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잘 짖는 개(4)
게다가 비앙카에게 스스럼없이 닿는 자카리의 손길! 평소에는 그리도 무뚝뚝한 목석처럼 굴더니, 그 순간만큼은 엽색가가 따로 없었다. 그 손길이 연회장에 있는 사내들을 향한 견제라는 것을 모두가 눈치챘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자카리는 그곳에 있는 최강의 수컷이었고, 비앙카의 적법한 남편이었는데. 유난하긴 하지만 당연한 행위였던 만큼, 모두가 자카리를 의처증이라 치부해 넘겼다.
오로지 비앙카를 마음에 들어 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던 자코브만이 그리 쉽게 넘길 수가 없었다. 자카리의 꼴을 볼 때마다 심기가 부글부글 끓었다. 그것은 고티에를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부족한 자가 운 좋게 과분한 것을 차지한 것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그런 느낌. 자신이었다면 저자보다 훨씬 잘 해낼 자신이 있는데…. 그것이 후계자의 자리든, 비앙카의 남편의 자리든 말이다.
결국 참지 못한 자코브는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그러던 와중에 볼네 자작을 마주했지만, 그건 시답잖은 일일 뿐이었다. 시끄러운 것이 싫었던 자코브는 한적한 왕궁 정원으로 향했다. 그곳에도 밀회를 갖는 이들이야 있겠지만, 그런 이들은 으레 그들만의 사정에 푹 빠져 있기 마련이었다.
자코브는 그곳에서 비앙카를 잃은 채 당황한 이본느와 마주하게 되었다. 비앙카와 항시 같이 붙어 있는 만큼, 자코브는 그녀가 비앙카의 시녀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바로 건너에서 들려오는 듯한 앙칼진 비앙카의 목소리…. 개 먹이로 주겠다느니 뭐니 하는 비앙카의 목소리에 상황을 파악한 자코브의 입술이 올라갔다.
연회장에 있던 비앙카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다. 자코브는 억지로 비앙카를 제압하려던 사내의 목을 베어 냈다. 음유시인의 목숨 따위나, 장인이 두 달간 정성을 들여 만든 옷이 더러워지는 것 따위는 그에게 있어서 별반 가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에는 오로지 비앙카만이 존재했다. 피투성이가 된 자코브는 그를 향해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구는 비앙카를 향해 다가갔다.
“다시 한 번 반했어.”
“다가오지 마십시오!”
“왜?”
날카로운 비앙카의 외침에 자코브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앙카는 이를 악물었다. 페르낭에게 끌려올 때야 당황해서 그녀가 들어온 방향을 잠시 잊었다지만, 이번에는 이본느와 자코브가 들어온 방향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필, 출구로 추정되는 곳이 바로 자코브가 있는 쪽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자코브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비앙카의 살결에 소름이 돋았다. 본능적인 위험 신호. 굳이 피부로 느껴지지 않더라도, 자코브가 페르낭보다 배는 위험하다는 건 명백했다. 그에게 잡히면 아까처럼 쉽게 빠져나올 수 없으리라….
그때 이본느가 비앙카와 자코브 사이에 끼어들며, 온몸으로 자코브를 막았다.
“마, 마님께 이러지 마세요!”
“시녀 주제에.”
하지만 이본느의 저항은 자코브에게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자코브는 이본느의 뺨을 내려쳤다. 비앙카가 페르낭의 뺨을 올려붙였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커다란 소리가 나며, 가녀린 이본느의 몸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꺄아악!”
“이본느!”
비앙카는 바로 쓰러진 이본느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자코브가 비앙카의 팔을 낚아챘다. 비앙카는 짜증스레 팔을 휘두르며 외쳤다.
“이거 놓으세요!”
“비에 젖은 울새처럼 떠는군.”
비앙카의 저항에도 자코브는 여유로웠다. 그의 손길이 비앙카의 목덜미를 훑었다. 목걸이 아래 숨겨진, 이본느가 화장품으로 덮어 두었던 자카리의 흔적이 드러났다. 자카리와 비앙카는 부부이니 동침하는 것쯤이야 당연한 일이었지만, 흰 살결에 남아 있는 선명한 흔적은 자코브의 속을 뒤틀리게 했다. 자코브의 입술이 못마땅하게 비틀렸다.
“그대의 남편에게 안기는 건 제법 즐거웠나 보군.”
“무슨…!”
무례한 말에 비앙카가 화를 내기 전, 자코브가 비앙카를 제 쪽으로 돌려 잡았다. 이글거리듯 타오르는 자코브의 눈은 회까닥 돌아버린 광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야. 음유시인 따위와 어울리다니, 저런 것은 그대의 격에 맞지 않지. 혈통도, 외모도…. 만약 그대가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다면, 그대에게 어울리는 것은 나야. 아니 그런가?”
자코브의 눈이 휘어지며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독이 있는 꽃이 더 화려하다고, 그의 미소에서 가까이해서는 안 될 위협이 느껴졌다.
