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11화 (111/192)

#111 잘 짖는 개(2)

페르낭은 연신 천박한 욕설을 섞어 투덜거리며 바지를 추슬렀다. 볼네 자작가는 세브랑의 변두리에 있는, 그다지 지체 높은 가문은 아니었다. 그렇다 하여 아주 무시할 만큼 별로인 가문도 아니었기에, 페르낭의 입장에선 연줄을 이어 두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볼네 자작 부인과 뒹구는 건 수지 타산에 영 안 맞는 일이었다. 그녀는 너무 집요하고 성격이 나빴다. 남편과의 불만족스러운 성생활을 그에게 풀기라도 하는 듯이.

만약 페르낭이 조금만 더 연회장에 오래 있었더라면 볼네 자작 부인에게 몸 바쳐 헌신하는 일은 없었을 테지만, 불행히도 그는 연회장에서 있었던 소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그 시간에 볼네 자작 부인과 함께 연회장을 빠져나와 뒹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주변이 잠시 소란스러웠다. 페르낭을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대화를 들어 보니 여자 둘…. 혹시 내가 작업 깔아둔 여자는 아니겠지? 그러면 정말 큰일인데….’

볼네 자작 부인과 밀회했다는 사실을 들켜 소문이라도 나게 되면, 볼네 자작에게 불호령이 떨어지는 건 물론이거니와 지금껏 사랑을 속삭였던 다른 여인들에게도 외면받게 될 것이다.

페르낭은 발소리를 죽여 목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그들이 밀회를 한 공간은 밖에서 쉽게 입구를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다. 그 그늘에 몸을 숨긴 페르낭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잘 땋아 내린 고동빛 머리카락에 녹색 드레스. 그리고 라호즈에서 유일한, 섬세하고도 화려한 무늬가 성기게 떠진 하얀 로브…. 예상치 못한 침입자가 누군지 금방 눈치챈 페르낭의 입가가 기묘하게 꿈틀거렸다.

어둠이 내리 앉은 정원. 그리고 숨겨진 공간…. 아는 이들 사이에서야 유명하다지만, 낯선 이들의 눈에는 쉽사리 발견되지 않으리라. 그리고 페르낭은 그녀가 이 공간의 존재를 모른다 확신했다.

비앙카는 이번이 라호즈에 처음 오는 것이며, 라호즈에 온 뒤로도 계속해서 숙소에만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페르낭은 토너먼트 첫날, 처음 그녀를 본 뒤 그녀를 다음 타깃으로 삼기 위해 나흘 내내 그녀의 뒤를 캤다. 그러니 비앙카의 동선과도 같은 시시콜콜한 것을 알아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페르낭이 그렇게 노력할 정도로, 아르노 백작 부인은 먹음직스러운 먹이였다. 블랑쉐포르가와 아르노가의 지원! 얼마나 황홀한 울림인가! 그녀만 제 편으로 삼을 수 있다면, 볼네 자작 부인 같은 이들의 비위를 맞출 필요도 없으리라. 저보다 열 살 많은 여인에게 애완동물 취급을 당하느니, 열 살 어린 여인을 휘두르는 게 훨씬 구미가 당기는 것도 그의 충동을 담금질하는 데 한몫했다.

‘다만 그녀가 좀처럼 유혹에 넘어오지 않는 것이 문제지…. 하지만 그 또한 시간문제야. 뻔하지, 지금은 궁정 연애에 서툴러서 수줍어하는 것일 뿐이야. 모든 여자가 다 그랬어. 처음에는 아닌 척 콧대를 높이지만, 결국 쑤시고 나면 내 얼굴과 아랫도리를 게걸스레 탐하거든. 나중에 봐 봐. 오히려 그녀가 다리 벌려 달려들 걸. 물론 지금도 풋풋한 매력이 있어서 귀엽긴 하지만….’

비앙카의 거부를 오로지 수줍어 그러는 거라 제멋대로 판단한 페르낭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억지로라도 그녀를 깔아 눕히고 나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비앙카가 그에게 반해서든, 그에게 억지로 당했다는 사실에 치욕스러워하며 약점을 잡혀서든…. 어느 쪽이든 페르낭의 입장에선 좋은 일이었다.

때마침 비앙카의 주변을 철통처럼 지키는 무시무시한 호위 기사들도 없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는 걸 깨달은 페르낭은 재빨리 움직였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시간을 짧았다.

페르낭은 뒤에서 손으로 비앙카의 입을 틀어막고는 그대로 비밀 공간으로 끌고 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깜짝 놀란 비앙카가 있는 힘껏 반항했지만, 나라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음유시인의 힘과 체력에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비앙카가 사라진 줄도 모르고 앞서 나가던 이본느가 어둠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듯 비앙카에게 말을 걸었다.

“왕성이라 그런지 확실히 세심하게 관리가 잘되어 있네요. 그치요, 마님? …마님?”

뒤에서 대답이 없자 당황한 이본느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응당 그곳에 있으리라 생각한 비앙카가 자리에 없었다. 이본느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그녀의 머릿속에 온갖 상상이 스쳤다. 이본느는 목소리를 높여 비앙카를 찾았다.

“마님? 어디 계세요, 마님?”

