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토너먼트(3)
“선객이 있으신 줄 모르고 소란을 피웠네요. 실례지만 어느 가문의….”
볼네 자작가의 영애, 셀린느는 싱긋 눈을 접어 웃으며 재빠르게 비앙카의 옷차림을 훑었다. 드레스는 무척이나 고급스러워 보였다. 붉은색이라니! 염료 값이 두려워 그녀는 엄두도 못 내는 드레스였다. 얼마나 부자이기에, 순간 그녀의 눈에 시기와 부러움, 그리고 비앙카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욕심이 치솟았다.
하지만 잘 보니 목걸이의 보석은 페리도트였다. 저렇게 크고 투명한 페리도트는 처음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에메랄드에 비하면 급이 떨어지는 보석으로 저런 드레스에 걸맞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집안 또한 드레스에 걸맞은 급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저런 차림새로 산책을 할 정도면 어느 정도 ‘어울릴 만한’ 집안의 여인일 것이다. 그냥저냥 허영심 높은 쭉정이라 해서 입을 수 있는 드레스는 아니니까. 거기에 뒤에 따로 두고 있는 호위까지. 거기다 호위로 서 있는 사내는 무척 덩치가 컸고, 위협적이었다. 셀린느는 조금 위축되었지만, 그녀가 졸아붙을 이유는 없다 생각하며 목을 길게 뺐다.
어쨌든 그녀의 가문이 무엇인지만 알게 되면 모든 궁금증이 해결되리라. 짧은 시간 동안 열심히 머리를 굴린 셀린느가 눈을 빛냈다. 짧은 시간에, 옷차림새만 보고 이보다 더 많은 정보를 캐낼 수는 없으리라. 셀린느는 자신의 약삭빠른 대처와 예리한 눈치를 자화자찬하며 우쭐해했다.
하지만 몰래 비앙카를 탐색했다고 생각한 셀린느의 생각과 달리, 그녀의 생각은 비앙카의 손바닥 안이었다. 비앙카는 셀린느의 시선이 자신의 목걸이에 유난히도 오래 머무른 것과, 목걸이의 보석을 본 그녀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진 것을 놓치지 않았다. 비앙카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평가절하당했다는 것을 기민하게 깨달았다. 비앙카의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성격도 나쁘고, 안목도 나쁘다. 페리도트가 에메랄드에 비하면 값이 싼 광물이기는 했다. 하지만 페리도트를 장식하는 진주 목걸이는 알이 굵고 잡티 없이 뽀얬으며 매끄러웠다. 펜던트의 보석으로는 평가질 하면서, 이렇게 귀한 상등품 진주 목걸이에 페리도트를 달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까지는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의미조차 모를 정도로 머리가 나쁘거나, 아니면 진주 목걸이의 급까지는 알아볼 정도의 안목이 아니거나. 그러면 적어도 성격이라도 좋아야지. 셀린느가 못마땅했던 비앙카는 뚱한 표정으로 툭 하니 말했다.
“비앙카 드 아르노입니다.”
마음만 같아서는 이름조차 대답해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상대는 귀족이었다. 어느 가문의 여식인지 모르는 이상 최저의 예의를 지킬 필요는 있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최저일 뿐이다. 보통은 신상에 대해 물으면 상대방에게 되묻는 것이 관례지만, 비앙카는 입을 다물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비앙카는 우아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저는 이만 자리를 뜰 테니, 여러분은 느긋하게 둘러보시지요.”
“저희 때문에 자리를 피하실 필요는 없어요. 같이 둘러보는 건 어때요?”
아르노라는 말에 깜짝 놀란 다른 여인이 서둘러 비앙카를 잡았다. 금회색 머리카락의 얼굴 광대가 뚜렷한 여인이었다. 다른 금발 여인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이 소란을 떠는 동안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은 당황한 채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어딜 봐도 주변인들에게 휘둘리는 모양새다. 그 모습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비앙카가 신경 써 줄 일은 아니었다.
모처럼의 산책이 방해받았다는 짜증을 가라앉히는 것만으로도 비앙카로서는 충분히 그들을 배려해주는 것이었다. 비앙카는 질척질척 그녀를 붙들려는 그들의 미련 어린 말을 짜증스레 끊어냈다.
“아뇨. 몸이 안 좋아서. 그럼.”
