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토너먼트(14)
말 머리를 돌린 자코브가 경기장을 빠져나가다가 자카리와 눈이 마주쳤다. 자코브의 투구 덮개는 열려 있었고, 그 덕에 자카리는 자코브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그대로 읽을 수 있었다.
희열감, 우월감, 그리고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보라는 도발.
그는 어깨를 으쓱이듯 큭큭, 낮게 웃고는 자카리의 반대쪽으로 말을 몰아 사라졌다. 자카리는 고요히, 그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아까 비앙카가 관중석으로 돌아갈 때와는 달리, 호의라고는 일절 없는 적대감과 분노로 가득 찬 시선이었다.
하지만 자코브가 끝이 아니었다. 자코브가 사라지고, 습관적으로 비앙카에게로 시선을 돌린 자카리가 본 것은 비앙카의 주변을 맴도는 한 음유시인이었다. 투구 속 자카리의 얼굴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구겨졌다.
“저건 또 뭐야.”
번드르르한 외모. 상기된 얼굴로 비앙카의 눈치를 보는 사내의 의도는 명백했다. 암컷에게 구애하는 새라도 된 것처럼 아내를 향해 과장된 몸짓을 하는 사내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솔직히 눈이 뒤집히지 않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다. 바로 직전에 자카리의 마음속에 자코브가 커다란 불씨를 던져 준 만큼, 그의 마음은 아주 활활 타올랐다.
자카리가 비앙카와 남자들의 사이를 오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남편인 그의 입으로 말하자니 흠을 잡는 것 같지만, 솔직히 비앙카는 표정을 감추는 데 능한 이는 아니었다. 호불호에 있어선 특히. 그건 직접 겪어 봤으니 누구보다도 잘 안다. 상대를 싫어한다면 가식적인 태도조차 힘겨워하는 게 비앙카 아니던가. 그녀가 지금껏 만난 남자들을 거북해한다는 건 그녀의 얼굴에 훤히 드러났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그녀의 주변을 맴도는 날파리들이 자카리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는다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 날파리들은 한 마리, 두 마리로 늘어나고 있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날파리들이 성가시고 짜증 나기는 했지만, 정말로 자카리를 초조하게 만드는 건 조금 먼 미래의 일이었다. 지금은 비앙카가 남자에 관심이 없어 그들을 꺼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지는 모르는 법이었다. 훗날 비앙카가 의무적인 남편인 그보다 좀 더 취향에 맞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다른 사내와 연애하기를 원한다면….
자카리는 목이 죄는 기분을 느끼며 의도적으로 생각을 멈췄다. 비앙카에게 받은 손수건으로 차오른 자신감이, 부풀어 오른 거품이 꺼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오늘 토너먼트의 마지막! 세브랑의 영웅, 철혈의 백작, 전장의 늑대, 자카리 드 아르노 백작입니다!”
자카리의 기분이 저조한지 아닌지 알 길이 없는 대변인은 소리 높여 자카리를 소개했다. 관중들이 숨을 죽이고 자카리에게 집중했다. 한참 감정 기복이 널뛰듯 오르내리는 순간 대중의 시선에 노출되었다.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갑옷의 단단함에도 불구하고 자카리는 자신이 광대가 된 기분이었다.
하늘을 까맣게 메운 화살비 같은 무수한 시선 속에서, 비앙카의 곧은 시선이 점화하는 불화살처럼, 하늘의 계시를 전하는 신의 전령처럼 자카리에게 내리꽂혔다. 비앙카는 옆의 사내로부터 자신을 구해 달라는 듯이, 처량 맞고도 안쓰럽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카리의 마음이 무섭게 들끓었다. 기사도고 뭐고 당장 눈앞의 기사를 그대로 바닥에 처박은 뒤 비앙카에게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숨을 골랐다.
자카리가 손을 뻗었다. 수년간 함께해 온 종자들이 입안의 혀처럼 적시에 자카리의 손에 창을 들려 줬다. 종자 둘이서 간신히 들어 날랐던 창이 자카리의 손에 들리자 마치 나뭇가지처럼 가벼워 보였다.
자카리는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한 전장의 습관대로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창을 치켜들었다. 관중들 모두가 환호했고, 자카리의 상대인 카스티야의 기사는 긴장과 두려움에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 아르노 경의 상대를 할 수 있는 영광을 버리고 싶진 않았다. 결의에 찬 그는 창을 단단히 쥔 채 옆구리에 꽉 붙들었다.
일체의 흔들림 없는 안정감. 창과 자카리, 그리고 말까지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토너먼트에 참전하는 두 기사는 서서히 말을 몰아 분리대의 양 끝에 섰다. 깃발수는 서로 눈치를 보았다. 하나, 둘…. 지금이다!
