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여보라 불릴 만한 관계(3)
그의 입술이 뺨에서 미끄러져 턱을 타고 목덜미로 내려왔다. 목걸이를 하지 않은 투명한 목덜미가 그의 입술 아래 놓였다. 마치 늑대가 고기를 탐색하는 듯한 긴장감. 여린 피부에 살짝살짝 닿아 오는 그의 단단한 입술의 감촉에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잔뜩 긴장한 채 몸을 뻣뻣이 굳혔다.
자카리는 그렇게 비앙카에게 낙인이라도 찍듯 입술을 내리누르며, 손으로 비앙카의 치맛단을 헤집었다. 다리에 휘감긴 넉넉한 천 자락을 헤치고 자카리의 손이 비앙카의 허벅다리에 닿았다. 손바닥에 닿아 오는 부드러운 살결에 취할 것 같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옷을.”
탁한 목소리가 귓가 근처에서 바로 들리니 비앙카는 자신도 모르게 허벅지 사이에 힘이 들어갔다.
“벗겨도 되겠소?”
그새 자카리의 손이 비앙카의 허리로 옮겨져 있었다. 비앙카의 금장 허리띠는 끌러진 지 오래였고, 옷은 흐트러질 수 있는 만큼 흐트러져 있었다. 비앙카는 부끄러운 심정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퉁명스레 대꾸했다.
“안 벗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카리에게 등을 보이며 뒤돌아 앉았다. 대담하게 나서기는 했지만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시야에 자카리가 보이지 않는다 하여 그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움직이는 게 느껴질 때마다 비앙카의 몸이 흠칫흠칫했다.
비앙카는 항시 시중들어 주는 이가 대기하고 있는 귀족 여인이다 보니, 드레스의 여밈 단추는 등 뒤에 있었다. 비앙카의 긴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쓸어 넘겨 그녀의 등을 드러낸 자카리는 제 손가락에 비해 지나치게 자잘한 단추를 끌러 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어찌나 쩔쩔매는지 비앙카가 다 머쓱할 정도였다. 자카리의 가벼운 옷차림과 달리, 비앙카는 꽁꽁 싸맸다 해도 좋을 정도로 정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첫날밤을 명시했는데도 이런 옷차림을 하고 있는 모습이 그를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비쳐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비앙카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제가 너무 차려입어서….”
“아니. 이 정도가 딱 좋아.”
자카리는 집중한 채 중얼거렸다. 서투른 손길로 한참을 노력한 끝에야 그는 비앙카의 마지막 단추를 끌러 내었다. 그제야 자카리는 탄식과 함께 느릿하게 끌고 있던 말을 농담처럼 이었다.
“조금만 더 흐트러진 모습이었다면, 내 그대에게 양해를 미리 구할 수조차 없지 않았겠소?”
자카리는 여상스레 건넨 말이었지만 비앙카에게는 달랐다. 비앙카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리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실크로 된 비앙카의 옷이 미끄러지듯 그녀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둥근 어깨와 도드라진 날개 뼈가 그늘 속에서도 희게 빛났다. 그녀의 어깨 위로 고동빛 머리카락이 몇 가닥 드리우자, 자카리는 목이 타는 듯 끙, 낮게 신음했다.
드레스 밑에 차려입은 쉥즈도 흘러내리고, 비앙카는 오래지 않아 알몸이 되었다.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이불을 끌어당겨 가슴팍을 가렸다. 미처 부풀지 않은, 성숙하지 못한 가슴을 자랑스레 드러낼 만큼 자신의 몸매에 자신감이 있지는 않았다.
자카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옷을 벗었다. 항시 누군가가 시중들어야지만 옷을 입고 벗을 수 있는 비앙카와 달리, 전장에서 살다시피 하는 자카리는 모든 것을 제 손으로 스스로 하는 편이었다. 힘겹게 비앙카의 옷을 벗겨내던 것과 달리, 능숙하고도 다급한 손길로 제 옷을 벗어 던졌다.
근육으로 빼곡히 짜인 자카리의 상체가 비앙카의 앞에 드러났다. 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남신 같은 완벽한 남체. 누구나 다 칭송해 마지않을 것 같은 강인한 육체에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가 바지를 내렸다. 왜인지 모르게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당황한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 그녀를 달아오르게 했다. 보이는 것도, 보는 것도 부끄럽다.
육체는 처녀일지언정 정신은 처녀가 아님에도 이렇게 부끄러운 이유가 무엇일까.
페르낭과는 주로 옷을 입고 관계했고, 자카리와 관계할 때는 항상 밤중에 불이 전부 꺼져 있었다. 게다가 전생의 비앙카는 그의 것을 보기 싫어하며 피했고, 대놓고 보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이런 노골적인 상황이 당황스러운 것이겠지. 나름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한 비앙카는 떨리는 목소리로 요청했다.
