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토너먼트(11)
뒤에서 비앙카를 시중들던 이본느가 살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첫 장미네요.”
“응.”
비앙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는 귀족 여인들이 장미꽃 하나에 울고 웃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그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비앙카의 심장이 크게 뛰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물론 비앙카가 받은 장미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연이어 출전한 소뵈르와 로베르가 승리를 거머쥐곤, 그녀에게 장미를 건넸기 때문이었다.
“우리 마님에게 승리의 영광을.”
“…받아주십시오.”
비앙카는 기꺼이 그들의 장미를 받았다. 소뵈르가 익살스레 과장된 손짓으로 인사를 올리고 사라진 것과 달리, 비앙카가 장미를 받아 들자 로베르는 깜짝 놀란 듯 눈을 둥글게 떴다. 그녀가 장미를 내칠까 두려워했다는 소뵈르의 말이 과장이 아닌, 사실이었던 모양이었다. 비앙카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위엄 있게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비앙카의 치마 위에는 벌써 장미가 세 개나 놓였다. 주변의 시선이 점점 비앙카에게로 날아들었다. 눈치 빠른 이들은 일찍이 비앙카의 정체를 눈치채기도 했다. 블랑쉐포르 가의 후계자와 아르노 가의 기사들이 장미를 건네는 상대라니, 너무 쉬운 추리였다.
이제 가스파르의 차례였다. 다른 기사들보다도 유난히 거대한 그가 경기장에 나타나니, 모두 숨을 죽이고 가스파르의 상대를 애도했다.
당연히 가스파르 또한 1차전을 가볍게 통과했다.
승리한 그가 말을 몰아 비앙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자, 모두가 역시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가스파르는 비앙카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가스파르의 덩치가 얼마나 큰지, 말에 탄 상태로도 단상에 있는 비앙카와 눈높이가 얼추 맞았다.
가스파르가 투구의 얼굴 덮개를 열었다. 안 그래도 무뚝뚝한 얼굴이 긴장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본느가 비앙카의 등을 떠밀듯 속삭였다.
“마님, 네 번째 장미예요.”
하지만 비앙카는 움직이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가스파르와 마주한 그녀는 그의 시선이 자신을 미묘하게 비껴 나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이본느의 재촉에도 비앙카는 빙긋 웃을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긴장 어린 얼굴로 분위기 잡고 있던 가스파르가 이내 결심한 듯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이본느.”
“…? 네?”
“받아 주시오.”
가스파르가 비앙카의 뒤에 서 있던 이본느를 향해 장미꽃을 내밀었다. 이본느는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는지 눈을 크게 뜨고 가스파르와 비앙카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당연히 가스파르 경은 마님에게….
이본느가 한참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어안이 벙벙해 있자, 비앙카가 살짝 웃으며 이본느를 재촉했다.
“이본느, 가스파르 경이 기다리시지 않니.”
“지, 지금 저 말씀이세요?”
이본느는 더듬거리며 자신을 손가락질했다. 덜덜 떠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이본느의 질문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가스파르가 다시 한 번 장미를 내밀었다.
“내 장미를 받아 주시오, 이본느.”
이본느는 뭐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가스파르가 건네는 장미를 받았다. 가스파르는 이본느의 손에 장미가 들린 모습을 보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을 상대가 인지하기 전, 말머리를 돌려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평소 어른스러웠던 이본느도 이런 상황은 처음인지 정신이 없어 보였다. 하긴, 고백받은 것도 모자라 토너먼트의 장미라니! 모든 여자들이 토너먼트에서 승자의 장미를 받는 것을 꿈꾸기는 하지만, 보통 장미를 받는 이들은 귀족 여인들이었다. 평민 여자가 토너먼트에서 장미를 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기는 했다.
정신이 혼미해진 이본느는 울상을 지은 채 비앙카에게 물었다.
“마님…. 이럴 때는 어, 어떻게 해야 해요? 왜 가스파르 경이 저에게 장미를….”
“네가 네 입으로 ‘본디 사내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 우쭐대는 법’이라 하지 않았더냐.”
“하, 하지만….”
“그 또한 우쭐대 보았을 뿐이니, 너는 네 편할 대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 그 이야기인즉슨….”
“가스파르 경이 널 좋아한다는 거지.”
“말도 안 돼요….”
비앙카의 단호한 말에 더더욱 혼란에 빠졌는지 이본느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런 이본느의 모습을 보며 비앙카는 속으로 혀를 찼다.
보아하니 지난번, 이본느가 그녀에게 자카리의 토너먼트 참여에 대해 이야기 하며 설렌다느니 했던 것 때문인 모양이었다. 앞에서는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척하고선 뒤에서 이런 계획을 세웠단 말이지. 곰처럼 생겨놓고 은근 능구렁이 같은 남자였다.
이본느는 장미를 손에 쥐고 나서도 여전히 이 사실을 믿을 수 없는지 한참 동안 장미 줄기를 매만졌다. 벅차오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얼떨떨할 뿐, 싫지는 않은 기색이었다. 그러면 되었지. 비앙카는 픽 웃으며, 이본느가 어지러운 머리를 정돈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지루한 몇 번의 경기가 더 지나갔다. 승자의 장미는 각자의 주인을 찾아갔다. 비앙카도 몇 번 더 장미를 받았는데, 상대는 비앙카와 안면도 없는 기사들이었다. 영웅인 자카리에 대한 존경심으로 그녀를 레이디로 떠받드는 이도 있었고, 그녀가 장미를 많이 받는 걸 보고 묻어가듯 건네는 이도 있었다.
