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89화 (89/192)

#89 토너먼트(17)

카스티야의 기사가 관중석에 다가서는 동안, 관중들은 모두 그가 누구에게 장미를 건넬 것인지 주목했다.

지금까지 승승장구하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장미를 건넨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럴 만한 대상이 없기 때문이었다. 카스티야의 사절단에는 여자가 없었으며, 유일한 레이디인 카스티야의 공주는 어린 나이와 건강상의 이유로 토너먼트에 불참했으니까. 카스티야의 기사인 그가 세브랑의 귀족 여인에게 장미를 건네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도대체 누구에게…? 모두가 의문을 품은 와중, 카스티야의 기사는 중앙석으로 향했다.

“오델리 왕녀님께, 장미를 바칩니다.”

무뚝뚝한 목소리로 툭 하니 내뱉으며 장미를 건네는 태도는 기사라기엔 지나치게 딱딱했다. 정말로 오델리 왕녀를 레이디라 생각해서 장미를 건네 건지, 아니면 세브랑과의 우호를 위한 정치의 일환으로써의 퍼포먼스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장미라면 세브랑 왕국의 그 누구보다도 많이 받아 온 오델리 왕녀는 상대가 타국의 기사임에도 별반 다를 것 없는 심드렁한 태도로 장미를 받았다. 관중 모두가 가슴 두근거리며 그들을 지켜보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둘은 건조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장미를 주고받으니 한창 무르익어 설레는 분위기가 푸시시 식어버렸다.

멀찍이, 경기장 밖에서 가스파르와 카스티야 기사의 대전을 지켜보던 자코브는 피식 비웃은 채 중얼거렸다.

“알베르가 약혼한 김에 누이도 시집갔으면 좋겠는데. 하긴. 저 뻔뻔하고 게으른 여자가 호락호락 시집갈 리 없겠지.”

왕은 첫 번째 왕비를 빼어 닮은 오델리 왕녀를 아꼈다. 오죽하면 미인으로 유명한 그녀에게 지참금을 받지 않겠다는 이들이 많았는데도 시집보낼 생각을 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오델리 왕녀가 혼기가 차도 왕은 그녀를 옆에 끼고 살았다. 아마 죽을 때까지 곁에 둘 생각인가 보다고 다들 수군거릴 정도였다.

첫째 왕자인 고티에 왕자 또한 유일한 동복 혈육을 아꼈으니, 고티에 왕자가 왕이 되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으리라. 오델리 왕녀는 평생 결혼할 일 없이 세브랑에 머물 것이다.

하지만 자코브, 그는 사정이 달랐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면…. 자코브의 입꼬리가 비죽이며 올라갔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줄 알며 거들먹거리는 저 누이는 눈엣가시였다. 왕이 재고의 여지없이 고티에 왕자를 차기 왕으로 정한 것 또한 첫째 왕비 때문이었으니, 첫째 왕비를 빼어 닮은 오델리 왕녀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비싼 지참금을 얹어서라도 어디에 팔아버려야지. 최대한 격에 맞지 않는, 비천한 곳으로. 콧대 높은 오델리 왕녀가 굴욕적으로 저를 노려볼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비록 이번 경기에서 자카리에게 패배하여 이 좋은 기분이 곤두박질치겠지만, 애초에 그 정도는 충분히 감안하고 나온 경기였다. 자코브는 흘끗 옆에 있는 자카리를 보았다.

카스티야의 기사가 무슨 돌발 행동을 하든, 그의 시선은 제 아내에게 향해 있었다. 항상 무뚝뚝함만을 유지하는 그의 얼굴에 떠오른 선연한 갈구. 저렇게까지 아내를 아낀단 말이지…. 비앙카가 자코브의 마음에 든 것과 별개로, 그녀를 유혹해서 쓰러트렸을 때 자카리가 보일 반응 또한 기대가 되었다. 자코브의 입꼬리가 아까보다 더 짙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하지만 자카리는 그런 자코브의 꿍꿍이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비앙카와 소뵈르가 뭘 하고 있는지 살펴보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지난번 비앙카의 주변에서 맴돌던 음유시인 같은 날파리들을 쳐 내기 위해서는 호위가 필요했다. 하지만 가스파르가 준결승에 올라오다 보니 호위가 불가능했고, 비앙카가 로베르를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니 소뵈르밖에 답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소뵈르와 비앙카의 사이가 걱정되었다. 안 그래도 비앙카와 소뵈르가 저도 모르는 새 친밀해져 있어 조금 질투를 느끼지 않았던가. 지금도 그러했다. 비앙카의 주변에서 소뵈르가 주절주절 말하고 있었고, 비앙카는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항시 같이 있던 이본느라는 시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단둘만 있는 모습은 제법 친밀해 보였다.

비앙카가 가스파르와 있을 땐 이렇게까지 심난하지 않았었는데….

자카리는 픽 웃었다. 심난하지 않기는 무슨. 처음 가스파르가 비앙카의 호위가 되겠다 나섰을 때도 철렁했으면서. 다만 가스파르의 선을 긋는 태도에 내심 안도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말주변이 없는 자카리 본인이나 가스파르와는 달리, 소뵈르는 말재간이 좋은 축이었다. 소뵈르와 대화할 때의 비앙카는 자신과 있을 때보다 더 자주 웃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없는 소뵈르의 장점. 자카리는 단 한 번도 타인과 자신을 비교해 본 적이 없었고, 열등감 같은 감정에 빠질 일도 없었다. 타인의 장점은 장점으로 순수하게 받아들였고, 칭찬할 일이 있으면 사심 없이 칭찬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질척하면서도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부정적인 감정이 자카리의 심장을 들었다 놨다 반복했다.