“불을 꺼 주세요.”
“안 되오.”
불을 끄는 것 정도야 흔쾌히 들어줄 거라는 비앙카의 생각과 달리, 자카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거절당할 거라 생각지 못한 비앙카가 얼떨떨하니 자카리를 바라보자, 옷을 전부 벗어낸 자카리가 비앙카에게로 다가오며 답했다.
“나는 그대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소.”
비앙카는 자카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비앙카의 기억 속 첫 관계는 어둠 속에서, 침묵과 함께 진행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촛불의 미약한 빛, 조금이나마 나누는 대화. 남들은 별거 아니라 할 수도 있는 사소한 차이점이었지만, 비앙카에게는 그 간극이 너무나 컸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변화가 생긴 걸까?
생각해 보면 지금껏 비앙카가 그리도 합방하자 말하였음에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던 자카리다. 그의 등을 떠민 것은 과연 무엇일까. 토너먼트의 열기? 비앙카가 건네준 손수건 한 조각?
둘 다 맞았다. 기실, 자카리의 돌발 행동은 그가 지금껏 억눌러 왔던 질투가 한계에 다다름과 동시에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오른 사랑 때문이었다.
그러나 질투와 사랑 둘 다 비앙카의 예상 속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질투와 사랑 둘 다 지금의 자카리의 마음속에만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앙카가 회귀하기 전의 자카리의 마음속에도, 그것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회귀 전의 자카리가 비앙카에게 받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냉대뿐이었다. 제대로 대화를 하지도 않으니 서로의 속마음을 몰랐고, 실제로 대화를 한다 하여도 당시의 비앙카가 갖고 있는 뿌리 깊은 적대감에 튕겨져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자카리는 입을 꼭 다물고 비앙카의 주변을 맴돌며, 어쩔 수 없는 순간에만 다가오는 것으로 비앙카에 대한 배려를 대신했다. 물론 비앙카의 거절이 두려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의 자카리는 없으니 비앙카가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저 자카리의 본심을 전혀 짐작도 못 한 채 헛발질 어린 추측을 계속할 뿐이었다.
솔직히, 비앙카가 정말로 그 답을 알기 위해 추측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러 다른 곳에 집중하여 이 상황의 부담감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서였지만, 비앙카의 딴생각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자카리가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모든 감각이 자카리를 향했고, 결국 애써 모르는 척하려던 시도는 물거품이 되었다.
“그대는 작은 새 같아.”
침대에 오른 자카리가 비앙카의 목덜미 뒤를 가볍게 쥐며 엄지로 그녀의 뺨을 쓸었다. 얼마나 힘을 주어야 하는지 파악하지 못한, 어설픈 손짓이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다칠 것 같거든.”
비앙카는 이불을 더욱 끌어당겨 가슴팍을 가리며 중얼거리듯 답했다.
“…실망하실 거예요.”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자카리는 엄격할 정도로 딱 잘라 말하며 비앙카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비앙카의 뒷목을 잡고 있는 그대로 그녀를 침대 위로 조심스레 뉘이며, 그 위로 쓰러지듯 겹쳐졌다. 이불은 움직임에 밀려 사라졌고, 살과 살이 맞닿았다.
처음은 입술부터 시작했다. 새가 모이를 쪼는 듯한 가벼운 입맞춤은 그녀의 쇄골을 지나 가슴으로 향했다. 비앙카가 실망할 거라 했던 말과 달리, 실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카리의 입술이 비앙카의 가슴에 닿았다.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자카리의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도자기를 빚듯 비앙카의 몸을 쓸어내렸다.
자카리는 정도에 가까울 정도로 단계를 밟아 나갔다. 전희에 성실한 것은 여전했다. 과거에도 그는 지나칠 정도로 비앙카를 몰아붙였다. 정작 그녀는 민달팽이가 기어가는 것 같은 기분에 몸서리치며 거부했기에 그만두게 되었지만….
과거에는 그리도 소름 끼치던 느낌이, 지금은 미묘한 열기가 되어 그녀의 몸에 흔적을 남겼다. 척추 끝부터 지릿지릿하는 기분이 들며, 달아오르는 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비앙카는 초조하게 이불을 그러쥐었다.
자카리의 손이 비앙카의 허리를 가볍게 움켜쥐었다. 허리가 들리는 느낌이 들더니 어느새 그녀의 다리 한쪽이 자카리의 허벅지 위에 얹혀졌다. 자카리의 손이 허벅지를 주무르더니, 다리 틈 사이로 손가락을 뻗었다. 거친 손가락의 낯선 감촉에 비앙카는 허벅다리를 오므리려 했지만 자카리의 단단한 팔에 가로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