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여보라 불릴 만한 관계(7) / 승전 연회(1)
비앙카가 불행하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비앙카는 지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사랑하는 상대와의 다정하고도 격정적인 정사. 게다가 사랑하는 상대는 그 누구도 아닌 그녀의 남자였다.
다만, 그 행복의 크기만큼 미래에 떨어져 내릴 절망과의 격차가 크나클 것이 두려울 뿐이었다.
어젯밤, 떨어져 있던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멀리서 뱅글뱅글 도는 채였다. 자카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면 좀 나을까. 하지만 비앙카는 차마 자카리의 진심이 무엇인지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여기서 용기를 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카리가 자신을 좋아한다 섣불리 확신하였다 배신당하는 것을 경계하였다면, 이제는 자카리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아이러니했다. 혹시나, 싶었던 것이 설마 하는 마음이 되기까지는 눈 한번 깜빡이는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비앙카의 마음속이 울렁였다. 이제 그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일희일비하게 될 테지…. 지금의 관계로 만족하지 못해 자카리에게 사랑을 갈구하게 되고, 그가 전쟁에 나가면 외로움에 진저리 칠 것이며, 그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기라도 하면 들끓는 질투로 몸을 태울 것이다.
페르낭에게 홀렸던 자신이 얼마나 대책 없었는가를 생각하면 정말 참담했다. 아마 그녀는 똑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다. 인간은 쉽사리 변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반복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을 테지. 바뀌려 발버둥 쳐 봤자 그대로인 자신을 깨닫고 절망할 것이다.
그나마 자카리가 책임감 있는 사내라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가 약조한 대로, 그에게는 그녀밖에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이 주는 안도감은 엄청났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그저, 비앙카가 눈을 감고 외면한 결과일 뿐이다. 그녀에게 닥쳐올 미래. 결정적으로 그녀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 다름 아닌 자카리의 죽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옥죄는 느낌에 숨이 틀어 막혔다.
그래. 자카리의 진심, 혹은 스스로의 질투 따위를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비앙카는 머리를 틀어쥐었다. 그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 그를 살려야만 했다. 자카리가 비앙카를 사랑하든 말든, 비앙카가 그를 사랑하기에.
그 순간, 번개처럼 비앙카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내가 회귀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일지도 몰라.’
회귀한 뒤, 비앙카는 단 한 번도 도대체 왜 자신이 회귀를 한 것인가 궁금해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신이 자신을 가여이 여겨 기회를 줬다고 생각했을 뿐….
하지만 하필 비앙카, 그녀란 말인가? 혹시 비앙카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녀가 회귀한 뒤로, 제일 크게 바뀐 일은 바로 자카리와 관련된 것이었다. 말 한마디 제대로 섞은 적이 없는 과거와 비교하면 경천동지할 정도로 뒤바뀐 현실.
‘내가 회귀한 건…. 자카리를 살리기 위해….’
비앙카의 추측이기는 했지만, 그럴듯했다. 명쾌한 답이라기엔 아직 석연찮은 점이 많았지만…. 그러니까, 자카리를 구하기 위해 회귀한 사람이 굳이 비앙카 그녀일 이유 같은 것들.
하지만 비앙카 그녀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드레스를 고르고, 집 안을 꾸미고…. 이런 것으로 어떻게 자카리를 구한단 말인가?
머리가 복잡했던 비앙카는 어깨가 잠기도록 물속에 몸을 담갔다. 목욕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장미가 그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비앙카는 부루루, 작게 공기 방울을 내뿜었다. 올라오는 공기 방울에 자신의 답답함을 실어 내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뭔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자카리와의 관계도 바뀌었고, 아버지와의 오해도 풀었다. 그렇다면, 자카리의 죽음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속으로 눈물을 삼킨 비앙카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 눈을 빛냈다.
* * *
몸을 씻은 비앙카는 이본느의 손길 아래 바지런히 몸을 단장했다. 연회가 열리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해야 할 게 많았다.
이본느는 비앙카의 흰 몸에 울긋불긋하게 남은 자카리의 입술 자국을 노려보았다. 얼마나 물고 빨았는지, 드레스로 미처 가려지지 않는 곳까지 알뜰하게도 남겨 두었다. 울혈에 좋다는 약초를 피부에 문대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다. 갖은 노력 끝에, 분칠을 하는 것으로 타협을 볼 수밖에 없었다.
오늘 비앙카가 입을 드레스는 녹색 공단 드레스였다. 금사로 촘촘히 덩굴무늬가 수놓아진 천은 빛을 받는 방향에 따라 무늬가 드러나기도 하고 감춰지기도 했다. 드레스에는 진주가 촘촘히 장식되었는데, 목걸이 다섯 개는 만들고도 남을 만큼의 양이었다.
“마님. 백작님께서 한 시진 뒤쯤 오신다 합니다.”
