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토너먼트(5)
그날,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자카리가 그녀의 방으로 들이닥쳤다. 의자에 늘어지듯 앉아 있던 비앙카는 난데없는 그의 방문에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자카리가 손을 내젓는 게 먼저였다. 안 그래도 잠시간의 외출로 기력을 모조리 소진했던 비앙카는 기꺼이 자리에 앉았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와 같았다. 표정으로 그의 기분을 가늠하는 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에, 비앙카는 주변도 같이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 톤. 걸음걸이의 보폭. 비앙카를 향해 어디까지 다가오는지와 같은 사소한 것들. 그런 정보를 종합하면 그의 기분이 어떤지 정도는 대략적으로 감 잡을 수 있었다.
미약하게 떨리는 눈동자. 유달리 큰 보폭. 무언가 말하려다 다문 입매. 자카리는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 보였고, 당황스러워 보였다. 비앙카는 손톱 끝으로 의자의 나무 손잡이에 덧대어진 천의 결을 슬슬 긁으며, 그가 그럴 이유가 뭐가 있을지 추론해 보았다.
하지만 비앙카의 궁금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자카리가 제 입으로 그 이유를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하녀를 만났다는 것이 사실이오?”
가스파르. 입이 무거운 사내인 줄 알았는데, 누구보다도 가벼울 줄이야. 그 잠깐 사이에 어디 갔나 싶었더니 조로록 자카리에게 가서 보고한 모양이었다. 입만 가벼운 게 아니라 엉덩이도 가볍네. 비앙카는 작게 쳇, 하고 혀를 찼다.
앙트를 만난 게 사실이냐 재차 되묻는 자카리의 목소리가 다급하고 초조하지만 않았더라면, 비앙카는 자카리가 그 때문에 자신을 찾아왔을 거라고는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럴 만한 일이 아니니까.
자카리도 그렇고 이본느도 그렇고 이상하게 호들갑을 떨긴 하는데, 사실 비앙카로서는 그들이 그러는 이유를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비앙카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기가 무섭게 자카리는 비앙카의 안색을 이모저모 급히 살폈다. 대뜸 비앙카의 손을 잡아끌더니 손바닥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뭐야. 내가 성질을 못 참고 뺨이라도 올려쳤을까 봐? 비앙카의 뺨이 씰룩였다. 하지만 자카리는 그를 알지 못하고 계속해서 비앙카를 살폈다. 어디 다친 곳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가스파르가 같이 있었으니 별일 없었겠지.”
“그러니까요. 가스파르 경이 함께 있었는데 별일이 뭐가 있겠어요.”
픽 웃은 비앙카는 옆에 있는 이본느에게 눈짓했다. 이본느는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와 자카리가 앉기 좋은 위치에 놓았다. 자카리가 의자에 앉고 나서야 불균형하던 두 사람의 시선이 얼추 맞게 되었다.
예전의 비앙카였다면 자카리가 그 여자를 빼돌린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했을지도 모른다. 비앙카의 앞에서는 애써 냉정한 척 쫓아내고는, 뒤로는 자신이 아는 귀족에게 보내 은밀하게 정사를 이어 가고 있다는, 그런 피해망상.
하지만 회귀하고 나서 육 개월간 지켜봐 온 자카리의 성격을 보아하건데, 그는 그럴 주변머리도 되지 않는 사내였다. 정부가 있었다는 소문이 횡행했던 것이 우스울 정도였다. 그 정도로 약삭빠르게 행동할 줄 아는 사내였다면 좀 더 저에게 달콤하게 굴거나, 아주 매정하게 굴었겠지. 이렇게 필요 없는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쓸 것 없이.
그렇다 해서 자카리가 비앙카를 좋아한다는 이본느의 말을 믿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냥…. 자카리는 성실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니 하나뿐인 부인인 그녀를 대우해 주려 노력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그녀의 등 뒤에 있는 블랑쉐포르 가와의 동맹에 대한 예우 때문일지도 모르고….
물론 그 논리에 모순이 없는 건 아니었다. 비앙카가 아버지를 만나기 싫다 하였을 때, 정말로 자카리가 블랑쉐포르 가를 신경 썼다면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 그리 흔쾌히 말했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그 정도가 비앙카가 생각하는 최선이고, 한계였다.
비앙카는 상대가 자신을 사랑한다 섣불리 확신하는 것이 두려웠다. 사랑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 알게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자신을 사랑할 거라는 지레짐작은 그녀의 마음에, 상대에 대한 사랑을 싹트게 했다. 그녀는 외로웠고, 쓸쓸했다. 자신을 사랑한다 말하는 페르낭은 그녀에게 가뭄에 단비나 다름없었다. 그 결과가 어땠던가? 잔혹한 배신! 결국은 그녀 혼자만의 사랑이었으며, 그 사랑조차 이용당한 굴욕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하물며 상대가 자카리어서야.
그가 그녀의 합법적인 남편이기에, 이미 그녀의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내이기에 오히려 더 그의 사랑을 믿을 수는 없었다. 믿어서는 안 된다. 그에게 배신당한 상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자카리의 신의를 믿는 것과 별개로, 이것은 비앙카 그녀를 지키기 위한 최저한의 안전장치, 마지노선이었다.
