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00화 (100/192)

#100 승전 연회(2)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의 인사를 받고 스쳐 지나가려는 찰나, 자카리는 소뵈르에게서 미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자카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소뵈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는 기시감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옷,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하하. 백작님 옷이었으니 당연하지요.”

“내 옷?”

자카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어찌 된 일인지 알고 있는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에 자카리는 더더욱 어리둥절해질 뿐이었다.

소뵈르는 가슴을 활짝 펴며 자랑스레 말했다.

“네. 수도에 오면서 마님께서 버린다고 내놓은 옷 있잖습니까. 그때 그 옷을 마님께 냉큼 들고 가서 허락받았지요. 로베르 요놈한테 안 뺏기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아십니까?”

“안 뺏어. 내가 넌 줄 알아?”

로베르가 툴툴댔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소뵈르의 옷을 보는 시선엔 부러움이 그득하였다. 좋은 옷을 공짜로 얻게 된 것이 부럽다기보다는, 자카리를 숭배하는 기사로서 성물을 빼앗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로베르의 마음에 불을 지피듯, 소뵈르는 희희낙락 옷을 자랑했다.

“하여간 지금껏 아껴 두긴 했는데, 오늘 같은 날은 입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자카리도 픽 웃어넘겼다.

이전이었다면 비앙카가 소뵈르에게 제 옷을 건네주었다는 사실에 질투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나, 지금의 자카리는 그런 일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넓은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 있었다. 자신의 옷은 비앙카가 직접 골라 준 것이고, 그녀가 솎아낸 옷은 비앙카의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이라는 뜻 아닌가.

비앙카의 마음에 들지 않는 옷 정도야 얼마든지 소뵈르에게 줄 수 있었다. 생각의 여유가 생긴 자카리는 이 일을 너그러이 넘겼다.

자카리와 비앙카가 선두로, 아르노 가문이 연회장에 들어섰다. 자카리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고, 위풍당당한 그의 등장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세브랑 왕가의 사람들은 연회석 한가운데에 나란히 앉아 있었고, 그 오른쪽으로는 세브랑의 귀족들이, 왼쪽으로는 카스티야에서 온 사절단이 앉아 있었다.

아르노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태피스트리는 왕가의 테이블에 제일 가까운 위치에 배치되어 있었다. 최고 서열의 귀족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였는데, 백작에 전쟁 영웅, 그리고 이번 토너먼트의 승리자이기에 당연한 자리 배치였다.

자카리의 이복형인 위그 자작은 테이블의 끝, 입구 근처에 앉아 있었다. 어찌어찌 연회에 초대받을 정도이기는 했다만, 주류 사회에 끼기엔 세가 약했다. 자카리가 중앙으로 가는 모습을 보는 위그 자작의 눈동자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속속히 사람들이 도착하고 제일 마지막, 세브랑의 왕이 연회장의 문을 닫으며 들어섰다. 왕이 들어서자 연회장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서 왕을 맞이했다.

늙은 왕은 화려한 왕좌에 앉아 좌중을 둘러보았다. 노쇠하였으나 흔들림 없는, 위엄이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모두가 고요히 숨을 죽이고 그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오늘의 연회는 토너먼트의 승자를 기리고, 나의 손자 알베르와 카스티야의 왕, 가르시야의 딸 나바라 왕녀의 약혼으로 인한 두 나라의 동맹을 축하하기 위함이니, 모두가 잔을 들고 이 기쁨을 나누도록 하게.”

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포도주를 담당하는 시종이 테이블을 오고 가며 사람들의 빈 잔에 포도주를 채웠다. 모두의 잔에 포도주가 담기자, 늙은 왕은 잔을 치켜들며 외쳤다.

“세브랑과 카스티야의 영원한 우정을 위하여!”

“위하여!!”

모두가 후렴을 따라 외치고는 포도주로 목을 축였다. 축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악사들이 노래를 연주했고, 시종들이 줄줄이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하얀 천이 깔려진 탁자 위에는 고기와 치즈를 썰 수 있는 도마가 있었고, 그 뒤에는 개인용 식기가 담긴 배 모양의 식탁 배가 놓여 있었다.

연회 음식은 훌륭했다. 호박 수프, 다진 고기를 채워 넣은 꿩, 적포도주를 가미한 멧돼지 고기. 버터를 아낌없이 쓴 노루의 넓적다리 고기, 새끼 염소 고기 파이, 토끼 고기 스튜, 무화과 파이, 우유 젤리, 아몬드 유를 첨가한 사과 무스, 꿀을 가미해 구운 자두, 누가 과자….

수많은 음식 가운데 군계일학은 단언컨대 깃털로 장식한 백조 고기였다. 새하얀 깃털로 장식하여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부리와 발에 금가루까지 발라 놓아 그 화려함이 어마어마했다.

