의 눈빛은 그늘진 어둠 속에서도 흉포히 빛났다. 자카리는 자고 있는 비앙카에게 속삭이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걱정 마시오. 그대가 바라지 않아도, 내 그리할 터였으니.”
* * *
다음 날, 비앙카는 늦잠을 잤다. 피로가 겹친 데다 깨우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에서 깬 비앙카의 온몸이 욱신거렸다. 습관적으로 이본느를 불렀지만 답이 없었다. 그제야 비앙카는 뒤늦게 어제 일을 떠올렸다.
자코브는 요행이기는 하나 토너먼트 준결승에 오를 정도의 실력이 있는 기사였다. 그에게 팔뚝이 잡힌 것만으로도 비앙카가 퍼렇게 멍이 들 정도였는데, 그런 사내에게 맞은 이본느가 멀쩡할 리 없었을 것이다. 비앙카는 후다닥 몸을 일으키며 머리맡의 종을 울렸다. 비앙카가 얼굴만 알고 있는 하녀 하나가 조심스레 방에 들어섰다. 비앙카보다 한두 살 어린 하녀였다.
“일어나셨어요, 마님.”
“그래. 이본느는 상태가 좀 어떠니?”
이본느가 어디 있는지 묻는 것도 아니고, 이본느의 걱정을 하는 비앙카의 질문이 당황스러웠던 하녀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혹시라도 마님을 모실 일이 있다면 우물쭈물하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하라는 이본느의 충고가 있었다. 하녀는 빠릿빠릿하게 자기가 알고 있는 내용을 고했다.
“백작님께서 배려해주신 덕에 쉬고 있어요. 지금쯤 정신을 차렸을 텐데, 불러올까요?”
“아니, 어디 많이 다치진 않았고?”
“죄송해요. 잘은 모르겠어요.”
“그래.”
하녀는 이본느가 시킨 대로 꼬박꼬박 대답하면서도 불안하게 비앙카의 눈치를 살폈다. 주인이 질문했는데 종복이 모른다는 대답을 하면, 보통 게으르고 멍청하다 구박을 받기가 일쑤였다. 게다가 옛날에 비앙카를 모셔 봤다던 나이 많은 하녀들이 그녀를 두고 까다롭고 예민해서 견딜 수가 없다 투덜거렸던 일도 있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