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토너먼트(21) / 여보라 불릴 만한 관계(1)
아까 화사하게 미소 지었던 것이 거짓말처럼, 자카리는 다시 딱딱한 얼굴로 돌아왔다. 비앙카가 손부채질을 하며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히는 동안, 자카리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 침묵하였다.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금방 결정을 내린 그가 결연하게 입을 떼었다.
“그때 말했던 것, 아직도 유효하오?”
“무, 무슨 말이요?”
“나의 후계자를 갖고 싶다, 했던 말 말이오.”
“당연하지만….”
갑작스럽다 못해 뜬금없는 질문에 비앙카는 떨떠름히 답했다. 입맞춤만으로도 그녀의 머리는 포화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유효? 후계자? 비앙카는 멍하니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자카리도 비앙카를 지긋이 바라보며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이더니,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밤, 내 그대를 찾아가겠소.”
“네?”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비앙카가 반문했지만, 자카리는 답을 주지 않은 채, 희미한 미소만을 남기고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말 위에서 균형을 잡은 그가 고삐를 당기며 살짝 박차를 가하자, 자카리의 흑마는 총총 비앙카에게서 멀어졌다.
비앙카는 혼자 남았지만, 아직도 그녀의 코끝에는 가죽과 쇠 냄새가, 입술에는 자카리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비앙카는 멍하니 자카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가 건넨 황금 장미를 저도 모르게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차가운 황금의 감촉이 그녀의 달아오른 입술을 식혀주었지만, 거세게 타오르는 마음마저 식혀주지는 못했다.
* * *
그날은 라호즈의 모두가 하루 종일 자카리의 승리에 대해 떠들어대기 바빴다. 역시 아르노 백작을 상대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아라곤 왕국과의 전쟁도 머지않아 종식될 거라 입을 모았다. 지금껏 다들 태연한 척했지만 오래 지속되는 전쟁에 대해 불안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던 불안함이 이번 토너먼트에서 보여준 자카리의 절대적인 무용으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그리고 자카리의 무용담만큼이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은 바로 황금 장미의 주인, 비앙카였다. 지금껏 우승자가 숭배하는 레이디에게 입을 맞춘 일이 없던 것은 아니나,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자카리 드 아르노가 아니던가. 낭만, 혹은 궁정 연애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가 그런 행동을 취했다는 사실에 호사가들은 모두 그들 부부의 로맨틱한 관계를 추측하려 애썼다.
게다가 수도에 온 뒤로 계속해서 침대에 누워 있느라 두문불출한 덕분인지, 그녀에 대한 많은 것들은 베일에 쌓여 있었다. 그것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부추겼다. 게다가 자카리가 비앙카에게 건넨 생소한 손수건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그녀의 성격이 얼마나 못됐는지, 백작이 그녀라면 진저리를 친다느니 하는 뜬소문만큼은 무성하였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녀와 제대로 대면했다는 이가 없었고, 토너먼트에서의 자카리의 행동과 모순되는 만큼 완벽히 믿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비앙카에 대해 수군대는 동안, 소문의 주인공, 비앙카는 그날 하루 종일 초조함에 방 안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비앙카는 이본느조차 내보내고 방 안에 홀로 콕 틀어박혀, 토너먼트에서의 일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후계자, 그리고 오늘 밤.
자카리의 입에서 먼저 나올 거라고는 절대 생각지 못한 단어들이었다.
그녀가 감정을 자각하기가 무섭게 휘몰아친 일들, 풍랑에 휩쓸린 듯한 상황 속에서 비앙카는 애써 침착하려 노력했다. 어쩌면 자카리는 오늘 합방하자는 의도로 한 말이 아닐 수도 있다. 지금껏 비앙카의 합방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온 그가 아니던가. 그냥 후계자에 대해 슬슬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는, 그런 대화를 나누기 위해 찾아온다는 이야기일 게 뻔했다.
가을에 아르노 영지로 돌아가게 된다면 곧 겨울이고, 그 뒤에 그녀는 열여덟이 된다….
그래. 섣불리 앞서 생각하지 말자. 설레발로 괜히 기대하는 기색이라도 보였는데 그게 아니라면, 그 무슨 쪽팔림인가.
하지만…. 비앙카는 머뭇거렸다. 이성은 아니라 하지만 그녀의 본능이, 자카리와의 입맞춤 이후 나눈 교감이 신호를 보냈다. 착각이라 쉬이 넘길 수 없는, 그녀의 몸을 옭아매는 듯한 이끌림.
그 때문일까.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평소보다 오랫동안 몸을 씻었다. 장미유를 섞은 물에 얼마나 오래 담그고 있었는지, 씻고 난 그녀의 몸에는 짙은 풀 내음 섞인 장미향이 스며들어 있었다.
“…머리 아파.”
