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01화 (101/192)

#101 승전 연회(3)

“결혼했을 때는 나이 차가 꽤 많이 나셨을 것 같은데.”

“아르노 백작도 이런 식의 기쁨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을 겁니다.”

“그러게요. 지금껏 세브랑의 장미라 불렸던 오델리 왕녀님의 칭호를 넘겨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시답잖은 대화. 오델리 왕녀를 아끼는 왕의 눈치가 보여 노골적으로 왕녀를 폄훼하지는 못했지만, 그 의도는 명백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명백히 비앙카보다 오델리 왕녀 쪽이 훨씬 아름다웠다. 벌꿀이 흐르는 듯한 금발, 깊은 눈매 아래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 우유 같은 살결은 크림 같았다. 앞으로 몇 십 년이 지나도 오델리 왕녀는 세브랑의 장미라는 칭호에 부족함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사내들에게 관심이 없었으며 도도했고, 조금의 틈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에게 구애했다가 냉정하게 쳐 내진 일로 앙심을 품고 있는 이들은 세브랑에 많디많았다. 그들이 오델리 왕녀보다 더 어리고 기품 있는 숙녀로서 비앙카를 치켜세우는 이면에는 오델리 왕녀의 평판이 낮아지면 조금이라도 손이 닿을까 하는, 사내들의 우습지도 않은 저열한 속셈이 도사리고 있었다.

비앙카는 그녀에 대해 시끄럽게 떠드는 이들 사이에서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오델리 왕녀는 이런 시시한 대화를 핑계로 비앙카에게 적대감을 품거나 할 만한 인사는 아니었지만, 비앙카 본인이 더 들어줄 수가 없었다. 과열된 분위기 속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만큼, 이쯤 해서 대화를 끊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 비앙카를 비웃듯, 그녀가 미처 입을 열기 전, 끼어들 찰나도 없이 이야기가 흘러갔다. 전혀 달갑지 않은 쪽으로.

“저 광대 또한 아르노 백작 부인의 찬란한 미모를 알아보았기에 이리 장미를 건넨 것 아니겠습니까.”

“아, 장미라 하니 자코브 왕자님도 토너먼트에서 아르노 백작 부인에게 장미를 건네셨지요. 혹시 평소에 알고 지내시는 사이이신지….”

그리 말한 사내는 바로 위그 자작이었다. 저 멀리 있던 위그 자작이 얼마나 큰 소리로 말했는지, 비앙카에 관한 화두에 관심 없던 이들의 시선도 모조리 비앙카에게 향했다. 모두의 관심을 끈 위그 자작은 비앙카를 흘끔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척추를 타고 소름이 쭈뼛 돋는 음흉한 미소였다.

비앙카가 위그 자작의 질문에 섞인 악의를 몰라볼 리 없었다. 무슨 꿍꿍이지. 비앙카가 미간을 찌푸리곤 반박하려 하였으나, 자코브가 능청스레 끼어들었다.

“하하. 그저 내가 숭배하고 있을 뿐이네. 백작 부인의 아름다움이 내 마음을 훔쳤지.”

위그 자작의 말을 받아치는 자코브의 얼굴은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마치 저에게 화살이 돌아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물론 자코브 왕자가 비앙카에게 장미를 건넨 일은 별거 아닌 것이 아니니 충분히 예상 가능한 화제였다마는, 비앙카는 본능적으로 자코브가 이 대화의 흐름을 주도했다는 걸 눈치챘다. 위그 자작과 알고 지내는 사이 같으니, 그에게 대화를 이쪽으로 몰도록 시킨 것이 틀림없었다.

비앙카는 속으로 자코브를 비웃었다. 그가 치근덕거리는 것에는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를 좋아하는 척 굴어서 자코브가 이득을 얻을 일이 무엇이 있을까. 하지만 그녀가 이성을 단단히 잡고 있는 한, 자코브의 속셈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자코브가 자신을 좋아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하는 만큼, 잘생긴 왕자의 달콤한 고백에도 비앙카의 이성은 차갑디차갑게 식어 있었다. 오히려 그녀를 집요하게 핥듯 바라보는 시선이 끔찍했다.

능청스러운 자코브의 말에 모두가 하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마냥 생각 없이 웃을 수만은 없었다. 아무리 궁중 연애가 유행이라고는 하나 비앙카의 남편, 자카리가 버젓이 그녀의 옆에 앉아 있는 상황이었다. 자카리의 눈치를 보는 그들의 웃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그 와중에 자카리는 폭풍의 눈처럼 고요하게 이 사태를 지켜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그의 무표정에 경솔하게 입을 열었던 이들은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하였을까 두려워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 생각 있는 이들은 자코브를 만류하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왕자님, 이제는 궁중 연애보다 후사를 남길, 결혼에 관심을 두시는 건 어떠합니까?”

“결혼은 무슨.”

“하지만.”

“다 큰 어른들의 관계인데, 무엇이 문제인가? 그녀만 좋다 하면 나는 즐기는 것만으로도 좋네.”

