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토너먼트(8)
류트를 퉁기며 노래를 부르는 페르낭은, 비앙카의 기억 속 모습보다 훨씬 풋풋하고 싱그러웠다. 귀족 마나님들에게 살살 눈웃음치며 비위를 맞추는 모습 위로, 아르노에서 쫓겨난 비앙카를 비아냥대던 모습이 겹쳐졌다.
페르낭은 귀족 마님들을 상대하며 예쁨을 받는 것에 익숙해 보였다. 그것은 비앙카에게 조금 충격이었다. 과거의 페르낭은 자신이 좀처럼 귀족 마님들의 호의를 받지 못한다며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었기 때문이었다. 비앙카는 그런 페르낭의 모습에 자신을 비춰 보고, 그를 더 안쓰럽게 여겼다. 그리고 비앙카가 내어 준 틈새를 페르낭은 필사적으로 파고들었다.
‘저에겐 마님밖에 없어요. 이 세상에서 마님만이 유일하게 절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세요….’
그리 말하며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떠는 모습은 그리도 안타까워 보였다. 그때의 비앙카는 페르낭의 태도에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처량한 모습에 동정심이 들어 찜찜함을 잊어 넘겼다. 그 새빨간 거짓말에 어찌나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는지. 솔직히 지금 생각하면 비웃음밖에 나지 않았다.
비앙카는 휘청거리는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가 혼란스럽다 못해 지끈거렸고, 팔다리는 후들거렸다.
‘그나저나, 페르낭이 도대체 왜 여기에…?’
비앙카는 의문을 품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니 여기에 그가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번 알베르 왕세손의 약혼은 유례없이 성대한 의식이었고, 어지간한 뜨내기들도 전부 수도로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높으신 분들에게 잘 보이고, 잘하면 크게 한탕 할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던 많은 음유시인들이 몰려왔다. 페르낭 또한 그렇게 성공의 단꿈을 꾸며 수도로 올라왔으리라.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페르낭, 위그 자작, 자코브 왕자까지. 전생에 원한이 있는 자를 전부 이 수도에 몰아 놓은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표정 관리를 해 왔지만, 페르낭을 마주하니 노력이 무색했다. 그를 믿었던 만큼, 뒤통수 맞았을 때의 충격이 더 생생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던 비앙카는 페르낭에게서 시선을 떼고 숨을 고르려 노력했다.
전생보다 지나치게 이른 시기에 페르낭을 만나 당황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페르낭 따위에 감정을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이대로 최대한 페르낭을 무시하자. 페르낭에게 어떻게 복수할지는 차후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는 세상 모든 일이 비앙카의 바람대로 흘러간 적이 있던가? 비앙카가 페르낭에게서 시선을 떼기가 무섭게, 저쪽에 있던 페르낭이 비앙카를 향해 다가왔다.
비앙카가 페르낭에 대해 한 추측은 거의 다 맞았다. 이번에 수도에서 크게 한탕 하기 위해 단단히 작정하고 온 페르낭은 토너먼트를 기회 삼아 귀족 마님들에게 눈도장을 찍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후원자만 한 분 잡아도 인생이 피리라. 미남 미녀로 유명한 세브랑 왕가만큼은 아니더라도 페르낭은 얼굴에 자신이 있었고, 그 잘난 외모만큼이나 목소리도 좋았다. 어수룩한 귀족 마님 한둘 꾀는 것 정도는 문제없었다.
그렇게 꿍꿍이를 품은 페르낭은 한껏 꾸미고 토너먼트 경기장에 나섰다. 미리 안면을 터 둔 자작 부인의 덕으로 귀족 마님들이 있는 단상까지 손쉽게 오를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단상에 오르기도 전에 엉덩이를 차여 데굴데굴 굴렀을 것이다.
그렇게 단상 위에 오른 페르낭은 수컷 공작새처럼 화사하게 끼를 부렸다. 류트 연주를 하며 주변의 눈치를 보니, 다행히도 마님들의 시선이 곱다. 페르낭은 흡족히 미소 지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 페르낭을 향해 내리꽂힌 강렬한 시선이 있었다. 흘끔 곁눈질로 살펴보니, 웬 곱게 차려입은 어린 귀족 영애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 귀족 영애는 희게 질린 비앙카였다.
됐다. 물었다. 그리 생각한 페르낭의 입꼬리가 채신머리없이 올라갔다. 비앙카가 그에게 관심이 있다고 단단히 착각한 페르낭은 차츰차츰 비앙카에게로 다가갔다.
귀한 집 영애, 혹은 젊은 마님. 그녀의 옷차림을 보아하니 돈이 많은 집안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잘만 꾀면 꽤 손이 큰 물주가 될 것이다. 나이가 어리니 경험도 적을 테고, 이런 여자아이가 한번 사내에게 꽂히면 눈 돌아가서 뒤도 안 돌아보곤 한다. 비앙카를 단단히 찍은 페르낭은 최대한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름다운 영애의 성함을 여쭈어봐도 실례가 아니겠습니까?”
