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08화 (108/192)

#108 승전 연회(10)

“아주 풍년이네요.”

웃음기를 띤 비앙카의 말에 자카리 또한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카리는 비앙카를 끌어안다시피 할 정도로 가까이 허리를 잡아당긴 채 소곤거렸다. 자카리의 입술이 비앙카의 뺨에 닿을 듯 말 듯 스쳤다.

“다행이로군. 그러면 잠시 밖에 좀 다녀오겠소. 자리에 계시오.”

“알았어요. 다녀오세요.”

자카리가 무엇 때문에 연회장을 비우는지 궁금했지만, 어련히 이유가 있겠지 싶어 묻지 않았다. 비앙카는 자카리를 배웅하듯 그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비앙카의 뺨을 손등으로 조심스레 쓸어내린 자카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움직이기가 무섭게 소란을 피우려는 자들을, 손을 들어 제지시킨 그는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비앙카에게 향하는 자카리의 다정한 손짓 하나하나를 지켜보던 귀족 여인들은 깊게 탄식했다. 지금껏 무뚝뚝한 사내라고 생각했는데, 토너먼트에서도 그렇고 제 아내에게는 누구보다도 로맨틱하다.

하지만 부러워해 봐야 쓸모없는 일이다. 저런 사내가 둘 이상 있지는 않을 테고, 제 남편은 물론이거니와 애인마저도 자카리에 비하기엔 한참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자코브 왕자가 자카리에 비견할 만할까…. 하지만 자코브 왕자가 여자에게 관심 없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는데, ‘그’ 자코브 왕자마저 비앙카에게 관심이 지대한 눈치였다. 여기저기서 여인들의 부러움에 찬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번 토너먼트와 연회는 어디까지나 알베르 왕세자와 나바라 왕녀의 약혼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행사였지만, 실제 주인공은 비앙카라는 것에 모두 이의가 없었다.

다들 비앙카를 부러워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비앙카는 지나친 관심이 피곤할 뿐이었다. 복에 겹다고 해도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평소였다면 싫은 티라도 냈을 텐데, 오늘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볼네 자작과의 불화 때문에 이미지를 관리해야 했고, 뿐만 아니라 레이스를 팔아 아르노가의 재정에 보탬이 되기 위해선 호감을 유지해야 하기도 했다. 비앙카는 있는 힘껏 입꼬리를 잡아 올려 웃었다.

‘조금만 더 버텨 보다가, 정 힘들면 나도 잠깐 자리를 비워야지.’

그리 생각하는 비앙카의 입가가 부들, 경련했다. 비앙카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자리를 비울 핑계를 떠올렸다. 그런 비앙카의 생각을 전혀 모르는 이들은 비앙카에게 호의에 찬 질문을 건넸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 * *

“이게 다 네가 멍청해서 벌어진 일 아니냐!!”

찰싹, 소리가 회랑에 울렸다. 연회장에서 빠져나온 볼네 자작이 저를 뒤따라온 셀린느의 뺨을 내려친 것이었다. 휙 돌아간 셀린느의 뺨이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셀린느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지만, 볼네 자작은 오히려 셀린느를 더 몰아붙였다.

“그년의 알량한 호의 따위에 안심이라도 한 거냐? 넌 그냥 수도에 남아 있을 수 있어서 좋지? 아비가 저 때문에 무슨 굴욕을 당했는지는 신경도 안 쓰는 배은망덕한 년! 딸자식 키워 봐야 아무 쓸모 없다더니…! 내가 네 드레스 값을 치른 건, 이런 식으로 갚으란 뜻이 아니었다!”

버럭 높인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왕의 앞에서는 한마디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이가 기세등등하여 셀린느를 힐난했다. 딸을 보는 볼네 자작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꼴도 보기 싫다! 너는 당장 방으로 돌아가서 근신해라! 이놈의 여편네는 또 어디 가 있는 거야?”

볼네 자작의 불호령에 셀린느는 훌쩍이며 숙소로 돌아갔다. 못난 것.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볼네 자작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혼잣말이나 다름없는 분통을 터트렸다.

“블랑쉐포르 백작은 딸자식을 어떻게 키워서…!”

오늘의 사태는 볼네 자작 본인부터가 자식 교육을 외면한 결과였지만, 머리끝까지 열이 오른 그는 대신 블랑쉐포르 백작을 탓했다.

“아르노 백작도 말이야. 아내가 저리 천방지축으로 건방지고 오만한 망아지처럼 날뛰는 데 꿈쩍도 않는 것이 말이 돼?”

그 또한 셀린느가 제 좋을 대로 이야기하는 동안 꿈쩍도 않고 낄낄대었지만, 역시나 안중에 없었다. 볼네 자작은 제가 한 일은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남 탓을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이번 일은 어떻게든 해서…. 오늘의 굴욕을 꼭 복수하고 마리라. 하지만 그년 뒤에는 아르노 백작이 있고, 1왕자가 있어….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상대들…. 그렇다면….”

