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토너먼트(13)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오늘 토너먼트의 마지막! 세브랑의 영웅, 철혈의 백작, 전장의 늑대, 자카리 드 아르노 백작입니다!”
대변인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은 흑마에 탄 자카리가 위풍당당하게 등장했다.
결합부에 얇고 좁은 홈을 판 뒤, 금을 녹여 내어 문양을 새긴 은빛 갑옷에 부딪힌 태양빛이 번쩍거렸고, 그가 입은 검은 서코트는 바람결에 우아하게 휘날렸다. 투구 위에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상대를 물어뜯을 것처럼 입을 벌린 늑대의 조각이 장식되어 있었다.
마치 성전을 치르러 나선 듯 거룩한 모습에, 관중이 숨을 죽이고 자카리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살폈다.
페르낭은 자카리와 비앙카를 몇 번이나 번갈아 보았다. 비앙카가 곧 남편의 차례라 하였는데, 토너먼트의 마지막은 아르노 백작이었다. 그 이야기인즉슨 비앙카의 남편이 바로 아르노 백작이란 말 아닌가. 페르낭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귀족 마나님들과 불같은 연애를 할 때는 응당 위험 부담이 따랐다.
귀족들 사이에서 아내와 남편 모두 다른 애인을 두는 궁정 연애가 유행이라고는 하나, 모두가 그 유행을 반기는 건 아니었다. 종종 고지식한 남편들은 아내가 기사들에게 찬사받는 것조차 견디지 못했다. 정작 자신은 여자들과 육욕을 불태우며 실컷 즐겨놓고는 말이다.
혹여 제 아내가 다른 사내와 즐겼다는 걸 알게 되기라도 하면 몽둥이를 휘두르기도 했다. 아내에게도, 그리고 상대 사내에게도.
상대 사내가 한낱 음유시인 나부랭이라면, 그 몽둥이는 도끼 자루로 바뀌었다. 페르낭에게도 위험천만한 순간은 있었고, 지금껏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상대가 아르노 백작이라면, 그의 검은 배에 뒤룩뒤룩 살이 찐 귀족들의 도끼날과 달리 정확히 페르낭의 목을 꿰뚫을 것이다. 아르노 백작이 ‘그런 고지식’한 부류가 아니기를 페르낭은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두려웠던 페르낭은 엉덩이를 뒤로 쭉 뺀 채 비앙카에게서 슬금슬금 멀어졌다. 그러면서도 비앙카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속셈을 포기하지 않은 채 그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 얼빠진 모습이란! 비앙카는 조소했다. 얼굴에 선연히 드러난 페르낭의 감정을 보아하건데, 그는 비앙카의 정체를 몰랐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시켜 계획적으로 접근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안도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짜증이 났다. 누구에게 부탁받지 않아도 접근할 만큼, 그녀가 손쉽게 꼬셔지는 호구 같은 여자라고 생각한 건가?
과거에 대놓고 아르노 영지에 와서 비앙카를 꾀었던 만큼, 페르낭이 자카리를 겁내 하는 것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이 기회에 아예 자신에게 수작을 걸 생각조차 하지 말았으면. 비앙카의 입술이 비틀렸다.
한참 꾀려던 여자에게 대놓고 비웃음을 당한 것이 수치스러웠던 페르낭은 얼굴을 붉혔다. 그는 뭐라 변명하려 입을 열었지만, 이내 경기가 시작되며 공간을 쩌렁쩌렁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사람들의 환호 소리에 묻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자카리는 비앙카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천막 입구에 우뚝 서 있었다. 비앙카가 팔뚝에 매어 준 손수건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방문을 환상으로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방금 전의 일은 꿈속의 일처럼 믿기 힘든 것이었다.
그렇게 자카리가 하염없이 방금 전의 일을 곱씹고 있을 때, 종자 하나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백작님. 아직 준비가 남아 있으십니다…. 이제 마무리를 하셔야 해요.”
“…그래.”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자카리가 시선을 거뒀다. 그는 천막으로 돌아가 갑옷의 이음새를 꼼꼼히 점검했다. 기사가 완전 무장했을 때의 갑옷과 투구는 밀 한 포대 정도의 무게였다.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였지만, 그 갑옷을 평생 짊어 온 자카리에게는 익숙할 뿐이었다.
완벽히 무장한 자카리는 종자가 건넨 투구를 느릿하게 썼다. 길고 가늘게 나온 틈으로 빛이 서서히 새어 들어왔다. 가로막힌 시야, 부자유스럽게 텁텁한 공기, 한정된 외부 자극, 자카리는 외부와 유리된 갑옷 속에서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인 늑대의 것처럼 새파랗게 빛났다.
본래 자카리는 토너먼트에 출전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가 참여할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쟁터를 떠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다만 이번에는 약혼 상대국인 카스티아 왕국과 미묘한 알력이 있었고, 그 때문에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뺏길 수 없다 생각한 세브랑 왕이 자카리를 불러 특별히 부탁을 했다.