“아, 가스파르 경.”
가스파르가 와서 자카리의 말을 전했다. 그러고 보니 가스파르가 4승에 오른 뒤 처음 마주하는 것이다. 그래도 호위 기사인데 그의 승리에 대해 축하 한 마디 못했다니. 비앙카는 미안함을 담아 덧붙였다.
“4강을 축하하네. 좋은 경기였다 생각하네.”
“…감사합니다.”
패배하기는 했지만 상대의 실력은 진짜였던 만큼 후회 없는 시합이었다. 가스파르는 비앙카의 공치사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본느가 보석함을 가져왔다. 오늘 장신구는 블랙 오팔로 통일했다. 보석 안을 가득 메운 빛 파편이 온갖 현란한 색으로 반짝였다. 허리춤에는 금으로 반짝이는 허리띠를 매고, 위에는 레이스로 짜인 새하얀 로브를 걸쳤다.
그동안 가스파르는 비앙카의 방 한구석에 서 있었다. 오늘도 비앙카가 준비를 끝마칠 때까지 대기할 생각인 것 같았다. 비앙카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가스파르의 옷차림을 보며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그대도 오늘 연회에 참석해야 할 텐데, 준비하지 않아도 되나?”
“괜찮습니다.”
그걸로 끝. 무뚝뚝한 가스파르의 답에 비앙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도 말수가 적어서야. 이본느 네가 고생이 많겠구나.”
“놀리지 마세요, 마님.”
비앙카에게 로브를 걸쳐주던 이본느의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아니라 하지는 않는 걸 보니, 두 사람의 사이가 제법 긍정적으로 진척된 모양이었다. 비앙카는 놀리는 대신 미소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이본느가 열심히 애써 준 덕분에 비앙카는 늦지 않게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가스파르를 통해 전한 대로, 자카리는 시간에 맞춰 비앙카를 데리러 왔다.
“데리러 왔소, 비앙카.”
오늘의 연회는 토너먼트의 승자, 즉 자카리 그를 기리기 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대로 두면 아무렇게나 차려입을 테니, 비앙카가 미리 골라 둔 옷이 있었다.
탄탄한 몸의 실루엣이 드러나는 암녹색 푸르푸앵. 비앙카의 드레스와 맞춰 덩굴무늬가 은사로 수놓아져 있었고, 은색 단추가 촘촘히 그의 옷깃을 여몄다.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가죽 장화에도 은색 단추가 장식되어 있었다. 검은 망토를 왼쪽 어깨에 걸치고 고정하는 은사를 오른쪽 팔뚝 밑으로 고정한 그의 모습은 비앙카가 기대한 그대로였다.
“근사하네요. 옷을 골라 둔 보람이 있어요.”
비앙카는 자카리의 옷매무새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비앙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카리의 눈매는 깊디깊었고,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매끈하게 넘겨 드러난 이마에서 콧대로 이어지는 선이 조각 같았다.
“그대도 아름답소. 몸은 좀 어떠시오?”
“괜찮아요.”
비앙카가 살짝 웃었다. 처음 그와 마주할 때는 어색한 긴장감으로 가슴이 쿵쿵였는데, 지금은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자카리가 손을 내밀었다. 비앙카는 그 위에 닿을 듯, 말 듯 살짝 손을 얹었다. 손바닥을 스치는 듯한 느낌. 그 순간, 덫이 사냥감을 무는 것처럼 자카리의 손가락이 비앙카의 손을 와락 쥐었다.
손바닥에 맞닿은 그의 온기. 그녀를 지지해주는 단단한 그의 몸. 그녀의 보폭에 맞춰 걷는 자카리의 곁에서 비앙카는 머리를 꽉 채운 생각을 하나씩 덜어내었다.
일단 오늘 하루는 미래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와 같은 복잡한 일에 신경 쓰지 말자.
안 그래도 귀족 모두가 모이는 연회였다. 게다가 우승자인 자카리에게 이목이 집중될 것이 뻔한 만큼, 비앙카가 흠 잡힐 일을 해서는 안 되었다. 정신 단단히 차려야지. 슬며시 미소 지은 그녀의 뺨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느새 연회장의 입구에 다다랐다. 자카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연회장 입구에서 소뵈르와 로베르가 그들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백작님, 마님.”
비앙카를 반기는 소뵈르의 만면에는 미소가 그득했다. 자카리와 비앙카가 첫날밤을 치른 것을 가신들이 모를 수는 없는 법이었다. 백작님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앓는 이 같던 문제가 단숨에 해결이 되었으니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로베르 또한 어색하긴 해도 이전처럼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하진 않았다. 비앙카가 얌전히 장미를 받아준 게 그렇게도 충격적이었는지, 고개를 꾸벅이는 그의 얼굴은 아직도 얼떨떨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