깃발이 내려가기가 무섭게 말발굽이 땅을 박찼다. 두 기사의 돌진은 일견 앞을 보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무모함마저 서려 있었다. 300미터의 거리를 단숨에 주파한 그들의 창이 엇갈렸다.
콰지직, 쾅!
우지끈 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유난히도 살벌하게 울려 퍼졌다. 승자는 당연지사 자카리였다. 힘이 얼마나 셌는지, 단숨에 방패를 박살 낸 것도 모자라 상대 기사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질 정도였다.
압도적인 실력 차에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하지만 곧 오래되지 않아 사람들이 아르노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카스티야의 기사를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늙은 왕은 나이도 잊은 채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며 박수를 쳤다. 고티에도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환호 속에서, 자카리는 가슴팍의 장미를 건네줄 유일한 상대를 향해 덤덤하게 말을 몰았다. 건조할 정도로 절도 있는 행동은 금욕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여 귀부인들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지만, 정작 자카리의 머릿속은 새하얬다.
“고생하셨어요.”
비앙카가 자카리를 반겼다. 자카리는 투구의 덮개를 열었다. 투구의 틈으로 불분명했던 비앙카의 모습이 좀 더 선명히 보였다. 자카리는 무의식적으로 입가를 딱딱하게 굳혔다. 감정을 모두 밀어 넣고 단단한 무표정으로 잠가버리는 것. 그것이 자카리의 표정 관리였다.
“별거 아니었소.”
아까 전 비앙카의 옆에서 꼬리를 흔들어대던 음유시인은 어디론가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자카리의 기분을 좋게 해주지는 못했다. 비앙카의 품에는 꽃다발이나 다름없을 만큼 수북한 장미꽃이 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이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경애의 꽃임을 알고 있음에도 질투가 치솟았다. 자카리의 눈빛이 날카롭게 비앙카의 장미꽃을 훑었다. 그중 무엇이 자코브의 것인지, 알기만 하면 당장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카리는 자신의 가슴에 달린 장미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그가 비앙카에게 건넬 장미 또한 다른 이들이 건넨 것과 별다를 바 없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자카리는 비앙카에게 있어 유일한 이가 되고 싶었다. 그가 비앙카의 남편이니 유일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자신의 위치에 대해 자신을 갖지 못한 자카리는 항상 불안했다. 확신하지 못한 그는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증거를 원했다. 무언가 다른, 특별한 것이 필요해. 평범한 장미로는 부족했다. 승리의 증표인 황금 장미쯤은 되어야 그와 다른 이들 사이에 차별성이 눈에 보이리라.
물론 그가 황금 장미를 건넬 것이라 하여, 다른 이들이 비앙카에게 장미를 건네는 꼴을 더 이상 두고 보겠단 말은 아니었다. 그녀의 오라버니건 자신의 부하들이건, 전부 배제하고 싶었다. 그게 욕심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한번 꿈틀거리며 치솟은 욕망은 쉬이 꺼지지 않았다. 자카리는 혀를 차며 덧붙였다.
“당분간은 토너먼트에 나오지 마시오.”
“네?”
“그대 곁에 맴도는 날파리들 때문에 내가 신경이 쓰이는군. 마지막 날에 내가 우승할 테니, 정 나오고 싶거든 그때만 나오면 되오.”
다른 이가 그런 말을 했더라면 허세를 부린다 손가락질받았겠지만, 자카리였기에 용납되었다. 더할 나위 없이 담담한 말투에 비앙카가 살짝 미소 지었다.
“그게 뭐예요.”
빙긋이 휘어지는 눈매 속으로 사라지는 녹음 어린 눈빛에, 자카리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방패고 갑옷이고 다 바닥에 떨궈 내고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그를 뒤흔들었다. 자카리는 충동을 애써 억눌렀지만, 손끝의 떨림까지 자제할 순 없었다. 자카리는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한 끝에 간신히 가슴팍의 장미를 꺼내 들었다.
“…진심이오. 내 승리의 영광을 그대에게.”
장미를 건네는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가 떨고 있다는 걸 비앙카가 눈치챌까.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비앙카의 하얀 손끝이 느릿하게 자카리를 향해 뻗어 왔다. 마치 바람결에 나풀대는 손수건처럼, 사부작사부작 다가온 손가락이 자카리의 손에 들린 장미를 낚아채어 갔다.
“당신 말대로 할게요.”
그리 말하며 비앙카는 아까보다 더 환하게 웃었다. 눈을 치켜뜨고 그를 노려보거나, 속눈썹을 내리깐 채 시선을 피하던 그녀에게서 결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한 웃음은 손에 쥔 장미보다도 더 화려하고, 햇볕이 내리쬐는 듯 따스했으며, 혀끝에 감도는 꿀보다도 달콤했다.
아, 이 미소를 보기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이겨 주리라. 담금질 된 칼처럼 차갑고도 날카롭게 빛나는 다짐과 달리, 비앙카를 응시하는 자카리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