“…….”
비앙카는 어찌할 바 모르는 시선으로 페르낭을 바라보았다. 남들은 달콤하다 말해 줄 목소리도 비앙카에게는 질척이고 느물거릴 뿐이었다. 페르낭과는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던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짜증을 넘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 비앙카의 모습을 수줍어서 그러는 거라 착각한 페르낭은 다시 한 번 재차, 끈기 있게 물었다.
“영애를 보고 한눈에 반했습니다. 그대의 아름다움에 대해 노래를 몇 곡이고 부를 수 있을 것만 같아요. 미천한 소인에게 부디 자비를 베풀어, 영애의 성함을 알려주세요.”
“…자.”
“실례지만, 영애. 다시 한 번만….”
조용히, 혼잣말을 속삭이는 듯한 비앙카의 목소리에 페르낭이 다시 입가에 꿀을 바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채근했다. 하지만 비앙카가 그에게 답하는 일은 없었다.
평소였다면 가스파르가 그를 내쫓았을 테지만, 하필 오늘은 가스파르가 토너먼트에 참여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이 자리가 끔찍했던 비앙카는 페르낭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본느. 출전 전에 남편을 보러 가야겠다.”
턱 끝을 꼿꼿이 당긴 비앙카는 페르낭을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그와는 같은 공간에서 숨결이 섞이는 것조차 역겨웠다. 비앙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상을 내려갔고, 이본느는 당황하여 그녀의 뒤를 허겁지겁 따랐다.
아닌 척 비앙카와 페르낭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귀부인들은 그런 비앙카의 태도를 무척 무례하다 여겼다. 아무리 상대가 음유시인 나부랭이라고는 하지만, 바로 코앞에서 이야기하는 상대를 저리 무시하다니!
저렇게까지 애달프게 구애하는 사내를 무시하는 건 궁정 연애에 미숙한, 기사들에게 떠받들어질 숙녀로서의 자격이 없는 여인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귀부인들이 앞다투어 비앙카를 향해 흰 눈을 뜨는 것은, 페르낭의 잘생긴 외모 때문이기도 했다.
귀족 여인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비앙카를 헐뜯는 것에 비해, 비앙카에게 대차게 무시당한 당사자 페르낭은 별로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편을 보러 간다는 것을 보아하니 결혼한 모양인데, 남편이 있는 그녀가 이런 식의 궁정 연애에 익숙지 않아 당황하여 저리 매몰찬 반응을 보인 거라 생각했다.
좋은 집안 영애이니 가문 간의 결혼을 했을 테고, 보통 그럴 때는 남편이 중늙은이인 경우가 태반이다. 늙은 남편을 두고 저같이 잘생기고 젊은 사내를 마주하니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비록 지금은 남녀 간의 자연스러운 끌림이 어색하여 저리 반응했지만, 페르낭은 분명 그녀의 눈빛에서 타오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가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오래 지나지 않아 그녀도 그에게 마음을 열 것이다.
그렇게 페르낭은 기대에 찬 헛물을 들이켰다.
* * *
비앙카의 턱을 타고 식은땀이 한 방울 똑, 하고 떨어졌다. 어차피 자카리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러 갈 생각이기는 했지만, 건네줄 손수건이 없다 하더라도 뛰쳐나왔을 터였다.
비앙카는 발을 재촉하며 머리를 식히려 노력했다. 어지러운 머릿속을 좀 정돈하려고 했지만 생각할 게 많다 보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지금껏 흩어져 있던 편린들이 하나둘 모였다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도대체 왜 페르낭이 비앙카에게 말을 건 걸까?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어서가 아닐까? 과거에 비앙카를 타락시키려 했던 것처럼 자코브, 혹은 위그 자작이 사주한 것일까?
하지만 지금의 비앙카는 과거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뿐이랴. 페르낭은 그저 음유시인일 뿐이니, 왕족이었던 자코브 때와 달리 그녀가 내숭 떨며 눈치 보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허튼수작을 부리려고 하기만 해 봐라. 치솟은 분기에 비앙카의 눈이 번뜩였다.
생각을 정돈하기는커녕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전, 비앙카는 자카리가 머무는 아르노 가의 천막에 도착했다. 가문의 위세가 높거나 과거 토너먼트 전적이 좋을수록 경기장에서 가까운 곳에 천막이 배치되었고, 당연히 아르노 가의 천막은 경기장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세워졌다. 그 때문에 비앙카는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고, 여전히 머리는 복잡했다.
이본느는 심상치 않은 주인마님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이본느와 비앙카의 눈이 마주쳤다.
어차피 여기서 우뚝 서서 생각을 정리해 봤자 이 어지러운 머리가 그리 쉽게 정리될 리 없다. 주변에 지나다니는 기사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는 것도 불쾌했다. 비앙카는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고, 이본느도 마주 끄덕인 뒤 천막 안으로 목청을 높여 비앙카의 방문을 고했다.
“백작님, 마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