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76화 (76/192)

#76 토너먼트(4)

“밀회 상대를 찾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저희들이 같이 산책하자고 한 걸 달가워하지 않은 게 아닐까요? 아,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이에요.”

“말도 안 돼요! 시녀에 호위까지 두고 어떻게요?”

“뭐…. 제 추측일 뿐이라니까요. 아니면 그 호위와 밀회하는 걸 수도…. 상당히 늠름해 보이던데.”

셀린느는 그녀의 뒤를 따랐던 거대한 호위를 떠올렸다. 얼마나 커다란지 한참 위에 있는 얼굴이 어찌 생겼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바지 위로 드러난 윤곽이 대충 어땠는지는 기억했다. 밀회 상대로는 손색이 없는 크기였다.

셀린느가 늠름하다며 손대중을 하자, 금회색 머리카락을 지닌 길다드 남작 부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자극적인 이야기에 너무 흥분해서였다. 그녀는 열을 내며 비앙카를 두둔했지만, 실제로는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아무래도 그렇죠. 아르노 백작이 알면 큰일 나는 걸요!”

“하지만 여기는 수도니까요. 그렇게 칙칙한 여자라도 로망을 꿈꿀 수도 있잖아요.”

금발 귀족 여인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들은 정말로 비앙카가 밀회 상대를 찾고 있는지, 호위와 불륜을 저지르는지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런 식으로라도 비앙카를 깔아뭉개어 그들의 자존심을 드높이는 것이 중요했다. 카트린은 이 대화에 끼지도 못하고, 벗어나지도 못한 채 전전긍긍했다.

“…저, 마님들.”

그때, 시녀 하나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카트린의 시녀였는데, 그녀는 자신이 금발이라 우기는 세 명의 귀족 여인들보다 더 화사한 금발을 지니고 있었다. 내심 그녀의 머리카락을 시기하던 귀족 여인들은 짜증스레 그녀를 째려보았다. 길다드 남작 부인은 시녀에게 손가락질하며 날카롭게 화를 냈다.

“지금 네가 뭐라고 대화에 끼어드는 거냐? 네가 건방지게 구는 건 다보빌 백작 부인의 명예에 먹칠하는 거라는 걸 아느냐?”

“죄송합니다. 제가 건방지게 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마님들께서 궁금하실 만한 이야기를 알고 있어서요….”

시녀는 굽신굽신 허리를 숙였다. 그럴 때마다 귀 옆으로 늘어트린 금발이 흘러내리며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머리카락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얼굴도 제법 예뻤다. 그 시녀의 외모가 눈꼴이 시리기는 했지만, 시녀가 무슨 이야기를 알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

시녀는 카트린이 데려온 아이였다. 주인인 카트린이 허락하지 않으면, 시녀는 이야기를 꺼낼 수 없는 것이 관례였다. 금발 귀족 여인들의 간절한 시선이 카트린에게 꽂혔다. 카트린이 허락하지 않으면, 허락할 때까지 조를 기세였다. 카트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로서는 이들을 만류할 기력이 없었다.

“그래. 말해 보거라.”

카트린이 무기력한 어조로 허락한 순간, 금발을 지닌 여인들의 입가엔 희열을 애써 숨기려는 듯한 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지저분한 속내를 덮어 깨끗하고 고결한 척하려는,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한 미소였다.

* * *

정원에서 귀족 여인들과 마주쳤을 때, 이본느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잘하면 그들과의 만남으로 비앙카가 소문을 해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였다.

하지만 일은 점점 이상하게 흘러갔다. 노골적으로 탐색하는 그녀들에게 불쾌감을 느낀 비앙카의 반응이 날카로웠다. 그나마 최저한의 예의나마 차려 준 것이 비앙카의 최선이라는 걸 이본느도 알았다.

‘하지만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혹시라도 마님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 저들이 기분이 상해 엉뚱한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면 어쩌지….’

이본느는 우려스레 귀족 여인들을 흘끔거렸다. 그러던 와중, 귀족 여인들의 뒤에 있는 시녀 중 낯익은 이를 발견했다. 그녀가 누군지 깨달은 이본느는 눈을 크게 홉떴다.

‘왜 앙트가 여기에…?’

앙트가 아르노 영지에서 쫓겨난 뒤,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아닐까, 아니면 평소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던 귀족의 집으로 들어간 걸 수도. 하인들은 많은 가설을 제시했지만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었다.

추측만이 난무한 와중, 앙트는 점점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앙트가 쫓겨난 일로 이본느를 배신자로 매도했던 이들도 점차 괴롭힘을 멈췄고, 비앙카가 몇몇 하녀들에게 레이스 짜는 법을 가르쳐준 뒤로는 되레 비앙카에게 잘 보이려 애썼다.

그렇게 잊힌 그녀가 귀족의 시녀로 수도에 와 있을 줄이야. 마님도 그들 중 이본느가 있는 걸 알고 있을까? 이본느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비앙카를 불렀다.

“마님, 마님!”

“왜 그러니?”

“방금 그 귀족 분들 있잖아요.”

“응. 그래. 그 불쾌한 사람들.”

