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토너먼트(16)
“크…. 블랑쉐포르 공자도 승승장구했지만, 8강에서 백작님과 붙어버렸죠. 그래도 공자는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조금만 더 나이를 드시면 제법 이름을 날리는 기사가 될 겁니다.”
비앙카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솔직히 조아생이 8강까지 올라갈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자카리였으니 8강에서 주저앉았겠지만, 8강도 이만저만한 실력은 아니었다.
세세한 것까지 한참 이야기하던 소뵈르가 흘끗 이본느를 보았다. 가스파르가 이본느에게 고백했다는 사실은 아르노 백작가의 일행 모두에게 이미 퍼진 뒤였다. 소뵈르는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이본느에게 말을 걸었다.
“시녀님이 계속해서 눈치를 주시는데…. 가스파르 이야기도 슬슬 해 드리겠습니다. 가스파르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해하시는 거 맞지요?”
“아, 아니거든요.”
이본느는 부정했지만 발그레해진 뺨이 신빙성을 덜어냈다. 소뵈르는 아까보다도 더 과장된 어조로 가스파르의 경기를 묘사했다.
“다행히도! 가스파르는 4강에 진출했습니다. 사실 저희 세 부장 중 마상 시합에 가장 능한 건 가스파르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죠. 그 덩치가 속도를 내어 달려오면 아이고…. 물소 떼에 쫓기는 쪽이 더 나아 보인다니까요.”
호들갑을 떠는 소뵈르의 이야기에, 이본느는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다들 이본느를 지켜보고 있던지라, 그녀가 가스파르의 승리에 안도했다는 사실은 그대로 들통이 났다. 비앙카는 살짝 웃었고, 소뵈르는 더 기세등등해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정말 아쉬운 건 로베르 그 녀석입니다만…. 자코브 왕자와 붙었거든요. 물론 그 녀석 자존심에 기권 패 같은 건 하지 않았습니다만, 재수 없게도 두 경기를 연달아 뛰게 되었지 뭡니까. 자코브 왕자는 계속 부전승으로 올라왔으니 체력이 비축된 상황이었고요. 어휴. 솔직히 똥이 무서워서 피합니까? 더러워서 피하지. 모두 2왕자와 붙었다 하면 흰 깃발을 내걸고 기권하는 상황에서 로베르 놈은 제법 고군분투했습니다만….”
소뵈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한마디로 패배했다는 이야기였다. 로베르가 가끔 비앙카에게 못되게 굴긴 했지만, 자코브에 비하면 훨씬 내적 친밀감이 드는 상대였다. 차라리 로베르가 이겼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이미 시합의 결과는 나온 뒤였다.
“2왕자와 백작님의 경기는 당연히 백작님이 이기실 테니, 마님도 별걱정 마십시오. 토너먼트의 승자는 당연히 백작님 아니겠습니까?”
비앙카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카리의 승리에 대해 걱정하는 건 아니었지만, 소뵈르가 굳이 걱정 말라 말하는 데 타박 놓고 싶은 건 아니었다.
비앙카는 소뵈르가 주절주절 이야기하는 동안 자신의 결과에 대해선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걸 눈치챘다. 지금껏 소뵈르의 이야기에 시달렸던 그녀는 짓궂게 물었다.
“그래서 소뵈르 경. 그대는 어찌 되었는가?”
“아이고, 꼭 그리 아픈 곳을 후벼 파셔야 되겠습니까. 저야 계속 승승장구했습니다만…. 아까 말씀드렸던 카스티야 기사에게 패배했습니다요. 아니, 무슨 암초라도 되는 것처럼 단단하지 않겠습니까. 내일 가스파르와 붙을 텐데, 봐줄 만한 경기일 겁니다.”
소뵈르는 눈을 축 내리깔고, 엄살 어린 목소리로 자신의 패배에 대해 변명했다. 비앙카는 더 캐묻지 않았다. 소뵈르가 패배한 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정도로 궁금한 건 아니었고, 피로하기도 했다. 비앙카의 몸이 축 늘어졌다. 이야기는 듣는 것만으로도 지쳤다. 몰려온 피로함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비앙카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런 비앙카의 상태를 기민하게 눈치챈 건 이본느였다. 내일 가스파르의 상대인 암초 같은 카스티야 기사에 대해 궁금하긴 했지만, 일단 마님의 건강이 우선이었다. 이본느는 소뵈르의 이야기를 끊으며 눈치를 줬다.
“아이고, 그러고 보니 내일 백작님 경기를 보러 가시려면 마님도 일찍 주무셔야죠. 소뵈르 경 덕에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무얼요. 내일 가스파르 경 대신 마님을 호위하러 올 테니, 내일 뵙도록 하지요.”
“굳이 올 필요 없는데.”
비앙카가 귀찮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지만, 소뵈르는 평소의 유들유들한 태도라고는 믿기지 않는 단호한 목소리로 단언했다.
“백작님 명이셨습니다. 제가 4강에 떨어진 걸 알자마자 바로 이야기하셨지요.”
