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승전 연회(6)
“다보빌 백작 부인. 그 시녀를 불러와요.”
자작 영애가 백작 부인에게 명령하는 듯한 태도에 주변 이들의 이맛살이 작게 찌푸려졌다. 하지만 지금, 비앙카를 궁지로 몰았다 생각하는 셀린느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앙트를 불러오라는 말에 카트린은 주저했다. 아르노 백작 부인은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었다. 이건 그저 그녀의 평판을 떨어트리기 위한 셀린느의 이기심일 뿐이었다.
셀린느가 아르노 백작 부인을 내심 질투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일을 키울 줄이야. 카트린은 당황스레 눈을 깜빡였지만, 날뛰는 말처럼 사나운 셀린느의 기세에 반박할 자신은 없었다. 셀린느는 눈을 세모꼴로 뜨며 카트린을 재촉했다.
“어서요.”
기가 약한 카트린은 싫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앙트를 불러야 했다.
“…앙트. 볼네 자작 영애가 널 찾는구나. 이리 나와 보렴.”
카트린의 시중을 들며 한 발자국 뒤에 물러서 있던 앙트는 이를 악물었다. 한심한 마님은 자신의 시녀를 지켜주지 못한다. 지금껏 그런 카트린의 우유부단함을 이용해 제 잇속을 채웠지만, 지금은 그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비앙카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만 하더라도 이런 일은 생각도 못 했다. 그냥 비앙카 때문에 제 인생이 꼬였으니, 적당히 골탕 먹일 생각이었다. 역시 너무 아는 체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1왕자비의 정원에서 마주쳤을 때, 비앙카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괜히 화가 나서 홧김에 충동적으로 일을 저질러버린 것이 문제였다.
앙트는 떨리는 눈으로 비앙카를 흘끔였다. 밀랍 인형처럼 핏기 없는 새하얀 얼굴은 미동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손을 채찍으로 몇 번이나 내려칠 때도 저런 표정이었다. 뱀 같은 여자. 악마 같은 여자….
앙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확실한 건, 비앙카는 절대 앙트를 그냥 두지 않으리란 것이었다. 앙트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목줄이 매인 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처럼, 주저주저하며 앞으로 나섰다.
셀린느는 그런 앙트의 심정은 알 바 아니었다. 고작 시녀가 아닌가. 시녀는 그녀의 의도대로, 다른 이들의 앞에서 비앙카의 약점을 줄줄 늘어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셀린느는 의기양양하게 앙트를 재촉했다.
“자, 말해 보거라. 아르노 백작 부인이 영지에서 어떠하셨다고?”
“그, 그게….”
앙트는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주저하며 비앙카의 눈치를 보았다. 아무리 주변에 비앙카의 추문을 흘리며 그녀를 헐뜯기는 했지만, 그 태반이 거짓이라는 걸 앙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하였다가는 자신을 이곳에 세운 셀린느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것이니, 셀린느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의 주인은 카트린이었지만, 카트린에 대해 별다른 기대를 하고 있지는 않았다.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그녀는 백작 부인이나 되어서는 고작 자작 영애의 말 한마디에 그녀를 내어주지 않았던가. 만약 주변 이들이 앙트의 처벌을 강하게 원한다면 카트린은 절 보호해주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되기 전에 진작 다보빌 백작을 꾀서 제 편으로 만들었어야 했는데. 수도에 있는 동안 기회를 살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번 연회가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괜한 일만 뒤집어쓰게 생겼다.
이번에 말 한 마디라도 삐끗했다가는 정말로 큰일 난다. 셀린느와 비앙카 사이에서, 앙트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의 혀끝이 달달 떨리며 말문이 막혔다.
“저….”
연회의 모두가 앙트를 주목했다. 도대체 이 시녀가 왜 불려 나온 건지 추론하는 이들의 눈동자가 앙트와 비앙카, 셀린느 사이를 오갔다. 아까 셀린느가 말한, 한겨울에 매질당한 채 벌거벗겨져 내쫓긴 하녀가 바로 이 하녀란 말인가?
미인이 많은 수도에서도 앙트는 객관적으로 예쁜 편에 속했다. 그런 앙트가 귀족 여인들의 눈치를 보는 처연한 모습에, 뭇 사내들은 안타까워했다.
앙트를 동정하는 듯 술렁이는 분위기에도 비앙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도 저도 못하는 앙트를 흘끗 보며 담담히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구나. 이 결과는 네가 입을 가벼이 놀렸기 때문이라 봐도 좋겠지?”
비앙카는 씰룩이듯 올라가려던 입꼬리를 잡아 내리려 노력했다.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녀가 노린, 그대로의 상황이었으니까.
비앙카가 지금껏 셀린느의 도발을 적당히 받아치고 부추긴 것은, 바로 지금을 위해서였다. 소문의 근원지인 앙트를 모두의 앞으로 끄집어내는 것!