비앙카는 짜증스레 답했다. 그들에 대해 다시 떠오르는 것도 싫다는 태도였다. 평소의 이본느였다면 눈치 있게 이쯤 해서 입을 다물었겠지만, 오늘은 화제가 화제인지라 그럴 수 없었다. 이본느는 다급히 비앙카를 재촉했다.

“그 귀족 분들을 따르던 시녀 중에 하나가 바로 앙트였어요. 기억나세요? 마님께 대들었다가 쫓겨난 그 앙트요!”

“앙트…? 누구였더라….”

비앙카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앙트의 이름을 한번 되뇌어 보았다가, 아까 만났던 그 천박한 귀족들의 뒤에 서 있던 시녀들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역시나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에겐 다른 골치 아픈 일이 많았다. 기억한다는 것은 신경 쓴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낱 쫓겨난 시녀의 이름을 신경 쓸 정도로 비앙카는 여유롭지 못했다. 비앙카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에 이본느는 입을 딱 벌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앙트를 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앙트가 쫓겨난 지 꽤 시간이 흘렀다고는 하나, 고작 육 개월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본느가 비앙카의 시녀가 된 것도 앙트의 일과 엮여 있지 않던가. 그들의 첫 만남이 얽혔던 만큼, 비앙카가 기억 못 하는 게 조금 섭섭하기도 했다. 이본느는 속상함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다시 한 번 물었다.

“기억 안 나세요? 마님에게 뺨을 맞아서, 제가 마님 손 찜질을 해드렸잖아요.”

“아아…. 네가 손 찜질해 준 건 기억난다.”

그제야 이본느의 얼굴이 풀렸다. 앙트는 기억 못 해도, 이본느 저와 얽힌 일은 기억한다니 좀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솔직히 사람은 호의보다 악의를 더 오래 기억하지 않던가. 이본느가 비앙카에게 해 준 일보다, 앙트가 비앙카에게 저지른 일이 기억에 오래 남는 일이었을 텐데. 마님은 참 마음이 넓으신 분이구나. 이본느는 속으로 감탄하며 그때 그 일이 맞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런 애도 있었지. 그 성질머리에 잘도 그 짧은 시간에 귀족가의 시녀가 되었구나.”

비앙카는 감탄했다. 그녀의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신기함마저 서려 있었다. 제 외모만 믿고 날뛰는 그 성질머리에 어떻게 귀족의 시녀가 되었단 말인가? 성에서 잡일을 거드는 하녀가 아닌, 귀족 여인을 바로 근처에서 보필하는 시녀가 되려면 자숙과 인내가 필수였다. 딱히 그녀의 기억 속의 앙트가 그런 인간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런 여인을 시녀로 뽑은 귀족이 그 넷 중 누구인지는 몰라도 사람 보는 눈이 정말 없구나 싶었다.

비앙카가 앙트를 기억해낸 듯하자, 이본느는 신이 나서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마님의 소문이 어디서 퍼졌나 궁금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어요. 앙트 그 기집애가 사방팔방 입을 가볍게 놀린 게 분명해요.”

“뭐…. 걔가 그런 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니. 근데 내 소문이 돌았어?”

“네! 무척 악질적인 소문이요!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야 해요. 마님의 평판이 하루가 다르게 뚝뚝 깎이고 있다고요. 아…. 하지만 너무 걱정 마세요. 그렇게 걱정하실 만한 소문은….”

앙트의 일에 분개하여 저도 모르게 주절주절 말하던 이본느는 뒤늦게야 아차 했다. 소문에 관한 건 말해선 안 됐는데. 혹시 마님이 걱정하시면 어떻게 하지….

뒤에서 가스파르가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이본느는 그를 향해 째릿 눈을 흘겼지만, 자신이 경솔하게 군 것이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본느는 가스파르에게 한 소리 하는 대신, 별일 아니라며 급하게 수습했다.

이본느가 전전긍긍하는 것과 달리 비앙카는 태연했다. 과거에 앙트가 건방지게 굴었다고는 하나 비앙카는 다 잊은 일이었다. 뺨을 시원하게 올려붙이고, 제 시야에서 치웠다. 그러니 비앙카에게 남은 은원이 무엇이 있겠는가? 남이 자신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도 익숙했다. 그것이 수도라 하여 달라질 것은 없었다.

선만 넘지 않는다면야, 앙트가 뒤에서 뭘 하고 다니든 어느 정도 흘려 넘겨줄 생각도 있었다.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고개를 내젓는 비앙카의 모습은 느긋하기까지 했다.

“당장은 어찌할 수가 없잖니. 걔가 소문을 퍼트리는 걸 내가 본 것도 아니고. 걔가 어느 집안 시녀인지도 모르고.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어느 가문 영애들인지도 난 모르는걸.”

“저만 믿으세요. 제가 꼭 알아 올게요. 꼭이요.”

“응…. 그래. 네가 하고 싶다면 그러렴.”

꼭 앙트의 행방을 알아 오겠다며 호언장담하는 이본느는 의욕적이었다. 비앙카에게 없는 의욕이 전부 이본느에게 간 모양이었다. 이본느가 모처럼 저렇게 강하게 주장하는데, 하지 말라 하기도 뭐했던 비앙카는 심드렁히 그러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는 앙트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보다, 이본느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더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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