비앙카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머릿속이 복잡한 데 당장 해결책이 없다 보니 답답함만이 남아 그녀의 머리를 꽉 채웠다. 차라리 자카리가 빨리 찾아와 아까 전의 말이 무슨 의도였는지 명쾌하게 답을 내어주었으면 하면서도, 그와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상반되는 심정에 비앙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비앙카.”
그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비앙카는 퍼드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문가에 비스듬히 기댄 자카리가 비앙카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씻고 왔는지 그의 은빛 머리카락은 평소보다 반짝였고, 옷은 느슨했다. 묘한 기시감이 드는 구도에 비앙카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 사이, 자카리가 그녀에게로 성큼 다가섰다.
“몸이 좋지 않소?”
“아니요. 괜찮아요.”
과하게 가깝다. 제 뺨을 향해 자연스레 손을 뻗는 자카리의 모습에 당황한 비앙카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비앙카는 한 박자 늦게 자신의 경계를 깨달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비앙카는 애써 스스로를 다잡았다.
“내 갑자기 그리 말해 당황했을 것 같소만.”
“말 때문만은 아니었지만요.”
입맞춤을 떠올린 비앙카의 귓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회귀를 하긴 했지만, 전생의 기억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전생의 그녀는 자카리와의 관계를 그저 참고 인내했을 뿐이었고, 페르낭과는 그저 그의 사랑을 받기 위한 대가성 행위였을 뿐이었다. 페르낭과 처음 입맞춤했을 때는 가슴 떨렸던 것도 같지만, 그것이 정말로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었다는 걸 이번 입맞춤으로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자카리는 무척 태연해 보였다. 입 맞추던 모습도 무척 자연스러웠다. 비앙카에겐 가슴 떨리는 순간이었지만, 그에겐 별거 아니기 때문인 걸까…. 그리 생각하니 비앙카의 가슴 한구석이 바늘로 찌른 것처럼 따끔했다. 비앙카는 바로 그 고통이 분했다. 이리될 줄 뻔히 알고 있었기에 마음에 빗장을 그리도 단단히 걸어 잠근 것이었는데….
“그대를 곤혹스럽게 했다면 미안하오.”
“딱히 곤혹스럽지는 않았어요. 저희는 부부니까….”
“다행이로군.”
툴툴대는 비앙카의 답변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자카리의 입가가 빙긋이 호선을 그렸다. 한번 열려버린 마음은 분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손쉽게 다시 문을 열어주었다. 비앙카는 주체할 줄 모르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만 좀 시끄럽게 굴라고. 잡아 흔들어 진정시킬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런 비앙카의 마음은 하나도 모르는 듯, 자카리는 비앙카에게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왔다. 아니. 어쩌면 비앙카의 마음 따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를 휘두르려는 것처럼, 일부러. 그의 접근은 비앙카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대로 있자니 심장이 터질 것 같고, 그렇다 하여 피할 수도 없다.
“오늘 그대에게 미안할 일이 많아.”
뭐가 그리 미안한지는 모르겠지만, 다가오는 거리가 좁혀지다 못해 그들의 몸이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팔로 그녀의 허리를 휘어 감지 않았음에도 비앙카는 자카리의 품에 안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앙카는 그게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그대에게 일주일 정도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고 싶었소. 내가 좀 더 나이가 많은 만큼,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너무 다급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마음이 달아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더군. 자랑했던 나의 인내심도 드디어 한계요.”
자카리답지 않게 말이 많았다. 거기다 뜬금없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라는 건지, 비앙카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대화의 주제에 대해선 함구한 채 주변만 빙빙 돌고 있는 상황이 답답했다.
‘차라리 속 시원히 말해주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지금은 마치, 그런 거 같잖아…. 정말로….’
괜히 헛짚었다 실망하고 싶지 않았던 비앙카는 필사적으로 자카리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비앙카의 눈동자가 흔들린 순간, 비앙카의 코앞에 우뚝 선 채 꿈쩍 않던 자카리가 팔을 뻗어 비앙카를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비앙카가 자카리의 가슴팍을 떠밀었지만, 그녀의 등을 옭아매는 단단한 팔은 마치 고목의 뿌리 같았다. 비앙카의 손짓은 새장에 부딪히는 새의 날갯짓이나 다름없이 무력했다. 비앙카는 당황스레 외쳤다.
“백작님…!”
“여보.”
자카리는 부드럽고도 단호하게 비앙카의 외침을 끊어냈다.
“여보라 불러주시오.”
자카리의 말은 여전히 뜬금없었다. 비앙카는 망연히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까만 눈동자에 비친 비앙카의 모습은 당혹감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아까와 달리 맞닿은 가슴을 타고 그에게 이 심장의 거센 고동이 전해질까 두려웠다.
자카리는 그런 비앙카가 사랑스럽다는 듯 눈을 휘어 웃으며, 느릿한 속도로 조곤조곤, 그러나 결코 잘못 들을 수 없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곧 그 호칭을 불릴 만한 관계가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