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12화 (112/192)

#112 잘 짖는 개(3)

“…이 목소리는!”

여자의 비명 소리에 네 사람의 몸이 움찔, 긴장하며 사냥감을 발견한 개처럼 고개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치켜 들렸다. 목소리를 알아챈 가스파르의 눈빛이 순간 흉포히 빛났다.

“이본느의 목소리입니다.”

“왕실 정원 쪽에서 들린 게 분명합니다!”

소뵈르가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자카리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무슨 일이기에 이본느가 비명을 지른단 말인가. 비앙카에게 별일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그리 생각하기가 무섭게 자카리의 심장이 끝없는 지옥의 겁화 속으로 추락하듯 철렁였다. 이를 악문 자카리는 성급히 발을 옮기며 명령했다.

“왕실 정원으로 간다!”

* * *

“하, 네까짓 게? 너 따위는 내 잘게 다져 개 먹이로 줄 것이다!”

“개 먹이라니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페르낭이 능글능글 웃으며 비앙카를 향해 다가갔다. 그의 눈에 차오른 더러운 음욕에 비앙카는 몸을 떨었다. 너무나 소름 끼쳤으며, 징그러웠다. 이런 남자가 그리도 좋다고, 블랑쉐포르가까지 쥐여 줄 생각을 했던 과거의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이본느가 그녀가 있는 곳을 눈치채 주면 좋으련만, 보아하니 은밀한 밀회를 위한 숨겨진 장소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아마 이본느는 찾기 힘들 것이다. 차라리 사람을 불러오는 쪽이…. 하지만 그러다가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게 되면…. 비앙카는 피식 웃었다. 이미 소문 따위 때문에 한차례 홍역을 치른 터였다. 그러고 나서도 소문 걱정을 하는 제가 웃겼다.

“웃으실 만큼 여유가 있으신 모양이로군요. 아니면 내심 이런 상황을 바라고 계셨던 걸까요?”

“이런 상황? 개 먹이 따위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황?”

비앙카가 조소했다. 비앙카는 그토록 무서워하던 남편 자카리 앞에서도 뻣뻣이 고개를 치켜들었던 여자였다. 비앙카는 절대 굽히지 않았다. 이런 음흉한 이리 떼 같은 자에게는 약점을 보이면 그대로 휘둘릴 뿐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녀가 이 상황을 두려워한다는 걸 알면 그에 측은지심을 갖기는커녕 제 좋을 대로 이용할 자였다.

비앙카의 도발에 페르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조곤조곤했지만, 이를 드러내는 모습에서 비앙카를 협박하고자 하는 뜻이 읽혀졌다.

“저를 자극해서 좋으실 게 없으실 텐데요.”

“이런.”

페르낭의 협박에 대한 답은 비앙카가 아닌, 페르낭의 뒤쪽에서부터 들려왔다. 낯선 사내의 목소리. 페르낭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고, 비앙카도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사내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미간을 좁혔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금발과 화사한 미모의 미남자가 푸른 눈을 빛냈다.

“왕성에서 이게 무슨 우스운 꼴인가.”

“2왕자님…!”

몰라볼 수 없는 상대의 외모에, 페르낭은 바로 납작 엎드렸다. 그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자카리가 아닌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렇다 하여 자코브의 등장을 반길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왕성의 정원에서 음유시인이 귀족 여인을 희롱했다는 추문이 도는 건 왕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과도 관련이 있으니 왕자로서 예민하게 반응할 게 분명했고, 더불어 자코브가 비앙카에게 관심이 지대하지 않던가. 페르낭의 얼굴이 처참히 일그러졌다.

비앙카는 달갑지 않은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나자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렸다. 페르낭이나 자코브나 비앙카의 입장에선 그놈이 그놈이었다. 승냥이가 두 마리. 어쩌면 자코브가 페르낭에게 비앙카를 겁박하라 일부러 시켰을 수도 있는 일이다.

전생에 페르낭이 위그 자작의 패로 쓰인 적이 있었고, 그로서 비앙카를 완전히 엿 먹였었다. 그리고 위그 자작은 2왕자 파다 보니, 비앙카에게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자코브의 등장은 우연이었고, 자코브와 페르낭은 지금 처음 대면했을 뿐이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비앙카의 눈에 의심이 가득 찼다. 비앙카는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골몰했다.

그때, 뒤늦게 2왕자의 뒤로 이본느가 나타났다.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는 이본느는 비앙카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화다닥 그녀에게로 달려, 그녀와 페르낭 사이를 가로막았다.

“괜찮으세요, 마님?”

“응, 걱정 마.”

비앙카는 페르낭에게 잡혀 시큰거리는 팔목을 다른 손으로 문지르며 답했다. 이본느는 비앙카를 진정시키려는 듯 연신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지만, 오히려 그런 이본느의 손이 더 떨렸다. 얼마나 전전긍긍하며 비앙카를 걱정했는지 느껴지는 이본느의 모습에, 비앙카의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 와중에 페르낭은 자코브에게 변명하고 있었다. 비앙카는 그런 모습이 웃겼다.

