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승전 연회(7)
다보빌 백작은 다보빌가의 데릴사위였다. 다보빌가는 명망 높은, 블랑쉐포르가에 필적할 정도의 명가였다. 여자 또한 가문을 이을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무남독녀 외동딸인 카트린은 소심했고, 그런 그녀가 다보빌가를 물려받았다가는 금방 가문이 파탄 날 건 뻔했다. 그래서 선대 다보빌 백작이 고르고 골라 데려온 데릴사위가 바로 지금의 다보빌 백작이었다.
선대 다보빌 백작의 안목이 틀리지는 않은 듯, 그는 제 노릇을 톡톡히 했다. 펜 끝보다 검이 더 강력한 시대임에도 그는 문관으로서 1왕자 파의 또 다른 대들보가 될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자카리가 철혈의 기사라면, 다보빌 백작은 독사의 혀라 불릴 정도로 날카로운 독설로 유명했다.
그런 그와 척지고 싶지 않은 만큼, 비앙카는 다보빌 백작이 이 상황을 기꺼이 여기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넘겼다. 이번 일에 있어 비앙카는 잘못한 게 없었다지만, 만약 그가 이번 일에 앙심을 품기라도 했으면 일이 꽤 난처했을 테니까.
다보빌 백작은 비앙카를 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이 정도로 끝내 주어 감사하다는 듯이. 비앙카는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찝찝함을 품은 채 마주 고개를 까닥임으로 답을 대신했다.
“치워라.”
다보빌 백작이 뒤에 있는 기사를 향해 손짓했다. 다보빌가의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가더니 연회장에 멍하니 서 있는 앙트를 끌어냈다. 강제로 끌려 나가는 앙트의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내리꽂히는 날 선 시선들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앙트를 바라보는 다보빌 백작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카트린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는 것과 대조되었다. 카트린은 아직도 자신 때문에 앙트가 봉변을 당했다고 생각하는지, 끌려 나가는 앙트를 향해 안타까운 시선을 던졌다. 다보빌 백작은 그런 카트린을 품으로 끌어안은 채 작게 무어라 속삭였다. 카트린을 위로하는 그 태도가 자못 다정하고 달콤하여, 아까 전의 기쁜 미소와 쉽게 매치시키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독사의 혀라는 이명에도 불구하고, 다보빌 백작은 백작 부인에게만은 무엇이든지 예스맨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귀족들에게는 심장을 저미는 듯한 독설을 내뱉으면서도, 백작 부인에게는 쩔쩔매며 안 좋은 소리 한 마디 하지 못한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데릴사위로 들여왔기에 그런다고 하기엔 다보빌 백작의 능력이 너무 출중하였고, 백작 부인에게 푹 빠졌다고 하기엔 그녀가 그리 매력 있는 여인은 아니라는 것이 세간의 평가였다. 비앙카에게 이야기를 전해 준 이본느를 비롯하여 모두가 그 소문을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로 치부했다.
하지만 지금, 비앙카는 그 신빙성 없는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비앙카는 앙트의 뒤처리에 대해서는 생각을 고이 접었다. 지금 앙트의 주인은 다보빌 백작 부인이었고, 그녀의 옆에 있는 다보빌 백작의 표정을 보아하건대 비앙카가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처리할 사람처럼 보였다.
게다가 귀족들이 이 정도로 모여 있는 곳에서 얼굴이 단단히 찍혔으니, 세브랑에서 하녀 일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앙트의 일을 끝낸 비앙카의 화살이 셀린느에게 향했다.
“그리고 영애…. 실례지만 어느 가문의 여식이죠?”
“…볼네 자작가입니다.”
앙트가 한 마디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질질 끌려 연회장 밖으로 내쫓기자 셀린느의 정신이 멍해졌다. 그녀가 예상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애초에 앙트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그녀는 앙트가 주절주절 늘어놓던 비앙카에 대한 소문이 과장된 거짓말이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막상 그녀 본인 또한 추측 섞인 거짓말을 주렁주렁 늘어놓았으면서도!
“볼네 자작 영애는 이런 연회에 나서기엔 아직 배움이 부족한 게 아닐까요? 영애의 경솔한 행동으로 연회의 분위기가 흐트러졌네요. 더군다나 타국의 분들도 있는 경사스러운 연회에서….”
비앙카가 우려스레 카스티야의 사절단이 있는 곳을 흘끔였다. 그제야 주변인들은 화들짝 놀라 왕의 심기를 살폈다. 지금껏 상황을 흥미 본위로 가볍게 보는 데 집중하느라, 두 사람의 공방이 지속될수록 왕의 심기가 점점 불쾌해져 가고 있다는 걸 차마 눈치채지 못했다.
볼네 자작을 노려보는 왕의 푸른 눈에 가득한 노기! 차마 왕으로서의 위엄 때문에 아녀자들의 싸움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그저 셀린느의 집안에서 눈치껏 딸자식을 간수하기를 바랐으나 정작 볼네 자작은 잔뜩 취한 채 낄낄거렸고, 볼네 자작 부인은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왕의 분노에 볼네 자작의 주변에 있던 이들이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은 자작이 화들짝 놀랐다. 더 이상 왕의 눈총을 사고 싶지 않았던 그는 허겁지겁 셀린느를 잡아당겼다.
