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승전 연회(4)
하지만 마냥 웃어넘길 수는 없었다.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비앙카가 끌려 나오는 것이, 마치 그녀에게 낙인을 찍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의 음험한 속내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소문에 이맛살을 찌푸린 자카리가 한 소리 하려고 했지만, 비앙카가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 말아요.”
자카리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비앙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까만 눈동자가 짜증스레 빛났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가만히 듣고 있을 생각이오?”
비앙카는 희미하게 웃으며 자카리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자카리의 몸이 비앙카의 손길에 쉽게 허물어지듯 내려왔다. 비앙카는 내려온 자카리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원래 수확은 무르익었을 때 하는 법이에요.”
비앙카의 입꼬리가 빙긋 올라갔다. 그녀는 귀찮고 성가신 일을 싫어하기는 했지만, 그렇다 하여 순순히 당해주고 있을 만큼 호구는 아니었다.
비앙카도 그녀에 대해 악의적으로 퍼지는 소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비앙카가 두문불출하여 소문으로만 나돌았지만, 오늘 드디어 비앙카가 사람들 앞에 나섰다. 만약 그녀를 정말로 골탕 먹이고자 하는 이라면, 지금 이 기회를 간과하지 않으리라. 비앙카가 노리는 건 바로 상대가 모습을 드러내는 그 순간이었다.
비앙카의 의도를 알지 못한 자카리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 보였지만, 비앙카의 만류대로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비앙카에 대한 소문은 당사자들이 입을 다물고 떡밥을 던지질 않으니 금방 푸시시 식어버렸다. 자카리가 살벌한 시선으로 연회장을 둘러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비앙카가 가만히 있으라고는 했지만 눈을 번뜩이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던 만큼, 자카리는 날 선 시선으로 연회석에 앉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그 눈길에 지레 찔린 이들은 하나둘 입을 다물었고, 곧 그들에 대한 화제는 음악과 다른 수다에 묻혔다.
그렇게 연회가 지속되는 와중, 남자들 사이에서 사냥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사냥은 귀족 사내들이 즐겨 하는 유희였다. 말을 몰며 사냥감을 쫓을 때만큼은 사내들의 가슴속에 영웅적 충족감이 치솟았고, 매를 키워 사냥에 참여하는 귀족 여인들 또한 신화 속의 여전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곤 했다. 비록 그들의 전적은 이상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사냥에 열광한 귀족들은 자신의 전적을 과장되게 설명했다.
“이제 곧 여름이 되면 전하께서 사냥 대회를 열지 않겠습니까. 기대되네요. 이번에는 꼭 늑대를 잡을 것입니다.”
“하하. 자작의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군요. 저도 질 수는 없지요. 늑대는 제 차지입니다.”
침을 튀기며 늘어놓는 포획물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과장하여도 자카리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저희가 늑대를 아무리 잡아대도, 이번 사냥에서 아르노 백작이 곰을 잡으면 끝나는 일 아닙니까.”
“그래요. 지난 사냥에서 아르노 백작이 무려 곰을 잡지 않았습니까. 백작이 바친 곰 가죽이 아직도 전하의 침실을 장식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요….”
대화는 자연스레 자카리에게로 흘러갔다. 자카리가 사냥감을 싹 쓸어 갈까 앞서 걱정하는 이들의 웃음이 허허로웠다.
“하하. 아르노 백작께서 어느 정도 봐주시겠지요.”
“아이고, 이번에 토너먼트 보십시오. 백작 부인과 함께 왔다 하여 인정사정없이 상대를 쓰러트리지 않으셨습니까.”
또다시 대화가 비앙카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아까의 날 선 분위기를 잊지 않았는지, 사내들은 들뜬 분위기 속에서도 계속해서 자카리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그건 사내들에게 한정된 이야기였다. 지금껏 대화에서 슬며시 빠져 있던 여인들이 하나둘 비앙카에게 말을 걸었다.
“백작 부인은 사냥해 보신 적이 있나요?”
“아니요. 승마를 배운 지 얼마 안 돼서요.”
“어머, 승마는 교양이잖아요?”
귀족 부인 하나가 비앙카의 대답에 과장되게 깜짝 놀랐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비앙카는 그녀가 누구였는지 기억하지 못했지만, 비앙카의 시녀 이본느는 그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예전에 앙트를 마주했을 때 있던 귀족들 중 하나였다.
그녀는 볼네 자작 영애, 셀린느였다. 같이 있던 다른 귀족 여인들이 결혼한 것과 달리 아직 미혼이었던 그녀는 괜찮은 남자와의 로맨스를 꿈꾸며 수도에 올라왔다.
하지만 사내들의 관심은 모두 아르노 백작 부인에게 향했다. 차라리 비앙카가 오델리 왕녀만큼이나 아름다웠으면 덜 속이 상했을까. 셀린느가 보기에 비앙카는 전혀 특별한 점이 없었다. 단지 2왕자가 그녀에게 찝쩍이니, 그녀가 대단한 여자처럼 느껴진 사내들이 관성처럼 달라붙을 뿐이었다. 그녀의 사치스러운 옷차림도 부러웠다. 비앙카와 마주할 때마다 셀린느의 자존심이 팍팍 깎여 나갔다.
