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토너먼트(10)
토너먼트가 시작했는지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사람들의 함성 소리, 지나가는 기사들의 말소리가 들려오는 와중에도 그들이 있는 천막 안은 유리된 것처럼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자카리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비앙카의 답을 기다리듯 고요히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비앙카 또한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얼굴은 타오를 듯 뜨거웠고, 입술 안쪽이 바르르 떨리며 손바닥이 저릿저릿했다. 팔과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고 호흡이 가빠졌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금 이 자리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비앙카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세상에 마치 그 둘만이 남은 것 같았다.
비앙카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 제일 로맨틱한 순간이 있다면, 바로 페르낭에게 고백 받았을 때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순간 그때와 비교할 수도 없이 벅차올랐다. 애초에 페르낭을 생각할 자그마한 마음의 틈새조차 없었다.
해가 떠오르는 찰나 어두웠던 세상이 밝게 뒤덮이는 것처럼, 비앙카와 자카리가 눈을 마주하고 있는 잠깐 동안 많은 것이 생기고, 사그라지고, 변하기를 반복했다. 밤과 아침의 틈새에 스며든 새벽과 같은 기적. 그러나 그것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 채, 비앙카는 나직이 자카리의 맹세에 답했다.
“당신에게 축복을, 승리를, 영광을.”
비앙카는 자카리가 손에 꽉 쥐고 있는 손수건을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비앙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면서도 자카리는 순순히 비앙카에게 손수건을 내어주었다.
비앙카는 자카리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살짝만 잡아당겼는데도 몸이 불쑥 딸려 올라왔다. 역전되었던 시선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하지만 비앙카는 자카리가 이전만큼 크고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
자카리에게 다가간 비앙카는 직접 자카리의 팔에 손수건을 매어 주었다. 자카리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숨을 죽이고 있는지, 가까이 있음에도 숨소리 한 조각도 들리지 않았다.
비앙카가 갑옷 위로 손수건을 단단히 매었다. 은색 갑옷 위에 매인 레이스 손수건이 이질적이었다. 비앙카는 단단히 맨 손수건 위로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가장 예민한 부위에 닿는 금속의 매끄럽고도 차가운 느낌이 불꽃처럼 그녀의 입술을 뜨겁게 달구었다.
마치 숨결을 불어넣는 듯, 손수건에 길고 느릿한 입맞춤을 남긴 비앙카의 입술이 서서히 떨어졌다. 비앙카는 한 발짝, 두 발짝 뒤로 물러섰다. 천막 안에 들어서며 온갖 부정적인 상상으로 가슴 졸였던 것이 우습게, 지금은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로 발걸음이 가벼웠다. 조금 들뜬 비앙카는 자카리를 향해 사르르, 잘 익어 여문 열매 같은 미소를 지었다.
“우승, 기대하고 있을게요.”
* * *
천막이 열리고 비앙카가 쏙 빠져나왔다. 자카리가 배웅 나왔지만, 비앙카는 괜찮다는 듯 그의 가슴을 톡톡 건드리고는 발을 돌렸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본느가 비앙카의 뒤에 따라붙었다. 천막에 들어가기 전엔 한없이 심각했던 비앙카의 안색이 한결 가벼워 보였다. 흘끔 살펴본 자카리의 팔뚝에는 보란 듯이 레이스 손수건이 매어져 있었다. 주인의 기분을 살피는 것이 시종의 본분인 만큼, 이본느는 밝은 목소리로 비앙카의 기분을 맞췄다.
“잘 전해 드린 모양이네요.”
“응.”
“아까보다 훨씬 표정이 좋으세요.”
“그래?”
“네. 백작님이 기뻐하시죠?”
“그런 거 같구나.”
비앙카는 픽 웃었다. 부득불 비앙카를 배웅하러 나서던 자카리의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똑똑한 사람이 멍청한 표정을 짓는 건 퍽 재밌는 볼거리였다. 자카리가 그런 표정을 지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 봤는데.
우승을 기대하겠다 하니 자신만 믿으라며 더듬더듬 말하던 건 우스울 정도였다. 가슴 한편의 간지러움이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았다.
자카리에게 손수건을 건네러 찾아온 것은 꽤 기분 전환이 되었다. 다시 관중석으로 돌아갔을 때 페르낭만 없다면 완벽할 텐데.
하지만 그것은 바람에 그쳤다. 비앙카가 자리로 돌아왔을 때도, 페르낭은 여전히 귀부인들 사이에서 재롱둥이 역할을 톡톡히 하며 남아 있었다.
비앙카가 관중석에 앉는 순간, 류트를 타고 있던 페르낭과 시선이 부딪혔다. 페르낭이 반색하기가 무섭게 비앙카는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페르낭을 마음에 들어 하는 귀족 부인이 계속해서 페르낭을 붙잡아 놓고 말을 건다는 것 정도일까. 어느 집안 귀부인이신지는 몰라도 제발 계속 저 개자식을 붙들고 있어 주시길, 비앙카는 간절히 바랐다.
뿌, 뿌뿌뿌우우우.
