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잘 짖는 개(5)
바로 자카리의 뒤를 따라 가스파르와 로베르가 정원수를 헤치고 들어왔다. 안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소뵈르는 밖에서 병사들과 시종들을 통제했다. 정원 안에서 벌어진 살인, 그리고 그에 얽힌 2왕자와 영웅의 아내…. 소문이 퍼져서 결코 좋을 것이 없는 조합이었다.
상황을 살피던 가스파르는 정원 한구석에 쓰러진 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이본느를 발견했다. 돌을 깎아 만든 가면처럼 변함없던 가스파르의 얼굴이 절망으로 뒤덮였다. 가스파르는 자카리의 명을 기다리는 것도 잊은 채 이본느에게로 달려갔다.
“으으…. 마님….”
정신을 잃었는지, 이본느는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불분명한 신음을 흘렸다. 이본느가 죽기라도 했을까 마음 졸였던 가스파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녀가 살아 있다 하여 마냥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이렇게 만든 것으로 추측되는 사내들 중 하나는 죽었지만, 하나는 살아 있다. 가스파르는 이본느를 끌어안은 채 자코브를 노려보았다.
비앙카를 끌어안은 채 자카리와 대치하던 자코브는 자카리뿐만 아니라 다른 부장들까지 합세하자 쯧, 낮게 혀를 찼다. 대적해 봤자라고 생각한 걸까. 어깨를 으쓱인 그는 그제야 비앙카를 꽉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비앙카는 그러기가 무섭게 자카리를 향해 달려갔다.
자카리는 바로 비앙카의 어깨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품에 숨기듯 안았다. 자카리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나서야 비앙카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비앙카는 빠끔히 고개를 빼 자코브를 노려보았다.
비앙카와 눈이 마주친 자코브의 눈매가 휘어졌다. 눈물이 서렸던 것이 거짓말처럼, 매끄러운 얼굴은 페르낭을 죽이고 그녀를 희롱하던 당시의 천연덕스러운 모습과 차이가 없었다. 휙휙 바뀌는 표정에서는 도대체 어느 쪽이 진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비앙카를 끌어안은 자카리는 나직이 으르댔다.
“왕자님께서는 무슨 짓인지 변명을 해야 할 겁니다.”
“변명? 아니지. 그대는 나에게 감사해야 해, 아르노 백작.”
비앙카를 강제로 겁박하려던 현장을 들켰음에도 자코브는 천연덕스러웠다. 이곳이 수도요, 영웅인 자카리가 왕족인 그를 시해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일까, 그는 자카리를 빤히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그대의 아내가 한낱 음유시인 따위에게 희롱당하려는 것을 막아주었는데.”
그리 말하며 자코브는 페르낭의 시체를 손가락질했다.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페르낭의 시체를 향해 고개를 돌렸으나, 자카리가 한발 먼저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그녀의 시선 끝에 저런 흉흉한 것을 둘 수 없다는 그의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비앙카는 자코브를 노려보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나, 산 자의 입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것이 당사자라면, 더더욱.
비앙카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이 떨렸지만, 다행히도 목소리까지 떨리지는 않았다.
“그것이 왕자님의 희롱을 정당화해주지는 않아요. 제 시녀에게까지 손찌검하시고.”
“그대가 희롱당했다 느꼈다면 미안하군, 비앙카.”
유들유들하게 비앙카의 이름을 부르며 넌지시 놓는 말투가 불쾌했다. 비앙카의 어깨에 닿아 있는 자카리의 팔뚝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이가 악다물리면서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앙카가 굳이 고개를 들어 자카리를 바라보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가 느껴졌다.
자코브의 태도에 화가 난 건 비앙카 또한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왕자인지라 대놓고 욕설을 내뱉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던 비앙카는 비아냥거리는 것으로 자신의 불쾌함을 드러냈다.
“제게 양해를 구하지 않고 함부로 이름을 부르시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왕자님께서 이렇게 예의를 모르시는 분일 거라고는 처음 알았네요.”
“그러면, 양해를 구한다면 허락해줄 텐가?”
“아니요.”
비앙카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여지조차 없을 정도로 냉정한 대답에 실실 웃으며 능글능글대던 자코브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퍽 통쾌했지만, 고작 이 정도로 비앙카의 마음이 풀리지는 않았다. 그만큼이나 이번 일은 끔찍했다.
손쓸 도리 없는 무력함!
그녀가 아무리 바락바락 소리 지르며 주장해도 신경 쓰지도 않으며 힘으로 눌러버리는 페르낭과 자코브의 행태가 너무나도 소름 끼쳤다. 지금 이렇게 거절한 것이 먹히기라도 하는 것은 그녀의 곁에 자카리가 있기 때문이리라. 아까 전에는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제 할 말만을 했으니까.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 아까의 일을 떠올린 비앙카는 작게 몸서리쳤다. 몸의 떨림은 한참이 지났는데도 가시질 않았다. 자코브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싫었던 비앙카는 자카리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피로함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요, 여보. 피곤해요.”