비앙카의 낯이 사색으로 퍼렇게 질렸다. 지금까지는 자코브가 그녀에게 치근덕거리는 것을 그저 자카리를 도발시키기 위해서라든가, 정치적인 구도로 이용하려는 꿍꿍이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도 그런 것이, 자코브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자코브의 주변에는 미남, 미녀밖에 없었고, 본인도 화려한 미남이었다. 반면 비앙카는 외모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오델리 왕녀처럼 눈에 띌 정도의 미인은 아니었으며, 성격도 나쁜 데다 살갑지 못했다. 게다가 자코브의 눈엣가시인 자카리의 부인이니, 자코브의 기이한 접근은 오히려 못마땅함에 괴롭히려는 심보가 들어 그런다 하는 쪽이 더 당연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의 자코브의 모습은…. 비앙카는 두려움을 삼키며 그녀를 꿰뚫을 것처럼 타오르는 시선을 피했다.
여전히 비앙카는 자코브가 진심으로 그녀를 좋아해서 이런 행동을 한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이건 사랑이 아닌, 집착과 광기일 뿐이었다.
“부디, 나에게도 그대의 부드러운 살결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길.”
자코브의 입술이 다가왔다. 흰 뺨에 튄 거무죽죽한 핏방울, 그리고 달빛을 받아 창백하게 흐려진 입술이 유령처럼 소름 끼쳤다. 섬뜩해진 비앙카는 도망치려 몸을 비틀었지만, 그의 손아귀 안에 꽉 잡혀 오도 가도 못했다.
그때, 저 멀리서 비앙카를 부르짖는 외침이 들렸다. 자카리의 목소리였다. 점점 다가오는 목소리는 그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비앙카! 비앙카!”
“여기예요!”
자코브가 비앙카의 입을 막기 전, 비앙카는 있는 힘껏 외쳤다. 생애 그렇게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러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비앙카의 배 속이 꼬이듯 아파 왔지만, 비앙카는 혹시라도 자카리가 그녀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할까 싶어 다시 한 번 외쳤다.
“저 여기 있어요!”
그 순간, 자코브의 얼굴이 절망감으로 일그러졌다. 부릅뜬 눈에는 핏발이 섰다. 아까 전의 여유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손바닥 뒤집듯 뒤바뀐 태도에 비앙카의 심장이 덜컹였다.
이본느를 때리듯, 비앙카를 내려칠 것 같은 기세에 비앙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자코브의 손은 비앙카를 꽉 쥐고 있을 뿐, 얼얼한 고통은 없었다. 자코브는 연인에게 배신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처참하게 부르짖었다.
“도대체 왜!”
그건 비앙카가 묻고 싶었다.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러는 거야. 자코브의 행동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향하는 안타까운 시선이 얼마나 가련하고도 절절한지, 저도 모르게 자신이 잘못한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웃긴 일이었다. 그녀가 바로 피해자인데, 그의 알량한 태도 하나에 조금이나마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
누가 보면 그 둘 사이가 절절한 연인 사이라도 되는 줄 알 것이다. 만약 지금 오고 있는 자카리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는 타고난 배우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낮게 속삭이는 그의 눈가엔 희미하게나마 눈물도 맺혀 있었다.
“벗어나려 발버둥 칠 정도로, 내가 그리도 싫어?”
잘 알고 있네. 이런 짓을 하는 자를 누가 좋아해? 그러니 당장 놓으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밀었다. 그 말을 거를 생각이 없었던 비앙카가 그대로 쏘아붙이기 위해 입을 연 순간, 자코브의 등 뒤의 무성한 정원수 사이를 헤치고 자카리가 등장했다. 비앙카를 발견한 자카리의 얼굴에 일순간이나마 선명한 희비가 교차했다.
“비앙카!”
비앙카를 부르는 자카리의 목소리에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길이 아닌 곳에 길을 내서 들어온 듯, 그의 옷 군데군데가 뜯겨 있었고 헝클어진 은빛 머리카락에는 나뭇잎이 붙어 있었다.
“여보!”
비앙카는 자카리를 애타게 부르며 다시 한 번 자코브에게서 빠져나가려 몸을 뒤틀었다. 남편인 자카리가 등장했음에도 자코브는 그녀를 옭아맨 손을 풀지 않았다. 미쳤어. 경악에 찬 비앙카는 입을 떡 벌린 채 자코브를 노려보았다.
자코브와 그녀 사이가 언뜻 보기에 은밀하다 착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녀가 잘못한 일이 없으니 고개 숙일 일도 없다 생각했다. 움츠러들면 괜히 의심스러워 보일 뿐이라고, 그녀는 자신에게 떳떳하듯 당당하면 된다고.
하지만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켠 채 자카리의 눈치를 보았다. 자카리와 제법 오랜 시간 알아 왔지만, 비앙카는 그가 저런 얼굴을 한 걸 처음 보았다. 지금껏 비앙카가 자카리의 무뚝뚝한 얼굴을 보며 화가 났다 착각한 것이 우스울 정도로, 지금의 그는 살의로 가득 차 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자코브를 노려보는 자카리의 검은 눈동자가 흉포했다. 한 점 숨길 생각도 없이 넘실거리는 불편한 심기는 거의 살기에 가까울 정도로 날이 서 있었다. 지금의 자카리에게 있어서 자코브는 왕자도, 무엇도 아닌 그의 아내를 탐내는 걸신들린 무뢰한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