자카리의 명이라면 어쩔 수 없다. 비앙카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뵈르는 바로 비앙카의 방을 떠났고, 이본느는 비앙카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그동안 비앙카는 창가에 슬며시 기댄 채 벽에 이마를 댔다. 한창 봄날이라 그런지 저녁이 되었음에도 바람은 따듯했다. 비앙카는 눈을 슬쩍 내리감은 채 바깥 공기를 쐬었다.
피곤했지만, 머리는 말똥했다. 차라리 이리저리 뒤섞여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비앙카는 애써 고민을 떨쳐내려 노력하며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한 채 한참을 뒤척였다.
비앙카가 간신히 잠이 들었을 때는, 기다렸다는 듯이 악몽이 찾아왔다.
자카리가 전쟁에서 가슴에 활을 맞아 죽는, 그런 악몽.
* * *
토너먼트의 마지막 날은 제일 화려하게 개최되었다. 악단의 수도 두 배였고, 구경꾼은 어찌나 많은지 관계자와 분리해 둔 나무 울타리가 휘청일 정도였다.
오늘 이 영예로운 순간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네 명의 기사뿐. 그중 세 명의 기사가 세브랑 출신인 것에 늙은 왕은 무척 기뻐했다. 속절없을 정도로 투명한 세브랑 왕의 기쁨에 카스티야의 사절단은 헛기침을 했다.
카스티야의 사절단은 그들의 유일한 희망에게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카스티야의 사절단도 자카리의 위명은 알고 있었다. 아라곤 왕국의 수많은 침략을 막아내는 젊은 영웅! 감히 그에게서 우승을 빼앗으라는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결승전에서 그와 창끝을 맞대기라도 해야 카스티야의 체면이 서지 않겠는가.
차라리 자코브 왕자와 붙었더라면 세브랑 왕가를 존중한다는 명목하에 기권 패라도 던질 텐데, 그럴 수도 없으니 그들의 입장이 참 면구스러웠다. 적어도 이번에는 꼭 이겨야 한다. 부디 신의 가호가 있기를. 카스티야의 사절단 모두 마음속으로 신을 부르짖었다.
잠을 설친 비앙카는 평소보다 해쓱한 낯으로 관중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뒤에 소뵈르가 떡하니 지키고 있으니, 페르낭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그 덕에 비앙카는 조금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런 처참한 기분인 상태에서 페르낭과 얼굴을 마주했다가는, 자신이 뭔가 저질러도 단단히 저지를 것 같았다.
카스티야의 기사와 가스파르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가스파르가 우뚝 선 산 같다면, 카스티야 기사는 암석 같다는 소뵈르의 표현처럼 까무잡잡하고 거대했다. 기사라기보다는 뱃사람 같은 이미지였다.
확실한 건 둘 다 덩치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이었다.
깃발수가 깃발을 내리기가 무섭게 두 기사가 돌진했다. 마상 시합이라기보다는 물소 싸움을 보는 것 같은 박력이었다.
콰지직, 쾅!
격돌하였으나, 시합은 단숨에 결정되지 못했다. 카스티야 기사의 창끝이 가스파르의 목과 배 사이를 찔렀다. 1점. 승리를 결정짓기 위해서는 2점이 더 필요했다.
두 번째 격돌에서는 가스파르의 창이 카스티야 기사의 투구를 가격했다. 이번엔 가스파르의 2점! 박빙의 순간이었다. 세 번째 격돌의 순간, 이본느는 차마 보지 못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이긴 것은 카스티야 기사였다. 그의 창이 가스파르의 방패를 정확히 파괴했다. 카스티야 사절단은 지금 타국에서 개최된 토너먼트에 와 있다는 생각도 잊은 채, 와, 하고 두 손을 높이 치켜들며 소리 질렀다.
카스티야의 기사가 레이디에게 승리의 장미를 건네기 위해 관중석으로 다가오는 사이, 가스파르는 비앙카와 이본느가 있는 쪽을 흘끔 보고는 무뚝뚝이 말을 몰아 사라졌다.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는 단호한 태도에 오히려 이본느가 안절부절못했다. 가스파르가 걱정되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비앙카도 걱정되어 꿈쩍도 안 하는 모습에, 비앙카가 이본느의 팔을 잡아끌며 속삭였다.
“갔다 오렴, 이본느.”
“하지만.”
“명령이야.”
비앙카가 단호히 말했다. 명령이라 하니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던 이본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스파르가 머무는 천막을 향해 사라졌다. 비앙카는 그 자리에 없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님께서 시녀 연애 사업도 신경 쓰시고, 아주 공사다망하십니다.”
“…신경 써 줄 수 있을 때 쓰는 거야.”
비앙카는 침울히 중얼거렸다. 과연 가스파르와 이본느를 이어주는 것이 좋은 선택인지 아직도 알 수가 없었다. 더불어 어제 밤새 고민하던 문제가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비앙카는 손가락으로 제 뺨을 슬쩍 잡아당겼다. 곧 있으면 자카리가 출전할 텐데, 언제까지 고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적어도 그가 승리하는 앞에서는 웃어줘야지. 비앙카는 억지로 입술을 끌어 올렸다. 누가 보아도 어색한 웃음이었지만, 그게 비앙카의 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