“…….”
이대로 물러서는 게 탐탁지 않았던 자카리는 비앙카의 손짓에도 꿈쩍도 안 한 채 우뚝 서서 자코브를 노려보았다. 두 남자의 시선이 파지직 부딪혔다. 비앙카를 지키려는 사내와 비앙카를 빼앗으려는 사내.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두 존재의 기세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여보.”
비앙카가 재차 잡아당기자, 자카리는 못 이기듯 비앙카의 손에 끌려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그것이 마치 가진 자의 여유처럼 느껴졌던 자코브의 속이 확 타올랐다. 자코브는 그들의 뒤에서 버럭 외쳤다.
“나는 그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비앙카!”
기이한 집착. 자코브가 그리 말하기가 무섭게 자카리가 우뚝 섰다. 대놓고 아내에게 구애를 하다니, 자카리를 무시해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였다. 그와 동시에 비앙카를 쉬운 여자 취급하는 것이나 다름없기도 했다.
화가 났던 비앙카가 뭐라 쏘아붙이려고 했지만, 머리 위에서 흘러나오는 한기에 몸이 굳었다. 차마 자카리를 올려다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 비앙카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예전과 달리 그의 얼굴에 제법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화가 났을 때만큼은 여전히 무서웠다. 그 분노가 비앙카가 아닌 타인을 향했을지라도.
느릿하게 뒤를 돌아본 자카리의 두 눈이 형형했다. 흔들림 없이 부릅뜬 두 눈동자는 자코브를 꿰뚫을 것만 같았다. 그의 시선에는 힘이 있었다. 강자가 약자를, 맹수가 초식동물을 단숨에 찍어 누르는 힘! 늑대와 마주친 토끼처럼, 자카리의 입술이 서서히 열리는 동안 자코브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자카리의 입이 열리며 쇳소리가 섞인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잔뜩 억누른 목소리는 속삭이듯 조용했지만, 잘못 들었다 착각할 수조차 없게 또렷했고, 묵직했다.
“약한 개가 더 잘 짖는다는 건 좀 진부한 표현이기는 합니다만, 가끔은 진부한 표현이 핵심을 꿰뚫을 때가 있지요.”
약한 개가 누굴 가리키는지는 명백했다. 자코브가 감히 왕족을 모욕하느냐 소리 지르려는 찰나, 자카리의 이어지는 말이 그의 말을 막았다.
“전쟁에선 잘 짖는 개가 먼저 죽곤 한답니다. 저하께서는, 좀 덜 짖으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비아냥거리는 말투에는 적개심이 서려 있다. 자카리는 자코브를 노려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정원을 나섰다. 가스파르 또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본느를 안아 들고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이본느에게 손찌검을 한 것이 자코브라는 사실을 알게 된 가스파르의 눈이 잠깐, 그에게 못 박힌 듯 고정되었다. 밤하늘을 닮은 짙푸른 남색 눈동자에 도사린 낮게 끓는 분노는 순식간에 그 모습을 감추어 존재조차 깨닫기 쉽지 않았다.
“…하!”
자코브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자카리의 말은 왕자에게 하기엔 지나치게 오만불손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버럭 화를 낼 수가 없는 것이, 이쯤 해서 일을 덮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기 때문이었다. 괜히 소란이 커져 이 이야기가 왕의 귀에 들어갔다간 자코브에게도 별로 좋을 게 없었다.
자코브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이성적으로…. 하지만 자코브는 비앙카와 얽힌 뒤로는 계속해서 이성과는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비앙카가 시선에 없으면 항상 그녀의 생각을 했고, 우연이라도 비앙카를 마주하면 알 수 없는 충동이 그를 그녀의 앞으로 내몰았다. 참아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렇게 마주한 비앙카는 그에게 노골적인 적대감과 거부감을 풀풀 풍겼다. 오늘도 그랬다. 자코브라 하여 페르낭 따위처럼 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뜻밖의 상황으로 놀랬을 비앙카를 달래주려 했을 뿐이다…. 하지만 우연히 보게 된 자카리의 흔적으로 그의 초조함에 불이 붙었고, 그를 피하는 그녀의 태도에 자코브의 머리가 아주 돌아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를 경멸하는 비앙카의 시선….
비앙카의 환심을 사려던 일들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토너먼트도 마찬가지였다. 자코브가 그녀에게 건넨 장미는 연회에서의 대화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비앙카는 그가 건넨 장미를 얼마나 거추장스레 여겼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눈에 보였다. 게다가 자카리가 그녀에게 건넨 황금 장미와 비앙카가 자카리에게 건넸던 레이스 손수건…. 그건 자코브의 자존심을 바싹 꺾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