자코브는 도리어 목소리를 높였다. 궁중 연애가 아무리 공공연하다고는 하나 이렇게 연회석에서 소리 높여 말할 말은 아니었다. 게다가 서른을 넘긴 미혼의 왕족 사내라면 더더욱. 늙은 왕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왕은 언사에 신중해야 하는 법. 잘못 끼어들었다가는 영웅인 자카리의 심기를 거스르거나 카스티야에게 약점이 잡힐 수 있다. 왕은 괜히 구설수를 만드는 둘째 아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모두가 눈치를 보는 와중에, 지금껏 침묵으로 일관하던 자카리의 입이 떨어졌다. 목소리는 잔잔하고 고요했지만, 단어 하나하나가 쉬이 흘러 넘기기 힘들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탐하는 것은, 전장에서는 목을 몇 번을 내걸어도 부족한 일이지요.”

“여기는 전장이 아닌 수도의 왕성일세.”

“왕성 또한 다른 의미로 전장 아닙니까.”

자코브가 빙긋 웃으며 여유로운 척했지만, 자카리도 만만치 않았다. 자카리와 자코브의 시선이 맞부딪히며 파직파직 불꽃이 튀었다. 뿐만이랴. 자카리의 세 부장들도 주군이 모욕당했다는 생각에 눈을 부라렸다. 당장에라도 칼부림이 벌어질 것처럼 살벌한 분위기.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기 싸움에 연회장은 물을 끼얹은 듯 차게 식었다. 악사들도 자카리와 자코브의 눈치를 보다 보니 현을 튕기는 손이 늘어졌다.

“왕자님. 제 아내는 당신의 그런 접근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제 아내를 숭배하는 것이 맞기는 합니까? 당신의 그런 무신경한 말들이 제 아내를 괴롭힌다는 사실은 아십니까?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연애가 아닌 헛된 집착입니다.”

그리 되묻는 자카리의 얼굴은 지나치게 매끈하였고, 목소리는 담담했다. 감정을 파악하기가 힘든 모습이었지만, 분명 틈은 있었다. 그의 분노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곳은 바로 탁자 밑으로 꽉 쥔 주먹이었다.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손등에 핏줄이 투둑투둑 튀어 올랐다. 자코브와 비앙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도 싫어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런 자카리가 걱정되었던 비앙카가 손을 뻗어 그의 손등을 살며시 쓸었다. 손등에 닿는 부드러운 살갗의 온기에 진정이 되었다가도, 도리어 열이 뻗쳤다. 자카리는 이 손결이 맨 살갗에 닿아 오는 느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느낌을 다른 이와 공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만으로도 화가 치솟았다.

어젯밤 이후로 그들은 반론조차 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부부 사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자카리는 초조했다. 마음에 여유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오히려 갈증이 더 일고 조급해졌다.

자코브에게 잘난 듯 말하기는 했지만, 집착 어린 질투를 하는 건 자카리 쪽이었다. 다만 자카리의 집착은 남편이라는 명분이 있는 집착이라는 것 정도가 다를까. 그렇게 비앙카의 시선 하나에도 목이 타는 자카리가 비앙카에게 눈독 들이는 자코브를 마음에 들어 할 리 없었다. 자카리는 신경 줄이 바싹바싹 타오르는 고통을 감내하며 분노로 눈을 새파랗게 빛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일촉즉발로 치달았다. 늙은 왕이 나서기엔 너무 사소한 문제였고, 그렇다 하여 그대로 덮어 둘 만큼 가벼운 사안도 아니었다. 결국 1왕자 고티에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하하. 자코브가 여인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처음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래서 거리 조절을 잘 모르는 듯싶네 그려. 그대나 백작 부인을 모욕할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니, 아르노 백작이 너그러이 이해해주길 바라네.”

고티에는 분위기를 무마시키려 노력했다. 자카리와 자코브 둘 다 서로가 못마땅했지만 1왕자가 이렇게까지 나섰는데 그의 노력을 귓등으로 들을 수는 없었다. 자카리는 무뚝뚝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코브는 입을 다무는 것으로 대화를 종식시켰다.

하지만 화제 자체는 여전히 비앙카에게 머무르는 채였다. 고티에 왕자가 나선 데다 방금 전까지 살벌했던 분위기가 있었던 만큼 대놓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는 없었지만, 서로 수군거리며 화제를 이어 갔다.

“…하지만 뭔가 있으니까 둘째 왕자님도 저러시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고 보니 호위기사와도….”

“그 시녀에게 장미를 건넨 호위기사 말인가요? 시녀에게 장미를 건네 놓고, 백작 부인과 그런 사이라구요?”

“그러면 다른 호위기사일 수도요.”

소문이 소문을 불러일으켰다. 비앙카는 귓가에 속삭이는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목소리들 가운데 자신이 가스파르와 부도덕한 관계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코웃음 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가 ‘저’ 가스파르랑?

아까 자코브와의 관계를 의심받았을 때는 아르노 백작가 모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이번에는 모두 어처구니가 없는 실소를 흘렸다. 당사자인 가스파르만이 미약하게 미간을 찡그릴 뿐, 그에게 고백받은 이본느조차 웃음을 참지 못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