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09화 (109/192)

#109 승전 연회(11)

은빛 머리카락 밑으로 빛나는 서늘한 검은 눈동자를 보며, 볼네 자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볼네 자작이 찾으러 가려고 한 사람은 바로 자카리였다. 자코브도 그렇고 자카리도 그렇고,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만나고자 하는 이들을 바로 맞닥트리게 된다. 이것이 길조일까, 흉조일까…. 볼네 자작이 복잡한 머릿속을 정돈하는 사이, 자카리가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은 이렇게 되어 미안하오.”

자카리의 목소리는 여상하였다. 언뜻 듣기엔 볼네 자작을 위로하는 듯 부드러운 태도였지만, 본능적인 위협에 볼네 자작은 섣불리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여자의 일에 사내가 끼어들게 되어 한 마디 변변찮은 변론조차 하지 못한 채, 수도에서 내쫓기게 되었으니, 그 굴욕이 어떠하시겠소?”

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자카리의 냉소적인 말에 볼네 자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칼로 폐부를 찌르는 듯 날카로웠다.

하지만 이게 전부 제 마누라의 실상을 몰라서 그러는 거다. 볼네 자작은 날 선 자카리의 반응에도 웃으며 살갑게 말을 걸었다. 오늘 하루 종일 억지 미소를 짓고 있느라 입가가 찢어질 것만 같았지만, 참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아르노 백작, 화를 푸시오. 내 백작 부인의 일로 백작의 심기를 어지럽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내가 그대에게 적대감을 품어서 그런 것은 아니오. 나는 항상 당신을 존경해 왔고, 그런 만큼 그녀가 당신을 기만한 것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소!”

볼네 자작은 흥분한 듯 버럭 외쳤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자카리의 충신으로 착각할 만큼 격정적인 태도였다. 인간은 모두 상대에 따라 태도를 달리 한다고는 하지만, 볼네 자작의 손 뒤집는 듯한 태도 전환은 기가 막힐 정도였다. 방금 전까지 욕하던 상대에게 이런 친밀함이라니! 자신의 연기가 스스로 생각해도 꽤나 그럴듯하게 느껴졌던 볼네 자작은 더더욱 연기에 빠져들었다.

진지한 눈빛으로 자카리를 올려다보며 속삭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두꺼비처럼 혐오스러웠고, 잔뜩 낮춘 목소리에는 여전히 술 냄새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볼네 자작 스스로는 모르는지, 그는 더욱 자카리에게 치근덕거렸다.

“아르노 백작.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불편하겠지만, 당신은 들어야만 하오. 다름이 아니라, 자코브 왕자와 아르노 백작 부인 사이가….”

“볼네 자작.”

자카리는 단호하게 볼네 자작의 말을 끊어냈다. 그 또한 볼네 자작이 예상한 바였다. 방금까지 아내와 대립하던 귀족 사내를 자카리가 어찌 믿겠는가? 하지만 볼네 자작이 계속해서 비앙카의 부정에 대해 의심의 불씨를 틔우면, 그 이후엔 자카리가 알아서 볼네 자작을 찾아올 터였다.

볼네 자작은 비앙카 운운했던 자코브의 말을 흘리려 입을 열었지만, 이어지는 자카리의 독설에 말문이 막혔다.

“나는 그대 같은 사내들을 잘 알고 있지. 전쟁터에서 자주 보거든. 제 패배를 패배라 인정하지 못하는 그런 옹졸한 이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남의 명예에 진흙이 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온갖 걸 변명으로 끌고 와 끝까지 발버둥 치는 이들. 실력 이상의 결과를 얻기 위해 거짓말을 거짓말로 덮는 이들….”

자카리가 열여섯 처음 전쟁에 출전했을 때, 그가 어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패배를 인정하지 못했던 이들은 많았다. 적들은 자카리의 실력을 폄훼했고, 같은 편은 자카리의 전공을 빼앗아 가려 호시탐탐 눈을 빛냈다.

자카리는 욕심이 많은 사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 하여 제 손에 들린 것을 빼앗기는 호구도 아니었다.

“내가 그런 이들을 어떻게 입 다물게 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

“아, 아니….”

자카리의 기세에 겁먹은 볼네 자작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자카리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연회가 지속되는 와중 해가 기울어졌고, 자카리가 서 있는 쪽으로 그림자가 깊게 드리웠다. 자카리의 웃음이 어둠 속에서 기이하게 빛났다.

“명심하시오, 볼네 자작. 난 알려져 있는 것만큼 인내심이 길지 못해. 성가시게 구는 것을 타일러 설득하기보다, 아주 없애 버리는 것이 편한 사람이오.”

자카리는 애초에 볼네 자작과 말을 섞을 생각이 없었다. 그가 볼네 자작을 찾아온 것은 그에게 하고 싶은 경고가 있기 때문이었지, 볼네 자작한테 들을 말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저자가 입에 담은 말들 따위는 뻔했다. 자신의 일신의 안위를 위해 비앙카의 명예를 세 치 혓바닥으로 농락하겠지. 귀족이라 함은 왕의 기사일진대, 기사라는 작자가 저리 치졸한 행태를 보일 줄이야. 자카리의 검은 눈동자가 불에 달궈진 숯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

“볼네 자작령은 우연찮게도 아라곤 왕국과의 접경지에서 그리 멀지 않지. 근처에는 그대 자작령을 지켜줄 변경백령도 없고 말이야…. 지금은 아라곤에서 북쪽을 위주로 침범하곤 하지만, 우연찮게도 볼네 자작령이 있는 남쪽으로 쳐들어올 수도 있지 않겠소. 그러니 영지에서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오.”