그렇다 하여 소뵈르를 물리고 비앙카를 혼자 둘 수는 없으니, 결국 답이 없는 문제였다. 그는 비앙카의 곁에 사내라면, 그 누가 와도 못마땅해 할 테니까.

‘역시 탐탁지 않군.’

최대한 빨리 승리하자. 그러면 되겠지.

자카리는 자신이 의처증에 가까운 집착으로 한 발짝, 한 발짝 걸어 들어가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설령 자각했다 하더라도 그가 어찌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별반 다르지 않았을 터였다.

자카리는 자신의 팔뚝에 맨, 비앙카가 준 손수건을 저도 모르게 매만졌다. 둔탁한 장갑 위로 만져지는 손수건은 매미 날개처럼 얇아 별 느낌이 없었을 테지만, 자카리에게는 그 무엇보다 존재감이 컸다.

자카리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종자 대신 자카리의 시중을 들고 있는 로베르 또한 덩달아 긴장했다. 자카리는 전쟁을 앞두고도 표정을 바꾸는 일이 없었다. 그런 그의 주변에 감도는 살벌한 분위기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크게 벌어질 것 같았다.

자카리의 심상찮은 기색을 눈치챈 건 로베르뿐만이 아니었다. 시합이 끝난 경기장에 물을 뿌리며 먼지를 가라앉히는 동안, 자코브가 말을 몰아 자카리의 옆으로 다가오며 능청스레 말을 걸었다.

“이거, 이거. 아르노 백작의 얼굴만 보면 마치 이번 시합에서 날 죽일 것만 같군. 아주 살벌해.”

“…설마요. 제가 감히 그런 생각을 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고.”

자코브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카리를 흘끔거렸다. 대답은 차분하였으나 내리깐 눈은 살의로 번들거렸다. 죽일 생각이 없다 해서 널 죽이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다, 싶은 눈빛이었다. 불순한 시선이었지만 자코브는 자카리의 표정까지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것 말고도 자카리를 도발할 소재는 많고 많았다. 딱 자르는 듯한 자카리의 말투에도 불구하고 자코브는 산뜻한 미소를 지은 채 살갑게 말을 걸었다.

“이제 우리 차례군, 아르노 백작. 피차 좋은 경기를 해 보세. 그러고 보니 그대의 아내…. 비앙카라 했던가?”

“제 아내의 이름을 공공연히 입에 담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만.”

노골적인 자카리의 불쾌감에도 자코브는 물러서지 않았다. 되레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생긋 웃었다. 자코브의 잘생긴 외모가 빛바래 보일 정도로, 그의 미소는 간사했다.

“뭘 그리 까탈스럽게, 늘 생각하는데 자네는 너무 고지식해. 요즘 궁정 연애가 유행이지 않나. 고티에 형님마저도 다른 귀부인과 시시덕거리는데 말이야. 자네는 다른 여자에게 말도 안 붙이고, 자네의 아내에게도 다른 남자가 말을 붙이는 꼴을 못 보는군.”

“…타인과 저를 비슷한 기준으로 둘 생각은 없습니다. 왕자님은 왕자님이고, 저는 저입니다.”

“비앙카도 그리 생각할까?”

“…….”

“자네가 비앙카에게 장미꽃을 줄 생각이 있다면, 어느 쪽이 이겨도 비앙카는 장미꽃을 받을 테지.”

궁정 연애가 공공연하다고는 하나, 상대의 배우자에게 가서 그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은 엄청난 무례였다. 자카리의 분위기가 한층 더 가라앉았고, 그의 검은 눈빛은 금방이라도 끓어오를 것처럼 이글거렸다. 발끈한 로베르가 버럭 소리를 높였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오, 로베르 경. 거기에 있었나. 어제는 말 위에서 봤던 것 같은데…. 종자처럼 밑에 있어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군. 창을 맞댄 자로서 무례를 사과하네. 그나저나 아르노 백작은 대단하구만. 그 명예로운 삼익(三翼)의 하나도 종자처럼 부리니.”

로베르와 자카리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이다 못해 투명했다. 이쯤 되면 이간질이 아니라 로베르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어 소동을 일으키려는 의도에 가까웠다. 로베르 또한 그 사실을 알았다. 이를 악문 그의 이 사이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제 명예는 승리가 아니라 백작님을 잘 보필하는 데에 있으니까요.”

“청산유수로군. 기사치고는 말을 잘하는데?”

기사로서 실력이 없으니 말이라도 잘해야 한다는 듯한, 멸시하는 말투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자카리가 느릿하게 자코브를 돌아보았다. 아직 얼굴 덮개를 덮지 않아 그대로 드러난 자카리의 얼굴은 마치 조각상이기라도 한 것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자카리가 고요하게 물었다.

“저를 도발하실 생각입니까?”

“알아채는 게 늦군.”

“저를 도발해서 좋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왕자님에게는. 조용히 뇌까리는 그의 목소리는 속삭이듯 귓가에서 흩어졌다. 스스로의 승리를 점치는 광오한 대답은 아침 식사 메뉴를 읊는 것과 차이가 없을 정도로 건조했다. 자코브의 말 때문에 분노했는지, 짜증이 났는지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고요한 시선이 자코브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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