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15화 (115/192)

#115 잘 짖는 개(6)

‘도대체 왜 비앙카는 날 꺼려 하는 거지? 나는 정말 그녀에게 잘해줄 자신이 있는데…. 아르노 백작이 줄 수 있는 것보다도 더 귀한 것들로 그녀를 치장해 주고, 사랑을 속삭여 줄 수 있다고. 항상 전쟁에 나가 있느라 자리를 비우는 남편 따위가 뭐가 그리 좋지? 다른 귀족 여인들은 다들 하나씩 애인을 끼고 있는데….’

다른 귀족 여인들의 그저 그런 애인들에 비하면 자코브 그는 신분도, 매너도, 외모도 무엇 하나 빠지는 바가 없었다. 왜 비앙카가 그를 받아주지 않는지, 자코브는 진심으로 분해했다.

누구보다 아껴준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자코브의 생각은 뒤틀려 있었다. 자코브에게 있어 비앙카가 이미 결혼한 여자며, 그 외의 사내에게 관심을 주는 것은 부정한 일이라는 자각은 없었다. 심지어 그가 오늘 비앙카에게 한 짓은 겁간이나 다름없다는 생각도 없었다. 자코브는 자카리의 품에 끌어안겨 정원을 빠져나가는 비앙카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이를 갈았다.

‘그래. 어차피 단기간에 될 일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잖아. 지금 당장 그녀가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해서 조급해할 필요는 없어. 천천히, 주의 깊게….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하는 거야. 자카리를 죽이고, 그녀의 배경을 허물어서, 그녀가 제 발로 내 품에 안기도록….’

자코브는 원하는 것은 꼭 얻어야 직성이 풀리는 집요한 사내였다. 상처받은 자존심으로 번들거리는 푸른 눈동자가, 모두가 사라지고 난 어둠 속에서 고요히 빛났다.

* * *

소베르와 로베르가 상황을 정리하는 동안, 자카리는 비앙카를 품에 끌어안은 채 성큼성큼 걸었다. 그는 조급했고,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공기에 불쾌하게 섞여 있는, 녹음 아래서도 숨겨지지 않은 채 비집고 드러나는 혈향이 자카리의 숨을 턱 하니 막히게 했다.

갓 죽은 시체, 타버린 시체, 오래되어 구더기가 끓을 정도로 썩은 시체 냄새 등 역한 냄새란 냄새들은, 전장에서 코에 물릴 정도로 맡았던 자카리에게 있어서 페르낭의 피 냄새 따위는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그 공간에 비앙카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비위가 역할 정도로 거슬렸다.

이본느의 비명 소리가 들린 곳까지 달리면서, 자카리의 심장이 무섭도록 뛰었다. 혹시라도 비앙카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녀의 신상이 위험한 건 아닐까…. 바닥이 그를 삼킬 듯이 파도치듯 울렁였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처음 검을 잡고, 제 목숨을 담보로 전쟁에 나섰을 때도 이보다는 덜 긴장했었다. 소중한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 단언컨대 그가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비앙카는 무사했지만, 그녀가 그런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다. 자카리는 이를 악물었다. 먼 미래에 후환이 될지도 모르는 볼네 자작 따위를 견제하느라, 정작 제일 중요한 그녀를 위험에 빠트릴 뻔했다.

그동안 그녀가 얼마나 불안했을까. 비앙카는 태연한 표정으로 자코브를 힐난했지만, 끌어안은 그녀의 몸은 몹시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무서웠을지를 생각하면 그의 심장이 갈래갈래 찢어지는 고통으로 욱신거렸다. 그가 조금만 더 빨리 왔어도 비앙카는 그런 꼴을 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녀를 이런 곳에 조금이라도 오래 두고 싶지 않았던 자카리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너무 서둘렀던 걸까. 그의 속도에 맞추지 못한 비앙카의 다리가 이리저리 엇갈리며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휘청였다. 그런 일을 겪었으니 다리가 풀리는 것도 당연하다. 위험한 모습에 자카리는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서 비앙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도 자카리에게 안기는 것이 부끄럽다며 거부했던 예전과 달리, 비앙카는 순순히 자카리에게 몸을 맡겼다. 페르낭과 자코브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몇 번이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던 만큼, 비앙카의 체력은 이미 닳은 지 오래였다. 지금껏 그녀를 지탱해 온 것은 오기와 자존심, 그리고 분노였다. 당겨진 실처럼 팽팽했던 긴장감이 자코브에게서 벗어나기가 무섭게 일순간 사그라졌다. 타인의 시선 따위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그녀는 축 늘어진 채, 자카리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자카리의 커다란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니, 그녀의 안락한 침대가 있는 숙소까지는 금방이었다. 비앙카를 침대에 살포시 내려 둔 자카리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비앙카의 안색을 살폈다. 파리하게 질린 낯은 얼음장 같았다.

비앙카는 멍한 표정으로, 읊조리듯 속삭였다.

