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87화 (87/192)

#87 토너먼트(15)

둘째 날까지 예선전이 이어졌다. 아르노 가의 참가자들은 모두 첫째 날 예선전을 치렀으니, 비앙카도 둘째 날은 애초에 구경 갈 생각이 없었다. 셋째 날은 예선전을 통과한 이들 중 결승전에 올라갈 승자들을 추리는 날이었다. 비앙카는 자카리의 부탁대로 셋째 날도 숙소에서 시간을 보냈다.

비앙카는 느긋하게 레이스를 짰다. 처음에는 1왕녀와 왕자비, 왕비에게만 건넬 생각이었지만 간과하고 있던 2왕녀와 3왕녀가 걸렸다. 어리다 해도 왕녀였고, 현 왕비의 유일한 자식들이다. 그녀들을 빼놓기가 찝찝했던 비앙카는 틈틈이 레이스 손수건을 짜기 시작했고, 이제 완성이 코앞이었다.

이본느는 그런 비앙카의 옆에서 종일 시중을 들었는데, 평소에는 가구와 구별이 안 갈 정도로 꿈쩍도 안 하던 그녀가 오늘따라 안절부절못했다. 이유는 빤했다. 비앙카는 레이스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심드렁히 물었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가 보는 게 어떠니?”

“마님이 계신 데 제가 어떻게요.”

“뭐 어때. 난 계속 방 안에만 있을 테고…. 가스파르 경이 어떻게 시합할지 궁금한 거 같은데.”

“아, 안 궁금해요. 전 마님하고 있는 게 좋아요.”

이본느는 고집스레 고개를 도리질 쳤다. 궁금하지 않다고는 하지만 눈은 슬그머니 문가로 향해 있고 엉덩이는 들썩였다. 비앙카의 입술을 비집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비앙카는 캐묻는 대신 모르는 척 이본느의 장단에 맞췄다.

“그래? 그러고 보니 답은 줬니?”

“다, 답이요? 무슨 답이요?”

이본느는 대놓고 시선을 데굴데굴 굴렸다. 말까지 더듬는 것이 제대로 된 답은커녕 가스파르와 마주쳤다가 그대로 줄행랑친 모양새였다. 답지 않게 평정을 잃은 이본느의 모습에 비앙카는 작게 웃으며 한참 몰두하던 레이스 틀을 무릎 위로 내려놓았다.

비앙카가 빤히 바라보니 이본느는 더더욱 당황한 듯 표정이 이리저리 뒤바뀌었다. 이본느를 골릴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았다. 이본느가 가스파르에게 장미를 받았을 때 그녀를 골렸다가, 자신이 한 말이 그대로 부메랑이 되어 저에게 향하지 않았던가. 비앙카는 적당한 덕담으로 이본느를 다독였다.

“가스파르 경 정도면 괜찮은 남자지…. 하지만 굳이 휘둘릴 필요는 없어. 너하고 싶은 대로 하렴. 네 뒤엔 내가 있으니까.”

“마님….”

이본느는 감격한 듯 말끝을 흐렸다. 눈빛이 얼마나 초롱초롱한지, 방 안이 어두웠다면 그녀의 눈빛이 조명처럼 둥둥 떠 있었을지도 몰랐다.

비앙카가 그리 말하기는 했지만, 이본느가 딱히 가스파르를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스스로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생각도 못 했던지라 혼란스러울 뿐이리라.

생각해 보면 가스파르는 계속 이본느를 챙겨 왔다. 처음에는 비앙카의 시녀에게까지 대우하는 그의 태도를 제법 기사답다 여겼는데, 그의 친절함은 전적으로 이본느에 대한 호감 때문이었다.

가스파르는 기사 집안이었고, 이본느를 좋아하기까지 하니 결혼 상대로 나쁜 것은 아니었다. 아마 투닥거리면서 잘 살겠지. 가스파르는 말수가 부족한 만큼 한번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을 철회하지 않는 끈질긴 사내였고, 그런 그가 대중 앞에서 고백했다는 것은 이본느를 정말로 좋아한다는 뜻이었다.

다만 자카리의 측근인 만큼, 전쟁 때문에 자주 집을 비우는 게 흠이긴 했다. 전쟁에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사내와 결혼하라 등 떠밀기도 좀 그렇고….

그 순간 비앙카의 머리가 띵하니 울렸다. 마치 종을 머리에 뒤집어씌운 채 세게 내려치기라도 한 듯, 머리가 진동하고 귓가가 웅웅거렸다. 비앙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비앙카의 목표는 바득바득 살아남아, 이 부유한 생을 지속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목표에 주변 사람들은 없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 이본느, 가스파르, 소뵈르…. 그리고 남편까지도. 오로지 그녀 혼자만의 안위뿐이었다.

과거로 돌아온 그녀에게 남은 건 독기뿐이었고, 그녀 홀로만 살아남으면 된다 여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독기와 복수심은 빠져나가고, 지금의 안락함은 그녀를 둔탁하게 만들었다. 둥글게. 무디게. 혼자만의 세계에서 골몰하던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게 되고, 하나둘 그녀의 영역에 들였다.