이본느의 애타는 부름에 답하기 위해 비앙카는 입을 열었지만, 그녀의 입을 단단히 틀어막고 있는 손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상대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누구? 자신을 겁박한 이가 누군지 알 수 없었던 비앙카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조용히 하십시오.”

그녀의 귓가에 속삭여진 질척하게 젖은 소리…. 단박에 상대를 눈치챈 비앙카가 몸부림쳤다. 하지만 페르낭이 더욱 그녀를 꽉 끌어안자, 그녀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헉헉거리며 비앙카의 귀에 속삭였다.

“후…. 제가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마님.”

비앙카에게선 좋은 향기가 났다. 페르낭은 입맛을 다시며 음흉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진저리 치게 싫었던 비앙카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발을 들어 발꿈치로 페르낭의 발등을 콱 찍어 눌렀다.

“악!”

제대로 먹혔는지, 페르낭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러기가 무섭게 비앙카는 그녀를 옭아맨 그의 팔을 뿌리치고 빠져나왔다. 페르낭에게서 벗어난 비앙카가 도망칠 출구를 찾았지만 좀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 모르는 비앙카가 전전긍긍하는 사이, 페르낭이 비앙카의 팔뚝을 잡았다.

그녀의 여린 팔뚝이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그에게서 팔을 빼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그의 힘을 뿌리칠 수 없었다. 비앙카의 연녹빛 눈이 번뜩였다. 비앙카는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페르낭의 뺨을 후려쳤다.

철썩,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쩌렁히 울렸다. 비앙카가 자신을 때렸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페르낭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비앙카가 그에게서 팔을 빼내며 날카롭게 외쳤다.

“건방진 것!”

예전에도 여자의 마음을 갖고 노는 쓰레기라고는 생각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바닥을 기는 벌레를 보는 듯한 경멸하는 비앙카의 시선에 페르낭의 눈빛이 휙 뒤집혔다. 페르낭은 씨근덕거리며 비앙카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갔다.

“고고한 당신이 언제까지 그리 콧대 높일 수 있는지 보겠습니다.”

“하, 네까짓 게? 너 따위는 내 잘게 다져 개 먹이로 줄 것이다!”

비앙카는 떨리는 입술을 앙다문 채, 허세를 부리듯 턱 끝을 치켜들었다. 두려운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목소리에 힘을 주었지만, 아주 숨길 수는 없었다. 비앙카의 시선이 불안하게 좌우를 훑었다. 이본느가 제발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주기를 바라며.

* * *

가스파르는 뒤늦게 연회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복도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소뵈르와 로베르를 발견한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전히 그들 곁에는 비앙카가 없었다. 가스파르가 다급히 그들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마님은?”

“왕가의 시종들에게도 말을 해놨어, 병사도 풀었고. 하지만 도통 보이질 않으시니….”

“해가 떨어져서 쉽게 찾을 수가 없어. 안에서 연회가 진행되고 있는 만큼, 왕궁의 병사를 쓸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그 잠깐 사이에 어디로 가신 거야?”

“숙소로 돌아가신 건 아니고?”

“숙소에도 일단 사람을 보내 두긴 했어.”

“으음….”

가스파르가 침중한 신음을 흘렸다. 그때, 저 복도 한쪽 끝에서 익숙한 신형이 보였다. 그들의 주군, 자카리였다. 자카리는 소란스러운 복도를 둘러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복도 한가운데 몰려 있는 세 부장을 발견한 자카리는 바로 그들에게로 다가가며 물었다.

“무슨 소란인가? 너희는 왜 모두 연회장에서 나와 있어. 비앙카는?”

“…죄송합니다. 마님께서 홀로 빠져나가셔서…. 지금 찾고 있는 중입니다.”

“뭐?”

자카리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세 부장들은 자카리의 눈치를 보며 냉큼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자카리의 끓는 분노를 식힐 수는 없었다. 자카리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내가 비앙카를 혼자 두지 말라 했을 텐데?”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백작님. 신에게 벌을 내려주십시오.”

왕이 말을 걸고 있던 찰나였던 만큼, 비앙카를 바로 따라 나가지 못한 것도 당연하였으나 가스파르는 비앙카의 호위였다. 응당 그 상황에서도 비앙카를 신경 썼어야만 했다. 가스파르는 변명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 채, 묵묵히 죄를 빌었다.

그런 가스파르의 사정 또한 자카리는 짐작했다. 가스파르는 꼼수를 부린다든가 방심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남자였다. 그가 비앙카를 따라 나가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이번 일을 쉽게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코브가 연회장 밖을 떠돌고 있는 와중이다. 혹시라도 비앙카가 자코브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자카리의 이가 악다물렸다.

“가스파르 네가 비앙카를 따라나서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너는 명령은 고지식하게 지키는 사내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로베르와 소뵈르, 너희들이라도 신경을 썼어야 하는 것 아니냐? 내 정말 너희에게 실망했다.”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쉽사리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자카리가 분을 토하는 모습에 세 부장 모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특히 비앙카가 빠져나가는 줄도 모르고 있던 로베르와 소뵈르는 더했다.

그러던 와중,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가 쩌렁쩌렁 허공을 울렸다.

“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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