비앙카가 돌아오고 오래지 않아 토너먼트의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경기장이 조용해지자 사회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세브랑 왕국의 주인, 빅토르 드 세브랑 전하의 손자이자 고티에 드 세브랑의 아들, 알베르 경과 카스티야 왕국의 주인, 가르시아 카스티야 전하의 딸 나바라 왕녀의 약혼을 축하하기 위한 토너먼트에 찾아와 주신 여러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박수 소리가 하나둘 시작되자, 비앙카도 분위기 맞추듯 느릿느릿 박수를 쳤다. 왕족들과 함께 있는 만큼, 그녀도 어느 정도 눈치를 봐야 했다.
비앙카가 있는 단상보다 한 단 높게 세워진 단상에는 세브랑 왕족과 카스티야의 사절단이 앉아 있었는데, 세브랑의 왕족은 세브랑의 왕과 왕비, 1왕자인 고티에 왕자 부부, 그리고 나이가 찬 1왕녀뿐이었다.
알베르 왕세손과 나바라 왕녀의 약혼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은 빠져 있었다. 지나치게 어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비슷한 또래인 2왕녀와 3왕녀도 불참했다. 그리고 2왕자인 자코브도 자리에 없었다. 자코브가 왜 자리를 비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페르낭만으로도 지치던 찰나였다.
첫 경기가 시작되었다.
비앙카는 알지 못하는 가문의 기사들이었다. 각 가문의 대변인이 소리 높여 기사들의 혈통과 전적을 설명했다. 기사들은 단상 앞에 놓인 분리대의 양 끝에 서며, 각자 종자에게서 창을 받고, 투구의 얼굴 덮개를 내렸다. 그리고는 깃발이 내려가기가 무섭게 서로를 향해 말을 몰았다.
“와아아아아아아아!!”
한 기사의 창끝이 상대의 방패를 꿰뚫자, 관중들이 크게 함성을 질렀다. 사람들의 환호에 비앙카의 귀청이 쩌렁쩌렁 울렸다. 방패와 함께 창도 산산조각이 나고, 방패가 꿰뚫린 상대는 몸의 중심을 잡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서로 방패를 꿰뚫지 못하고 창끝으로 헛발질 하는 경우도 많은 만큼, 이번 토너먼트는 제법 볼 만한 경기였다. 그렇게 세 번의 시합 끝에 승패가 가려졌다.
이긴 기사가 한 귀족 영애에게 다가가더니, 서코트 가슴팍에 달려 있던 장미꽃을 빼내어 건넸다. 상대의 창끝이 스쳤는지 장미꽃은 너덜너덜하였으나, 꽃을 받은 귀족 영애는 무척이나 기뻐했고, 주변 귀족 여인들은 그녀를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한 여인은 기분 나쁜 듯 고개를 홱 돌렸는데, 패배한 기사가 그녀의 애인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몇 번의 시합이 이어졌다.
관중석의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러나 자신과 별반 관계없는 이들의 경기가 그리 재밌을 리 없었다. 비앙카는 심드렁히 경기를 보았다. 하지만 비앙카도 이어지는 기사의 차례에는 몸을 바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귀스타브 드 블랑쉐포르 백작의 아들, 일각수를 타고 온 하게모니아의 후예, 조아생 드 블랑쉐포르 경입니다! 모두 박수로 맞아주십시오!”
대변인의 외침이 끝나자, 비앙카의 오빠 조아생이 블랑쉐포르 가의 문양인 하얀 일각수가 그려진 방패를 들고 나섰다. 그의 투구 꼭대기에도 일각수의 뿔을 형상화한 것 같은 조각이 장식되어 있었다.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긴 구멍을 제외하고 머리 전체가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비앙카는 정말로 저기 서 있는 기사가 조아생인지 확인하기 위해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깃발이 내려가는 순간, 비앙카의 심장이 덜컹였다. 가끔 말에 떨어지거나 잘못된 위치에 창을 맞아 큰 부상을 입은 이들이 있는데,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녀의 남편인 자카리야 대단한 기사라 하니 그런 실수는 하지 않겠지만, 오라버니는….
조아생과 재회한 것이 얼마 전인 데다, 서로 서먹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만큼 비앙카는 조아생이 얼마만큼의 실력을 가졌는지 알지 못했다. 비앙카의 눈동자가 조아생의 움직임을 바짝 좇았고, 그녀의 입안은 침이 바싹바싹 말랐다.
다행히도 조아생은 두 번의 승리를 거두었다. 투구를 열자 환하게 웃는 오라버니의 모습이 보였다. 조아생은 관중석을 둘러보더니, 비앙카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말을 몰아 다가왔다.
“오라버니.”
“내 장미꽃을 받아 주렴, 비앙카.”
“물론이지요.”
비앙카는 살포시 웃으며, 조아생이 건네는 장미꽃을 받았다. 그러면서 말 위에 있는 조아생을 향해 몸을 기울여, 뺨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조아생도 작게 웃으며 비앙카의 뺨에 입술을 대었다. 가벼운 인사 뒤, 조아생은 말을 몰아 당당하게 경기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종자들은 먼지를 덜 나게 하기 위해 경기장 바닥에 물을 뿌렸다. 다른 이들이 다음 시합을 준비하는 동안, 비앙카는 손에 쥔 장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오라버니가 참가하는 줄도 모르고 있던 무심한 동생이다. 그에게 장미를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만큼 얼떨떨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