비앙카는 지금의 생활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자카리는 그녀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고, 이본느는 그녀를 살뜰히 챙겼다. 아버지와의 어그러진 관계도 회복되었고, 그녀는 자신이 바라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하지만 그녀의 부부 생활은 끝이 정해진 관계였다.

그에게 승마를 배우던 순간, 휘청이는 몸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팔뚝, 그녀를 쏘아볼 듯 응시하는 까만 눈동자, 장미를 건네던 떨리는 손길…. 그 모든 것이 파스스 흩어졌다.

후계자만 가질 수 있다면, 남편은 죽어도 상관없다 단호하게 내치기엔 그와 그녀의 사이의 빈틈에 추억이라는 촛농이 흘러 들어가 사이를 메웠다.

언제부터였을까. 이제 비앙카는 더 이상 자카리가 죽어도 상관없다 함부로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미래에 대한 생각을 무의식으로 미뤄 둘 정도로 생각하는 것조차 끔찍했다. 이 끔찍함에서 벗어날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자카리에게서 정을 끊어내든가. 아니면….

“마님? 괜찮으세요?”

이본느는 갑자기 새하얗게 질린 채 침묵하는 비앙카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비앙카는 혼란스러웠던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핑계를 대어 이본느를 내보냈다. 싱긋 웃는 미소는 태연했지만, 그녀의 목에는 식은땀이 한 방울 또르르 흘렀다.

“지금쯤이면 오늘 경기도 끝났겠구나. 이본느. 나가서 경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봐 주지 않겠니?”

“…네! 얼른, 누구보다도 세세하게 알아 올게요!”

이본느는 화색을 띠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백작님이야 당연히 통과했을 테지만, 쟁쟁한 기사들 사이에서 가스파르가 과연 준결승에 진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이본느는 가스파르가 통과하든 말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콧대 높였지만, 내심 궁금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본느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쌩하니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이본느의 상기된 얼굴에는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었다. 그런 이본느의 모습은 우울한 비앙카의 기분에 잠깐의 전환이 되어주었다.

하긴. 이제 스물둘이면 어리지…. 열일곱의 낯을 한 비앙카가 쓴 미소를 지은 채 이본느가 떠나간 문가를 잠시 지켜보았다. 이본느는 똘똘하니 잘 처신할 것이다.

비앙카는 자조했다. 자신이 스물둘이었을 때가 생각났다. 페르낭에게 홀려, 그가 자신의 진실한 사랑의 상대라 믿었던 어리석은 그때가.

비앙카가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페르낭과의 일로 인해 두 번 다시 사랑을 믿지 않겠다 하였는데, 사랑하지 않는 것만으로 각오를 다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정이라는 게 이리도 무섭다.

자카리의 무뚝뚝함에, 그와는 항상 사무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 지레 판단해버린 것이 과거의 오산이었다. 그의 무뚝뚝한 상냥함은, 가랑비처럼 그녀의 마음을 젖어 들게 했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아. 나는 자카리를 사랑하지 않아. 그저, 그에게 정이 들었을 뿐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비앙카는 중얼중얼 혼잣말을 되뇌었다. 마치 스스로에게 세뇌하듯이. 하지만 타이르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렇게 비앙카가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하는 사이, 오래지 않아 이본느가 나타났다. 빨라도 너무 빨랐기에 비앙카는 당황한 낯을 고스란히 얼굴에 내비쳤다.

“마님, 다녀왔어요.”

“왜 이리 빨리…. 소뵈르 경.”

“바로 요 앞에서 마주쳤는데, 마님이 토너먼트 결과를 궁금해한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직접 왔습죠. 전해 듣는 것보다 생생하게 직접 들으시는 게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이본느의 뒤를 따라 들어온 소뵈르가 시시덕거렸다. 소뵈르는 방정맞다 못해 시끄러울 정도였고, 그와 이야기하면 항상 비앙카는 진이 빠졌다. 지금 이 상황에서 달가운 손님은 아니었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이런 식으로라도 기분 전환하는 쪽이 나으리라. 자카리와 미래에 관한 문제는 어차피 고민한다 하여 답이 바로 나오는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토너먼트 결과에 대해 목을 빼고 궁금해하는 이본느가 있지 않던가. 비앙카는 몸에 긴장을 풀고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그래. 이야기나 해 보거라.”

“대전이 아주 재미지게 이뤄졌거든요. 캬…. 카스티야 기사들도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솔직히 맨날 산등성이를 뛰어다니는 아라곤 놈들만 상대해서 바닷물 먹은 놈들이 말 위에서 얼마나 실력 발휘할지 감을 못 잡았는데, 정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습죠.”

소뵈르는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찌나 주절주절 말이 많은지, 비앙카는 일축하고 결과만 말하라 하고 싶었지만, 옆에서 이본느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소뵈르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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