고리 손잡이 물병, 세공 그릇, 호리병 등 사소한 것에도 모두 금을 입혀 놓아 식탁 위가 휘황찬란했다. 해상 왕국인 카스티야에도 귀한 특산물이 많이 있겠지만, 금은 세브랑의 특산물이었다. 이토록 많은 금장식은 처음인지 카스티야의 사절단의 입이 떡 벌어졌다.

식사 시중단이 탁자 사이를 오고 가며 귀족들의 앞에 놓인 도마에 고기를 잘라 주었다. 왕의 식탁 시중을 총관리하는 시종장이 다음에 나올 요리들을 소개할 때마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연회가 무르익음에 따라 악사들의 연주 또한 절정에 달했다. 연회장의 가운데에서는 광대들이 재주넘기와 마술로 분위기를 띄웠다. 페르낭 또한 연회장에 있었는데, 악사가 아닌 마술사로서였다.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페르낭은 여자를 꾈 때 저런 마술 같은 것으로 환심을 샀고, 그건 비앙카에게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동전을 팔에서 숨겼다가 귀에서 꺼내는 등의 마술을 펼쳐 보였다. 페르낭이 입으로 삼킨 돌 대신 장미꽃을 꺼내자 모두가 신기함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비앙카는 그저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박수만 쳤다. 그 모습을 보고 비앙카가 정말로 마술을 신기해한다고 착각한 자카리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마술에 흥미가 있으면 그대가 심심할 때 우리 영지로 종종 마술사를 불러도 되오.”

“아뇨, 별로 흥미 없어요.”

비앙카는 딱 잘라 말했다. 예전의 비앙카였다면 눈앞에서 펼쳐지는 마술에 잔뜩 고무되었을 테지만, 지금의 그녀는 마술이라면 질색이었다. 비앙카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비앙카의 속내를 어떻게 짐작한 것인지, 페르낭이 마술로 꺼낸 장미꽃을 비앙카에게 건넸다. 다들 비앙카를 부러워했지만, 비앙카는 그저 역겨울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장미를 받는 비앙카에게 페르낭이 은근한 추파를 던졌다. 비앙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뒤늦게 이미지 관리를 위해 얼굴에 도사린 혐오를 지우려 노력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비앙카는 짜증스레 장미를 테이블 저 구석으로 던졌다.

사람들의 생각이야 어떠하든, 자카리는 그런 비앙카의 모습을 흡족하게 지켜보았다. 페르낭이 비앙카에게 장미를 건네러 다가오는 순간부터 자카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행히도 애초에 무뚝뚝한 표정 덕에 그의 불쾌감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비앙카가 받은 장미를 내팽개치기가 무섭게 자카리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스미니, 결국 그가 페르낭의 접근을 불편해했다는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결국 표정 관리에 실패한 것은 부부가 마찬가지였다.

페르낭은 그 뒤로도 계속해서 비앙카를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비앙카가 장미를 던진 것도 튕기는 것, 혹은 자카리의 눈치를 봐서 과장되게 군 것이라 단단히 오해한 것이 얼굴에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렇게 착각 속에서 살 수 있을까? 내가 지금 내 남편을 곁에 두고, 비리비리한 멸치 같은 음유시인한테 관심을 줄 거라고, 정말 진심으로 생각하는 걸까?’

비앙카는 혀를 찼다.

어젯밤, 그녀를 끌어안던 단단한 자카리의 몸을 떠올리니 얼굴에 열이 올랐다. 물론 전생의 그녀는 자카리를 두고 그 비리비리한 멸치에게 관심을 줬지만, 그때의 일을 누구보다도 후회하는 것도 그녀였다. 비앙카는 페르낭이 있는 연회장 한가운데로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식탁에 코를 박은 채 음식을 입으로 욱여넣었다.

과식하는 그녀의 모습에 자카리가 걱정스레 만류했다.

“천천히 드시오. 여기, 포도주를 더 채워 주게.”

자카리가 손수 시종을 불러 비앙카의 잔에 포도주를 채웠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귀족 하나가 감탄과 함께 넌지시 말을 걸었다.

“아르노 백작이 이렇게 다정한 남편이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백작 부인에게 무척 다정하시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토너먼트에서도 무척 로맨틱했습니다. 백작께서 그런 낭만을 아시는 분이시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지요.”

“백작 부인이 아름다우시기 때문일까요. 지금껏 아르노 백작이 영지에 꼭꼭 숨겨 둔 것이 이해가 되는군요.”

다들 누군가가 물꼬를 터 주기만을 기다린 듯, 비앙카가 화두에 오르자 대화의 흐름이 빨라졌다.

비앙카는 이번 연회에서 제일 주목받는 이였지만 정작 본인은 이 상황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자신의 외모가 그들의 말과 달리, 딱히 찬란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 만큼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본인의 외모는 본인이 더 잘 안다. 그들이 비앙카를 과하게 치켜세우는 것은 단지 그녀가 수도에 처음 얼굴을 내비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저 찬사를 위한 변명을 가져다 대고 있을 뿐이었다.

왜? 다름 아닌 그녀를 위시함으로써 오델리 왕녀를 깎아내리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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