비앙카는 그냥 지금과 같은 사이 정도에 만족했다. 서로 마음은 확인하지 않은 채, 존중하고, 배려하고…. 좀 더 육체적으로 가까워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테지만, 그것이 미래를 불안히 여기는 것에 기반을 둔 그녀의 욕심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여튼, 그들 관계에 굳이 사랑이 끼어들 필요는 없었다.
블랑쉐포르 가와의 관계가 개선된 이후, 비앙카는 자카리와의 첫날밤에 예전처럼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내년에는 그에게 안길 테고, 그때부터 노력해도 늦지 않는다. 블랑쉐포르 가만 건재한다면, 그녀가 꼭 아르노 가에 남아 있기 위해 목을 맬 필요는 없으니까….
그 순간 비앙카의 가슴 한구석이 꽉 죄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압박 어린 고통.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비앙카가 고통의 원인을 짐작하려 노력하는 찰나, 의자에 앉은 자카리가 손을 까닥이며 말했다.
“물을.”
그제야 골몰했던 상념에서 퍼뜩 깨어난 비앙카는 이본느에게 물병이 있는 곳을 향해 턱 끝을 까닥였다. 바로 이본느가 컵에 물을 따라 대령하자, 자카리는 그대로 물을 들이켰다. 꿀꺽꿀꺽, 흘러가는 물의 움직임을 그대로 보여주듯 그의 목이 거칠게 움직였다. 목을 축인 자카리는 깊게 숨을 뱉었다. 비앙카는 어색하게 굳은 뺨을 애써 올린 채,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급하게 오셨나 봐요.”
“아아.”
자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스파르에게 보고를 받기가 무섭게 허겁지겁 달려왔는데, 비앙카가 멀쩡한 걸 확인하고 나니 그제야 좀 안도가 되었다.
그 하녀는 자카리의 성에서도 버릇없이 주인마님인 비앙카에게 대들었던 여자였다. 수도에서 다른 귀족을 등에 업고 무슨 짓을 할지 몰랐던 만큼, 그 자리에 가스파르가 있었다는 걸 알면서도 일순 심장이 철렁하였다. 누구 밑에 있나 정도는 파악해 두는 게 좋겠군.
수도는 너무 위험하다. 특히 사람이.
자카리는 한숨 돌리고 나서야 찬찬히 비앙카를 살펴볼 수 있었다. 나름 평정을 가장하려 한 것 같았지만, 갑작스러운 남편의 돌발 행동에 당황한 듯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자카리는 그제야 제가 무례했음을 깨닫고 작게 후회의 탄식을 내뱉었다.
표정이 어색한 것을 제외하면, 오늘따라 유난히 비앙카의 모습이 눈부셨다. 들이치는 햇빛이 그녀의 붉은 드레스를 하얗게 물들였고, 그녀의 눈동자와 같은 색의 목걸이가 영롱히 빛났다. 막눈인 그가 비앙카를 위해 무척이나 심사숙고하여 고른 물건이었다.
그녀가 그 목걸이를 한 걸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금껏 마음에 차지 않아 착용하지 않는 건 줄 알았는데, 이번 수도행에 가져왔을 줄이야…. 알 수 없는 뿌듯함이 자카리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목걸이가 잘 어울리는군.”
“그럼요. 누가 골라 주셨는데요. 드레스는 어때요? 그때 당신이랑 같이 고른 옷감으로 만든 거예요. 기억나요?”
“기억나다마다. 역시 잘 어울려.”
드레스 자락을 슬쩍 들추는 비앙카의 모습에 자카리는 멍하니 앵무새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꼴이 구국의 영웅답지 않게 퍽 멍청해 보였던지라, 잠시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사라졌다. 비앙카는 짓궂게 웃으며 자카리를 골렸다.
“잘 어울린다는 말 말고는 다른 해주실 말씀은 없으세요?”
“…아름다워.”
자카리는 곤궁스러운 듯 비앙카의 눈치를 보며 작게 덧붙였다. 입 발린 말에 약한 사내였다. 궁여지책으로 짜낸 칭찬이라고 해 봐야 투박하기 그지없다. 이러니 그가 주변머리 없는 사내라는 것이다. 애초에 자카리가 화려한 수식어로 그녀를 칭송하기를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비앙카는 픽 웃으며 덧붙였다.
“이 드레스에만 백작님의 준마 두 필 값이 들었는데, 아름다워야죠. 뱅상이었다면 한참 잔소리를 했을 거예요.”
“왜 잔소리를 하지?”
“돈이 아깝다고요.”
“아깝지 않아. 이렇게 잘 어울리는 걸. 그대가 갖고 싶은 건 내 뭐든 사 준다 하지 않았던가.”
자카리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그의 까만 눈동자가 비앙카의 옷차림새를 살피는 듯 위아래로 움직이더니,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시 봐도 잘 샀다 곱씹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비앙카는 잠시 자카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칭찬은 잘 못하면서도 저런 낯부끄러운 소리는 잘만 해댔다. 가끔 이런 걸 보면, 여자를 대하는 것이 능숙한 건지 서투른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