‘자코브한테 빌어서 뭐하게, 잘못을 한 건 나한테 했으니까, 당연히 나한테 빌어야 하는 거 아냐?’

비앙카는 페르낭을 씹어 먹을 듯 노려보았지만, 그는 처절한 눈빛으로 간절히 자코브를 올려다보며 그의 발밑에서 빌기 바빴다.

“제, 제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2왕자님. 무, 물론 지금 이, 이 상황이 수, 수상쩍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지만…!”

페르낭은 숫제 울기까지 했다. 류트를 뜯던 그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자코브의 옷자락을 차마 잡지 못하고 허공에서 바르르 떨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비앙카를 겁박하려던 무뢰한 같지 않은, 가증스러운 처량함이었다. 만약 사정을 모르는 여인들이 보았더라면, 아니, 어쩌면 사정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이 누그러질 것 같은 안쓰러움이었지만 자코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페르낭의 어깨를 발로 짓눌렀다. 얼굴이 바닥에 처박힌 상황에서도 페르낭은 계속해서 빌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자코브에게 한 마디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때,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비앙카는 그제야 자코브가 칼을 빼어 든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페르낭이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자코브에게 빌고 있는지도. 까닥하면 목이 떨어질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페르낭에게 건네는 자코브의 목소리는 평안했다. 자기 전에 인사를 속삭이듯이.

“한낱 음유시인 주제에 귀족을 능멸하다니.”

“제발, 제발 저하…!”

“죽어서도 갚지 못할 죄로다.”

자코브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검이 휘둘러지며, 어둠 속에 초승달과 같은 잔상이 남았다. 날카로운 칼날이 그대로 페르낭의 목을 내려쳤다.

“크어…!”

콰드득. 뼈가 잘리는 선명한 소리가 비앙카의 귀에 울렸다. 페르낭의 목에서 솟구친 피가 자코브의 가슴팍까지 튀었다. 자코브의 옷자락이 피로 붉게 물들었고, 페르낭의 머리가 바닥에 뒹구르르 굴렀다. 이본느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

비앙카는 지금 벌어진 상황을 깨닫지 못한 채 눈을 끔뻑였다. 뭐야. 진짜 죽은 거야? 페르낭이 이리 쉽게 죽을 거라고는 생각 못 한 만큼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의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놈이니만큼, 기필코 제 손으로 복수해 줄 거라고 다짐했다. 수도에 와서 레이스 사업과 그녀에게 얽매인 소문 해소 등 다른 것을 해결하느라 바빠서 잠시 미뤄 두었지만, 페르낭이 한 일과 복수에 대해 잊은 건 아니었다.

게다가 페르낭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녀에게 계속해서 접근해 왔다. 파리처럼 눈 앞에서 윙윙거려 준 덕에, 그녀의 분노는 수그러지지 않은 채 계속해서 장작이 지펴졌다.

그러던 와중 이와 같은 일이 생겼다. 그는 여전히 쓰레기였다. 억지로 여자를 겁박하기까지 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만큼 아주 치가 떨렸다. 개 먹이로 줄 거라 했던 비앙카의 말은 실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너무 허무하잖아. 비앙카의 시선이 한참 굴러가다 멈춘 페르낭의 머리로 향했다. 한때 잘생겼던 얼굴은 고통과 경악, 비탄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페르낭의 푸른 눈동자에선 생기가 빠져 있었다. 코가 막힐 정도로 진동하는 피비린내 속에서, 비앙카는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코브는 히죽히죽 웃으며, 그런 비앙카를 향해 다가갔다. 자코브의 멀끔한 흰 낯에 튄 피는 유난히도 선명하여, 더욱 괴기스러워 보였다.

“연회장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말을 잘하더군.”

갑작스레 놓은 말이 위협적이다. 오늘 하루 있었던 수많은 일들 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이대로 생각을 놓을 수가 없었다. 비앙카는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며, 눈을 부릅뜨고 자코브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자코브에겐 그저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자코브의 눈꼬리가 휘어져 내렸다.

‘연회장 밖으로 나오길 잘했네. 이런 일도 있고 말이야….’

연회장 안에 가득한 고티에의 추종자들. 시종일관 고티에에게 알랑거리며 그의 비위를 맞추는 이들을 보기가 싫었다. 평소였다면 좀 더 여유 있게 참아낼 수 있었을 테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자카리 때문이었다.

토너먼트의 승전 연회다 보니 계속해서 자카리의 무용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고, 자연스레 준결승전인 자카리와 자코브의 시합에 관한 이야기가 화두에 오르내렸다. 창끝 한번 제대로 스쳐 보지 못한 채, 말 밑으로 곤두박질쳐진 치욕스러운 기억에 자코브의 이가 갈렸다. 자코브의 실력을 칭찬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자코브의 드높은 자존심에 난 상처는 그 정도로 메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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