그리고 비앙카에게 반발심을 갖고 있는 건 셀린느뿐만이 아니었다. 셀린느가 터놓은 물꼬를 다른 여인들이 받았다.
“그러면 매도 키우지 않으시겠네요.”
“승마도 제대로 못하시면 매는 무리이지요.”
“이런…. 저희끼리 종종 매사냥을 가곤 하는데, 안타깝게도 아르노 백작 부인은 함께하지 못하겠네요.”
그들은 비앙카를 매를 키울 정도의 소양도 없다는 듯 후려쳤다. 다들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까르르 웃으며 비앙카를 흘끔였다. 이런 모욕에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채 분노로 벌게진 얼굴로 그들을 노려볼까? 아니면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구고 가녀린 척할까?
하지만 둘 다 아니었다. 비앙카는 심드렁히 포도주를 홀짝였다. 연녹빛 눈동자가 얼마나 무심한지, 그들의 대화를 못 들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오히려 남편인 자카리의 목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여인네들의 대화에 사내가 껴서 윽박지르는 것이 예의가 아니었던 만큼, 어찌해야 비앙카에게 폐가 되지 않으면서도 그녀를 변호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의 냉막한 얼굴 아래로 이가 악다물리는 게 느껴졌다.
비앙카는 포도주 잔을 들지 않은 손을 테이블 밑으로 내려, 자카리의 허벅다리를 토닥였다. 흥분한 개의 머리를 쓰다듬는 듯한 손길에, 팽팽하게 당겨진 허벅지가 조금 느슨해졌다.
비앙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비앙카를 몰아간 이들이 당황했다. 셀린느의 눈꼬리가 표독스레 올라갔다. 그녀는 비앙카의 틈을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집요하게 물었다.
“백작 부인은 취미가 무엇인가요?”
“부끄럽지만, 딱히 없답니다.”
“설마요. 귀족 여인이라면 취미 한두 개 정도는 있어야 하는 법 아닌가요?”
과장되게 소리 높여 호들갑 떠는 목소리에 비앙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누가 소문을 흘렸는지 차근차근 살펴볼 생각이었는데, 너무 노골적으로 제 존재를 나타내서 깜짝 놀랐다. 일이 번거롭지 않게 되어 한시름 던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
보아하니 볼네 자작 영애인 셀린느가 철없는 치기로 주축이 되어 말을 내던지면 길다드 남작 부인과 다른 이들이 말꼬리를 잡고 주렁주렁 매달려 가는 식이었다. 그들과 어울리는 다보빌 백작 부인, 카트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들 사이에서 작위로 들러리를 서 주고 있었다.
그들이 비앙카를 적대하는 것은, 아마 그들 모임에도 끼지 않고 다른 사교 관계도 맺지 않은 채 혼자 있는 그녀의 태도가 못마땅해서일지도 모른다. 비앙카로서는 그저 그런 사교에 신경 쓸 여유가 없을 뿐이었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비앙카가 혼자서 고결하고 깨끗한 척한다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하여 비앙카가 스트레스 받아 가며 그들과 어울릴 리 없으니, 이 관계가 그냥 완화될 리는 없다. 그러니 그녀가 나서는 수밖에.
비앙카는 어떻게 해야 그녀에게 효과적인 결과를 나타낼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며 여상히 대답했다.
“뜨개질하거나 자수를 놓으면서 시간을 보내요.”
“알뜰하시네요. 오늘 입고 오신 드레스도 직접 자수 놓으신 건가요?”
길다드 남작 부인이 비웃듯 말했다. 흔히 자수나 뜨개질은 귀족의 교양일 뿐, 취미로 삼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삯바느질로 먹고 사는 것도 아니고, 귀족 여인이 자신의 드레스를 직접 자수 놓았느냐 하는 것은 치욕이었다.
발끈할 만한 도발에도 비앙카는 무덤덤히 답했다.
“다행히 저희 가문 하녀들의 자수 솜씨가 꽤 좋답니다.”
“그러게요. 드레스의 자수가 정말 섬세하네요.”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걸 느낀 1왕자비가 어색하게 웃으며 끼어들었지만, 그러기가 무섭게 적대적인 발언이 득달같이 달라붙었다.
“금사를 쓴 건가요? 녹색 공단을 쓰셨고…. 한두 푼 하는 게 아닐 텐데.”
“매사냥할 돈을 전부 드레스에 투자했다 해도 믿겠어요.”
“저 정도 드레스라면 잘 키운 매 다섯 마리랑도 바꾸겠어요.”
일대다로 질문이 쏟아지는 상황. 평범한 이들이라면 주눅 들어 아무 말도 못 할 테지만, 비앙카는 되레 코웃음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