“커흠, 백작 부인. 죄송합니다. 제가 여식의 가르침에 소홀했던 듯하군요. 노하신 것도 이해합니다만, 부디 이 어린아이의 어리석은 치기를 너그럽게 용서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어린아이의 치기라 하기엔, 오히려 비앙카 쪽이 나이가 어렸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주변 귀족들이 피식 비웃음을 흘렸지만, 볼네 자작은 뻔뻔히 미소 지으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볼네 자작이 진심이 아니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묘하게 풀어진 눈동자와 탁 막힌 목소리에서 술 냄새가 풍기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셀린느가 비앙카를 몰아붙였을 때, 그는 그 꼴을 보며 낄낄 술안주로 삼았을 것이다. 셀린느의 무례를 그만두게 해야겠다는 생각은커녕, 오히려 딸이 아르노 백작 부인을 공격함으로써 자카리까지 한 방 먹인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을 수도 있었다. 비앙카의 추측은 비약이 아니었다. 벌건 눈동자에서 그런 그의 옹졸한 심정이 절로 느껴졌다.
비앙카는 소리 높여 비웃고 싶은 심정을 꾹꾹 누르며 빙긋 웃었다.
“저야 당연히 용서해드릴 수 있지요. 비록 조금의 소란이 있었을지언정, 제 주변을 떠도는 작자 미상의 소문들이 이 기회에 정리된 듯하니까요.”
“아이고. 백작 부인께서는 아름다운 얼굴만큼이나 마음도 아름다우시군요. 과연 황금 장미의 레이디다운 품격입니다.”
‘백작 부인이기는 하지만 결국 어린 여자아이. 좋은 말로 조금만 구슬리니 이리 쉽게 용서해 주는군. 하여간 셀린느, 이 멍청한 계집. 괜히 나대는 바람에 왕의 눈에 띄었잖아…! 제대로 된 남편감도 못 물어 오는 것이 한심하게. 도대체 언제까지 뒤치다꺼리를 해 줘야 하는지 원.’
제 딸보다도 어린 비앙카를 우습게 본 그의 속내가 얼굴에 훤히 드러났다.
볼네 자작은 셀린느를 탓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은 어떻게 보면 볼네 자작, 그 때문이기도 했다. 볼네 자작은 수도에서 알아주는 귀족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의 가문은 영지의 지리적 이점도, 부유함도, 군사력도 없었다. 그런 그의 가문이 도약하기 위해서는 결혼 장사를 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항상 셀린느를 압박했다. 이번에 수도로 올라오면서도, 그럴듯한 영식을 꼬시지 못하면 혼쭐이 날 줄 알라며 윽박지르기도 했다.
그래서 셀린느는 항상 적령기의 남자들을 살폈지만 여의치 않았다. 사내들이 비앙카와 오델리 왕녀에게만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었다.
오델리 왕녀는 애초에 왕족이었고, 아름다운 외모는 감히 비교가 불가능한, 범접할 수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비앙카는 달랐다. 셀린느는 자연스레 비슷한 또래인 비앙카와 자신을 비교했다. 그녀의 눈에는 갈색 머리의 비앙카보다 자신이 훨씬 근사해 보였다. 그런데 이 차이는 뭘까?
게다가 비앙카의 결혼 생활은 셀린느가 바라는 완벽한 것이었고, 셀린느는 결코 얻지 못할 것이었다. 열등감과 좌절감. 거기에 그들과 어울리기 싫다는 듯 고고해 보이는 비앙카의 태도는 그녀를 빈정 상하게 하기 충분했다. 그것이 셀린느가 비앙카를 유난히도 집요하게 싫어하게 된 계기였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볼네 자작이 알 바 아니었다. 지금 보는 눈이 많아 가만히 있지만, 숙소로 돌아가자마자 이 어리석은 계집애의 뺨을 철썩 내려치리라. 그는 속으로 셀린느를 욕하며, 빙긋 미소 짓는 비앙카에게 미안함을 가득 담아 마주 웃어 보였다. 가식이 철철 넘치는 미소였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비앙카가 여전히 조곤조곤한 말투로,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덧붙인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볼네 자작. 자작가의 명예는 제가 어찌 용서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군요. 폐하께 누를 끼친 만큼, 자작께서 잘 처신하실 거라 믿습니다.”
“하, 하하. 전하께 누를 끼쳤다니, 무슨 이야기십니까, 백작 부인. 저희 자작가는….”
볼네 자작이 가장 기피하는 것이 바로 왕의 개입이었다. 아직까지는 왕이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았으니 이대로 사태를 잘 덮으면 되리라 생각했는데, 대놓고 왕의 화를 지피는 듯한 비앙카의 말에 볼네 자작은 당황했다. 그는 비앙카의 입을 막기 위해 황급히 목소리를 높였지만, 비앙카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여상히 말을 이었다.
“자작께서는 영애를 어리다 칭하셨다지만, 제가 알기로 영애는 이미 성년이 넘었을 텐데요. 다 큰 여식이 허구한 날 소문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확인되지도 않은 이야기로 타국의 사신들이 계신 연회를 어지럽힐 정도로 행실이 미흡한 데도 볼네 자작은 이를 방관하셨지요. 이것은 곧 볼네 자작가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