혼잣말을 중얼중얼 내뱉다시피 하며 걷는 그의 발걸음이 빨랐다. 그때 마침, 밖에 나와 있던 자코브와 마주쳤다.

왕이 확고부동하게 1왕자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1왕자의 뒷배에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는 아르노 백작이 있으니, 1왕자가 다음 왕이 될 건 뻔했다. 하지만 2왕자는 여러모로 1왕자보다 기량이 뛰어났고, 야심도 있는 사내였다. 단지 그뿐이었다면 볼네 자작도 냉큼 1왕자의 편을 들었을 테지만, 그를 찜찜하게 한 것은 2왕자의 집요한 뒤끝이었다. 만약 볼네 자작이 1왕자의 밑으로 들어갔는데 2왕자가 왕이 된다면…. 그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지금껏 1왕자와 2왕자 사이를 고민하며 재 보고 있었지만, 아르노 백작의 눈에 띄었으니 이제 1왕자 라인을 타기는 그른 상태였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2왕자인 자코브의 편에 붙자. 그리 생각한 볼네 자작이 자코브를 찾아가려 한 순간 등장한 자코브의 모습! 때마침 계제가 좋았다. 볼네 자작은 환히 웃으며 자코브에게 다가갔다.

“저하!”

“오, 볼네 자작. 영지로 돌아가시는 길인가?”

안에서 있었던 소동에 대해 굳이 지적하는 자코브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볼네 자작의 목이 벌게졌지만, 그렇다 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볼네 자작은 자코브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하며,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저하, 제발 절 좀 살려주십시오.”

“하하. 누가 들으면 아바마마께서 자네를 크게 내친 줄 알겠어. 별거 아닌 근신령 아닌가.”

자코브야 별거 아니라 말하지만, 실은 별거 아닌 게 아니라는 걸 자코브도, 볼네 자작도 알았다. 자코브는 귀찮은 것을 떼어내듯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자코브의 종잇장보다도 가벼운 태도에서는 볼네 자작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이 티가 났지만, 볼네 자작이 그에 굴욕을 느끼고 있을 틈이 없었다. 그에게는 정말, 자코브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하께서 절 잊으면 평생 영지에서 옴짝달싹 못 하는 처지 아닙니까. 저하, 저하께서 제 근신령을 풀어주신다면, 제 한 몸 바쳐 2왕자 전하를 이 세브랑에서 가장 고귀한 자리에 오르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볼네 자작은 비굴하게 자코브의 눈치를 보았다. 납작 엎드려 그를 치켜세워 주면, 자코브 또한 마냥 그를 매정히 내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코브는 껄껄 웃으며 덧붙였다.

“괜찮네. 변변찮은 변명 한 마디 제대로 못 한 채 아녀자에게 몰아붙여진 자가, 날 위해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대놓고 조롱하는 자코브의 태도에 당황한 볼네 자작의 뺨이 파들파들 떨렸다. 볼네 자작도 제 가문의 능력으로는 자코브가 왕이 되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라 하여 아무런 믿는 구석 없이 자코브를 찾아왔겠는가. 나름 믿는 구석이 있던 볼네 자작은 애써 웃으며 자코브를 설득하려 했다.

“제 딸은 이제 오델리 왕녀의 시녀로 들어가게 됩니다. 오델리 왕녀는 1왕자와 친혈육이니만큼 쓸 만한 정보를 많이 입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딸아이 또한 기꺼이 저하를 위해 정보를 알아 올 것입니다.”

“됐네, 됐어. 볼네 자작. 자네의 성의는 알겠네만, 딱히 내 미래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진 않군.”

자코브는 철통같았다. 손을 내젓는 그의 눈빛이 어찌나 단호한지, 볼네 자작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자네하고 어울려 다니는 모습을 보면, 비앙카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단 말이지.”

자코브는 그리 말하고선 휙 뒤돌아 자리를 떴다. 떠나가는 자코브의 망토 자락에선 찬기가 풀풀 흘렀다. 두 번 다시 그를 돌아보지 않을 것 같은 냉정함에 볼네 자작은 망연자실하며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비앙카? 한참을 곱씹던 그는 비앙카가 아르노 백작 부인의 이름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그 이름이 도대체 왜 여기서 나온단 말인가? 정말로 자코브와 아르노 백작 부인이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걸까…. 그렇다면 자신이 단단히 잘못 찾아왔다. 자신이 찾아가야 할 사람은 자코브가 아니라….

“볼네 자작.”

“히, 히익!”

갑자기 뒤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볼네 자작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우뚝 서서 저를 노려보고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사내, 자카리가 있었다. 안 그래도 키가 크고 어깨가 딱 벌어져 덩치가 좋은 사내인데, 검은 모피 망토를 걸치고 있으니 더더욱 위협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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