“씻고 싶어요.”

“조금만 기다리시오.”

자카리는 바로 시종과 하녀를 불러 비앙카가 목욕할 준비를 시켰다. 이본느가 자리에 없는 만큼 준비가 더디고 부족한 점이 많았다. 비앙카가 좋아하는 목욕물의 온도는 조금 더 미적지근한 것이었고, 제비꽃 향유보다는 장미를 더 좋아했다. 하지만 비앙카에게는 그런 걸 지적할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몸에 들러붙듯 남아 있는 사내들의 손길을 지우기 위해 비앙카는 몸에 물을 몇 번이나 끼얹었다.

비앙카는 몸에 하얀 모피만을 걸친 채 욕조를 나섰다. 장막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카리가 바로 다가와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손에 쥐면 부서지기라도 할 것처럼, 자카리는 비앙카를 조심스레 옮겼다.

자카리의 손에 이끌려 침대로 향한 비앙카는 침대에 앉아서도 여전히 멍했다. 초점이 묘하게 맞지 않는 눈동자. 모피 아래 드러난, 부드러운 여체에 남아 있는 어제의 흔적은 이런 상황임에도 자카리의 뱃속 깊은 곳을 요동치게 했다.

하지만 자카리를 꿈쩍도 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바로 비앙카의 흰 살결에 스며든 푸르른 멍이었다. 마치 강하게 쥐어짠 것처럼 그녀의 팔을 물들인 멍 자국을 발견한 자카리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비앙카.”

“소름 끼쳐요, 그 남자.”

비앙카는 중얼거렸다. 그녀의 입술이 달싹이며 흘러나온 공허한 목소리에는, 미처 지우지 못한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자코브가 무슨 짓을 했기에, 무엇이 그렇게 그녀를 두렵게 만든 것일까. 자카리의 꽉 다물린 입술 아래 이가 갈렸다.

비앙카는 어깨를 감싸고 있는 모피를 움켜쥐었다. 자카리는 비앙카가 두려워한다고 착각한 것과 달리, 비앙카는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상대에게 휘둘려지는 굴욕은 익숙하지 않았고, 익숙해지고 싶지도 않은 것이었다.

전생에 아르노가에서 쫓겨났을 때의 끔찍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필사적으로 선처를 요구했지만, 그녀의 주장이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한 채, 말은 조각이 되어 흩어지던 무력함…. 결국 비앙카는 무력하게 아르노가에서 내쫓기고 말았고, 그 뒤로 그녀는 어디에서도 존중받고 사랑받지 못한 채, 괴팍한 여자 취급을 받으며 떠돌아다녔다. 모두가 그녀를 배척했다. 그나마 수도원에서 그녀를 받아준 것이 다행이었다.

비앙카는 그것이 전부 신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르노 백작 부인이었을 때는 단 한 번도 그런 취급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뒷배인 남편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들은 그녀를 우습게 보았다….

그래서 열여섯으로 되돌아왔을 때, 비앙카는 지금의 이 신분을 놓지 않을 거라 단단히 다짐했다. 결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런 그녀에게 있어서 자꾸 치근덕거리는 자코브는 달가울 리 없는 존재였다. 생각해 보면 전생에서 그녀에게 아르노가를 빼앗은 것 또한 자코브였다. 그랬던 그가 현생에서도 방해라니….

만약 비앙카가 그녀의 생존만을 생각했더라면 또 달랐을지도 모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코브는 과거에 왕이 되는 사내였으니까. 죽을지도 모르는 자카리에게만 매달리느니, 정치적으로 생각하면 자코브와 괜찮은 관계를 맺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비앙카에겐 꺾이지 않는 자존심이 있었다. 비앙카는 자코브라는 사내의 성정을 알았다. 지금은 그녀에게 집요하게 굴고 있지만, 그건 그저 자카리에 대한 경쟁심과 열등감, 그리고 생각만치 쉽게 손에 들어오지 않는 그녀에 대한 집착일 뿐이다.

비앙카가 쉽사리 자코브의 제안에 응했더라면, 그는 금방 그녀에게 흥미를 잃을 것이다. 이미 자코브에게 약점을 잡힌 비앙카는 그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할 테고, 자코브는 적당한 시기에 비앙카를 내다 버릴 게 분명했다. 온갖 추문까지 얹어서. 이미 그렇게 죽은 여자를 알고 있지 않던가.

비앙카는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았고, 자코브의 비위를 맞추며 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앙카는 자카리를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그러니 그의 구애는 그저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일로 확신했다. 자코브는 거추장스러운 걸 넘어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는 안 되는 자였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초에서 슬금슬금 기어오르던 불쾌감이 온몸을 확 잠식했다. 선명한 적대감. 그를 그녀의 인생에서 아주 치워버려야 할 것 같은 강렬한 느낌.

그것은 실제로 그녀가 복수를 다짐한 위그 자작이나 페르낭 따위를 마주할 때보다도 더욱 거센 것이었다.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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