왕이 부탁까지 해 오는 데 거절하기도 좀 그렇고, 때마침 비앙카도 같이 수도에 온 상태였다. 자카리는 사교계에 대해 잘 모르지만, 애인이나 남편이 토너먼트에 참여해 장미를 건네는 행위가 무척 부러움을 산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가 우승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비앙카에게 호의적으로 대한다면, 까짓 토너먼트 정도야 몇 번이고 나가줄 용의가 있었기에 자카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자카리는 뜨뜻미지근한, 응당 자신에게 내려온 일을 처리해야겠다 정도의 가벼운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물론 그는 지금껏 방심이라는 사치스러운 감정과는 인연이 없었고, 그것은 토너먼트에서 또한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질 생각도, 이유도 없었으니 자카리의 우승은 확정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비앙카가 굳이 보러 와 줄 필요는 없었다. 토너먼트에 참여하는 건 전적으로 자카리의 선택이었고, 그는 스스로가 택한 일을 묵묵히 해내면 될 뿐이었다.
하지만 비앙카가 자카리를 찾아왔다. 그의 시합을 보겠다며 경기장까지 힘든 걸음을 했고, 거기서 더 나아가 자카리를 찾아와 손수건을 건네줬다. 손수건을 받을 거라 생각해 본 적도 없었기에 자카리는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손수건은 마치 비앙카처럼 하얗고 연약해 보였다.
심지어 비앙카, 그녀가 직접 만들었다 하지 않았던가.
비앙카가 자카리를 위해 이렇게까지 번거로운 일을 해 주었다는 것이 그를 어찌할 바 모르게 몰아붙였다. 어떻게든 이 벅차오르는 마음을 비앙카에게 전하고 싶은 초조함, 그녀에게 승리를 건네겠다 맹세하였음에도 부족한 갈증에 자카리는 주먹을 꼭 쥐었다.
지금 자카리를 휩싼 것은, 기필코 이겨야만 한다는 투쟁심이었다. 그 어떤 어려운 전쟁을 마주했을 때보다도 강렬한 충동이었다.
“토너먼트에 나와 달라 한 왕에게 감사해야겠군.”
토너먼트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비앙카가 그에게 손수건을 줬을 리 없었을 테니까. 투구에 가려진 자카리의 입술 끝이 씰룩이며 올라갔다. 벅차오른 심장이 터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수위로 넘실거렸다. 조금의 자극만 있어도 그대로 전복될 것만 같았다. 자카리는 중심을 잡기 위해 바짝 고삐를 당겼다.
“백작님. 이제 바로 백작님의 차례입니다.”
“그래.”
자카리가 천막을 나섰다. 그의 주변에 대여섯 명의 종자들이 달라붙어 그의 시중을 들었다. 종자 둘이 자카리의 검은 흑단나무창을 들었다. 꽤 무거운지 둘이서도 몇 번이나 휘청거릴 정도였다.
자카리의 검은 군마가 푸르릉, 콧김을 내뿜었다. 훌쩍 군마의 위에 올라탄 자카리는, 저 멀리 있는 경기장을 곧게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비앙카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입이 말랐다.
‘과연 비앙카는 어떤 얼굴로 날 기다리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그녀는 계속 내가 다칠까 걱정했었지. 지금도 불안해할까? 몸을 비스듬히 앞으로 내밀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아니면 새치름하니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표정일 수도 있겠군. 언제나 그랬듯이.’
후자 쪽이 좀 더 비앙카다웠다. 자카리의 입가를 비집고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본인조차 깨닫지 못한 흐트러진 미소는, 투구에 가려져 아무도 보지 못했다.
말을 몬 자카리는 경기장의 끝에 섰다. 이전 시합은 자코브의 시합이었다. 자코브가 토너먼트에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솔직히 조금 놀랐었다. 자코브가 아무리 무예가 뛰어나다 하여도 자카리에 댈 바는 아니었고, 그 이야기인즉슨 필연적으로 자코브는 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긴데, ‘그’ 자존심 높은 왕자가 질 수도 있는 싸움에 발을 디뎠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어.’
하지만 그 꿍꿍이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자카리가 경계 어린 눈빛으로 자코브를 노려보고 있는 동안, 상대가 기권 패를 던졌다. 왕족을 상대로 기량을 내보일 만큼 간이 부은 기사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승리한 자코브가 관중석을 향해 말을 몰았다.
그리고 그가 장미를 주는 상대는….
자카리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머리끝이 쭈뼛 섰다. 자코브의 말이 멈춘 건 비앙카의 앞이었다. 그는 비앙카와 한참을 뭐라 이야기 하더니, 기어코 비앙카의 손에 장미를 들려 주었다.
자카리의 기민한 시력이 곤혹스러움으로 범벅이 된 비앙카의 얼굴을 포착했지만, 그것이 자카리를 위로해주진 못했다. 자코브가 비앙카에게 수작을 부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자카리의 피가 단숨에 몸에서 빠져나간 것처럼 그의 온몸이 차게 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