장미를 받는 것이 레이디의 자부심이라면, 장미를 건네는 것은 기사의 자부심이었다. 모든 기사가 레이디를 섬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장미는 건네고 싶어 했다. 자신의 영웅적인 일대기에 있어서 완벽한 마무리라고 생각하는 자아도취 때문이었다.
그런 이들이 장미를 건네고자 하는 상대는 누구나 다 고개를 끄덕일 만한 귀부인이었다. 더불어 상대가 그 장미에 그리 깊은 의미를 두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앵무새처럼 찬사를 보낼 레이디가 필요한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연이은 장미 세례로 인해 비앙카는 오늘, 그런 기사들의 상대로 낙점되었다.
그리고 그런 상대로 낙점된 것은 비앙카뿐만이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기사들의 레이디였고, 오늘 비앙카만큼이나 장미를 많이 받은 여인, 바로 1왕녀 오델리 드 세브랑이었다.
넋을 잃을 듯한 찬란한 금발을 잘 땋아 내린 그녀의 모습은 고고히 떠오르는 태양과도 같았고, 고운 옆태는 붓으로 그린 듯 매끄러웠다. 혼기를 한참 놓쳤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에서는 혼기 따위에 연연해하지 않는, 왕족으로서의 기품과 여유가 느껴졌다.
실제로도 오델리 왕녀는 혼인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그녀는 꽃으로 피기 전부터 아름다움을 뽐내었고, 그녀가 열 살이었던 때는 이미 수십 통의 구혼 편지를 받았다. 하지만 왕은 오델리 왕녀의 구혼을 전부 물리쳤는데, 오델리 왕녀가 일찍이 죽은 그녀의 어머니, 1왕비를 몹시 빼닮았기 때문이라는 풍문이 있었다.
왕은 1왕비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고티에 왕자가 일찍부터 차기 왕으로 내정된 것은 그가 1왕비의 소생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렇게 오델리 왕녀는 스물여덟이 되었지만, 왕은 여전히 오델리 왕녀를 시집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델리 왕녀라도 나서서 결혼을 졸랐으면 모르겠는데, 그녀 또한 결혼에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오델리 왕녀는 기사들이 마음껏 찬사를 보낼 수 있는 아름답고 고귀한 레이디였다. 기사들은 앞다투어 오델리 왕녀에게 장미를 건넸다. 그렇게 장미를 바치는 이들 중, 자신만은 오델리 왕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생각하는 이도 있었다.
물론, 지금껏 오델리 왕녀가 미소를 지어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델리가 장미를 받을 때 다른 여인들은 모두 부러움에 찬 찬사를 보냈다면, 비앙카가 장미를 받으면 모두 질시 어린 눈총을 보냈다.
적의를 받는 건 피곤하다. 비앙카는 지쳤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쯤 토너먼트가 끝날까. 마음 같아서는 일찍 돌아가고 싶었지만, 자카리의 시합이 오늘의 하이라이트였기 때문에 쉽사리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렇게 시합이 하나둘 끝나 가는 와중에, 관중석이 술렁였다. 이제 자카리의 차례인가 싶었던 비앙카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단상에 걸린 가문의 방패는 아르노 가의 것이 아니었다.
바로 세브랑의 문양이었다!
경기장 끝에는 검은 갑옷을 차려입은, 세브랑 문양이 새겨진 방패를 든 기사가 있었다. 투구의 얼굴 덮개를 내려서 누군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 자리에 없는, 토너먼트에 참가할 수 있는 왕족이라면 뻔했다.
단상에 없던 2왕자, 자코브가 토너먼트에 출전한 모양이었다.
자코브는 의기양양하게 창을 추켜세웠다. 말이 가볍게 투레질하며 좌우로 움직였는데, 그것이 자코브의 여유를 보여주고 있었다.
상대가 자코브라는 걸 알게 되자, 자코브의 대전 상대는 감히 왕자님과 맞붙을 수 없다며 기권 패를 던졌다. 혹시라도 잘못해서 자코브가 큰 부상이라도 입으면 큰일이었다. 왕의 분노는 고사하고, 자코브가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상대 가문의 문장에 하얀 천이 드리웠다. 패배의 표시였다. 관중들 모두 상대 가문을 이해했는지, 기권 패를 하였음에도 야유 소리는 없었다.
자코브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렇게 될 줄 짐작했다. 아마 준준결승, 혹은 준결승이나 되어야 제대로 된 시합을 할 수 있을 터였다. 어차피 오늘의 목표는 상대를 쳐부수는 게 아니니까. 자코브는 관중석을 향해 말을 몰았다.
모두 자코브가 누구에게 장미를 줄지 궁금해했다. 자코브가 1왕비의 소생과는 사이가 안 좋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던 만큼, 1왕녀도 아니고 1왕자비도 아닐 터. 3왕비? 아니면 다른 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