“히이익!”

자카리의 협박은 대담하고 무시무시했다. 아라곤 왕국에서 침범한 것으로 가장하여 볼네 자작령을 초토화시킬 수도 있다는 말 아닌가!

아르노 백작은 빈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가 전쟁을 일으킨다 했으면, 정말로 전쟁을 일으킨다는 소리였다.

자신의 말을 조금이라도 귀담아들어야 뭐가 돼도 될 텐데, 들은 척도 안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영지를 두고 협박하는 자카리의 태도에 질려버린 볼네 자작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자신이 아무리 말해도 자카리는 들을 생각이 없으리라. 그만큼 자카리의 적대감은 노골적이었다.

“배, 백작의 심기를 거스를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 그럼 좋은 하루 되십시오.”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강렬한 자카리의 살기에 견디지 못한 볼네 자작은 더듬더듬 변명이나 다름없는 말을 웅얼대더니, 결국 꼬리를 말고 달아나듯 도망쳤다.

달음박질치는 볼네 자작의 고개가 바닥으로 푹 고꾸라졌다. 볼네 자작의 등 뒤로 길게 따라붙는 자카리의 시선이 느껴졌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그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둠 속에 숨어, 눈을 빛내며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그를 지켜보고 있겠지.

수도에 있는 놈들은 전부 미친놈들이다. 사람의 상식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왕에게 대놓고 귀족 사내의 근신령을 운운하는 백작 부인이나, 그런 그녀에게 밉보일까 두렵다 너스레를 떨며 적대 파에게 세작을 심을 기회를 손쉽게 버려버리는 2왕자나, 아내의 부정에 대한 말에도 고요히 영지전을 선포하는 백작이나….

볼네 자작은 치를 떨었다. 자카리와 자코브, 둘 다 제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니 방도가 없었다. 이번 수도행은 완전히 텄다. 내 주제에 정치질을 하려고 했던 것이 문제였을까. 술! 술도 문제였다. 술만 마시지 않았더라도 셀린느가 이상한 짓을 하는 걸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자작령에 돌아가면 술은 입에도 대지 않을 것이다. 그는 꼬리가 빠져라 헐레벌떡 성을 빠져나갔다.

볼네 자작의 예상대로, 자카리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볼네 자작이 성문을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단단히 기를 죽여 놓았으니 당분간 허튼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동안은 영지에 콕 박혀서 얌전히 굴겠지.

적의를 품고 있는 이들은 언제 불이 붙을지 모르는 불씨와도 같았다. 그들의 적의는 예상치 못한 순간,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튀어 오르기 마련이다. 그것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을지는 불씨의 크기마다 달랐지만, 성가시다는 것만큼은 동일했다. 자카리 본인에게 튀는 불똥이라면 그냥 내버려 뒀겠지만, 상대가 비앙카라면….

애초에 불똥이 튀길 이유조차 없게 해야겠지. 불씨를 제거하는 방법은 단순했다. 아주 짓밟고 짓밟아서, 기어오를 의지를 송두리째 빼앗아 버리는 것이 확실했다.

자카리는 낮게 혀를 차고는 몸을 돌렸다. 우려스러운 일을 해결했으니, 이제 비앙카에게 돌아갈 차례였다.

* * *

자카리가 자리를 비우고 오래지 않아, 비앙카가 슬쩍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때마침 대화의 물꼬는 자카리의 세 기사, 특히 가스파르에게 향해 있던 참이었다. 이때다. 비앙카는 그녀에게서 잠시 떨어져 나간 관심에 한숨 돌리며, 이본느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본느.”

“네, 마님?”

비앙카는 답하지 않고 턱 끝만 까닥였다. 나가자는 신호였다. 이본느가 어찌해야 하나 당황하는 사이, 비앙카는 자리에서 슬며시 빠져나왔다. 이본느는 조용히 비앙카의 뒤를 따르면서도 가스파르 쪽을 곤혹스레 흘끔였다. 눈이 마주친 가스파르의 딱딱한 얼굴에도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가스파르의 엉덩이가 비앙카를 따라 나갈 듯 들썩였다. 하지만 그러기가 무섭게 왕이 말을 걸었다.

“역시 용장 밑에 용장이 있다고, 내 아르노 백작의 실력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가스파르 경까지 그리 훌륭한 무용을 보여줄 줄은 몰랐네.”

“…과찬의 말씀입니다.”

“제가 만나 본 상대 중에서도 상당한 실력자였습니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가스파르 경.”

“그래도 경이 이기시지 않으셨습니까.”

“운이 좋았지요. 그리고 그 밑천은 아르노 경과의 시합에서 탈탈 털렸고요.”

가스파르와 준결승에서 붙은 카스티야의 기사 또한 맞장구를 치며 끼어드니, 가스파르로서는 진퇴양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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