태반의 사람들은 비앙카가 어떤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는 그냥 차와 함께 곁들일 소소한 대화 소재 정도였겠지. 아마 비앙카가 스스로의 입을 빌려 해명하는 정도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듣는 사람 없는 메아리에서 그쳤을 것이다.
그래서 판을 키웠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게. 그리고 지금까지의 소란을 사죄할, 그녀의 적을 상정하기 위해.
딱히 셀린느나 앙트에게 원한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비앙카에게는 지금껏 그녀의 꼬리에 주렁주렁 달린 소문을 그대로 흡수해 줄 다른 인물이 필요했다. 소문을 가장 효과적으로 없애는 방법은 타인에게 그대로 떠넘기는 것이었으니까.
솔직히 비앙카는 제게 씌워진 말도 안 되는 소문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그녀에겐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그녀는 모든 사람이 제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고, 타인의 안 좋은 소리에 딱히 상처받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덧씌워진 소문 때문에 아르노가와 블랑쉐포르가의 이름에까지 얼룩지게 둘 수는 없었다.
비앙카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조아린 앙트에게서 시선을 뗀 비앙카는 셀린느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녀는 제 남편에게 되지도 않는 욕심을 품고는 저를 멸시하는 폭언을 하여 쫓겨난 것입니다. 영애는 그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
“아, 아니요….”
셀린느는 말을 더듬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어느새 그녀가 앞에 세운 하녀는 가련한 피해자가 아니라 남편을 노리는 꽃뱀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자카리의 반응이 비앙카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계속하여 침묵하였지만 앙트를 무감각하게 노려보는 서늘한 검과 같은 시선에서는 당장에라도 앙트를 베어 낼 것 같은 살벌함이 느껴졌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깨달은 이들의 수군거림이 높아졌다. 앙트를 가여이 여겼던 남자들은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고, 여자들은 모두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뒤늦게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셀린느의 안색이 시퍼레졌다. 이대로 있다가는 비앙카가 아니라 그녀의 평판이 엉망이 되게 생겼다.
비앙카가 원하는 대로 여론이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쉽사리 기쁨을 드러내지 않은 채, 비앙카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게다가 과거에 있던, 영지에 관한 내부 사정을 다른 곳에 가벼이 말하고 다니다니…. 그런 경솔한 이를 측근으로 두고 계시는 건 썩 현명한 처사로 보이지 않는군요, 다보빌 백작 부인.”
비앙카는 셀린느를 싹 무시한 채 카트린에게 말했다. 카트린에게 딱히 악감정은 없었다. 그저 사람 보는 눈이 없어 앙트 같은, 제 상전 높은 줄 모르는 이를 시녀로 둔 것도 모자라 자작 영애나 남작 부인 같은 이들의 방패로 이용되는 꼴이 답답할 뿐이었다.
비앙카라 하여 사람을 곁에 두는 일에 능통한 것은 아니니, 이런저런 조언을 할 처지는 아니었다. 솔직히 그녀는 하녀를 부리는 일에 대해 썩 재주가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 말고, 다보빌 백작 부인에게 쓴소리를 해 줄 사람이 있을까? 그게 아니니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리라. 자신이 깃발을 메기로 결정한 비앙카는 주저 않고 쓴소리를 했다.
“좋은 하녀를 구하기 위해선 그녀가 무슨 이유로 이전 직장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것도 곁에 둘 시녀라면 더더욱요. 더불어 함께 어울려 지내는 이들의 품격도 한 번쯤 고려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소문에 휘둘리는 경거망동한 이들과 함께 어울려서 본인의 평가를 떨어트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다보빌 백작 부인이 사려 깊은 분이라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비앙카의 건조한 말이 이어질 때마다 카트린의 고개가 푹푹 숙여졌다. 그녀의 얼굴은 붉은 머리카락만큼이나 벌겋게 달아올랐다.
비앙카는 카트린의 옆에 앉아 있는 다보빌 백작을 흘끔 보았다. 흑발을 단정히 쓸어 넘긴, 새하얗고 멀끔한 얼굴에 즐거움이 서렸다. 그의 휘어지는 눈빛은 내심 지금 이 상황을 흡족히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확실히 이상했다. 아내가 연회장에서 다른 여인에게 한 소리 들은 건, 어찌 보면 가문의 명예와도 관련된 일이었다. 그런데도 저리 기뻐하는 것은…. 무언가 꿍꿍이가 있어, 비앙카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것은 다보빌 백작 부부 사이의 일이다. 비앙카는 신경을 껐다. 다보빌 백작 부부 사이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비앙카와 자카리, 두 사람의 관계만큼이나 유명했다. 오죽하면 남 일에 관심 없는 비앙카가 알고 있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