냉정하게 이야기를 쳐낸 비앙카는 총총 정원을 나왔다. 소란은 질색이었다. 어울리고 싶지 않은 이들과 억지로 어울리는 것도 싫었다. 억지로 살갑게 웃고 다가가려 노력하는 건 그녀의 남편에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비앙카가 발을 옮기기가 무섭게 이본느와 가스파르가 그녀의 뒤를 쫓았다.
가스파르의 시선이 그들을 잠시 응시했다. 마치 그녀들이 누구인지, 대신 기억해 두겠다는 듯이.
비앙카가 떠나고, 정원에 남은 네 명의 귀족 여인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곧이곧대로 자신의 기분 나쁨을 드러내는 경우는 두 가지였다. 예의를 모르거나, 아니면 예의를 차릴 생각이 없었거나.
아르노 백작 부인이라면 블랑쉐포르 가의 여인. 예의를 모를 리 없으니 후자임이 분명하다. 자신들이 모욕당했다 생각한 여인들은 하나둘 분통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저 여자가 그 유명한 아르노 백작 부인이라고요?”
“소문이 완전 거짓말은 아니네요.”
“어쩌면 저렇게 안하무인일 수가….”
“‘그’ 아르노 백작도 저 백작 부인에게는 두 손 번쩍 들었다 하더라고요.”
금발의 귀족 여인 셋이 수군거렸다. 특히 목소리를 높인 건 셀린느였다. 비앙카는 경멸을 숨기지 않았고, 셀린느는 그에 자존심이 상했다. 비앙카가 입고 있던 드레스에 감탄했던 것도 열등감이 되어 그녀를 휘감았다.
‘그런 드레스를 입고 있으면 다야? 고작 페리도트 목걸이를 하고 있는 주제에…. 페리도트 목걸이라면 나도 한 손에 가득 찰 만큼 있다고.’
페리도트 목걸이는 비앙카의 약점이 되기엔 너무나 사소한 것이었고, 애초에 약점이 될 만한 것도 아니었다. 붉은 드레스에 연두색 보석은 놀랄 만큼 잘 어울렸으니까. 하지만 그 목걸이는 그들이 갖고 있는 것 중 비앙카보다 조금이나마 ‘더’ 낫다 착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셀린느는 목에 힘을 빳빳이 주며 말했다.
“까짓 페리도트 목걸이를 하고는 잘난 척하긴…. 아르노 백작 부인이 하고 있던 목걸이가 페리도트인 거, 다들 알아보셨나요?”
“정말 페리도트라구요? 저도 페리도트는 쓰지 않는 걸요. 아르노 백작 부인이나 되는 분이 뭐가 아쉬워서 페리도트를 하고 계시겠어요. 에메랄드라고 착각해서 잘못 산 게 아니라면요.”
“설마 그렇게까지 안목이 없으시겠어요.”
비아냥대는 말투에서는 비앙카를 얕잡아 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상관없다. 여기 있는 이들 모두는 한통속이었고, 다 같이 뒷담을 함으로써 묶인 동질감을 공유한 사이었으니까. 그들의 은밀한 대화가 비앙카의 귀에 들어갈 일은 없을 것이다. 셀린느는 빙긋 웃으며, 그들 중 유일하게 지금껏 입을 다물고 침묵하던 다보빌 백작 부인을 향해 대화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다보빌 백작 부인께서 하고 계신 목걸이는 정말 훌륭하네요.”
“그러게요. 다보빌 백작께서 사 주신 건가요? 정말 영롱한 사파이어예요.”
“…….”
다보빌 백작 부인, 카트린은 셀린느가 그들의 대화에 그녀를 끼워 넣으려 한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그들에게 장단 맞춰 남을 헐뜯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비앙카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라 하여 대화를 무시하거나 자리를 박차고 나설 정도로 강단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랬다면 수도에서 만난 이 세 명의 귀족 여인들에게 휘둘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카트린은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른 채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들을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오늘 그녀들이 비앙카를 만난 것처럼, 산책하던 와중 맞닥트린 그들과 인사를 하고, 서로의 가문에 대해 밝혔다. 그들은 그녀가 1왕자비의 사촌이라는 걸 알게 되자, 1왕자비를 만나는 데 데려가 달라며 간곡히 부탁했다.
카트린은 거절을 잘하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그녀들을 데리고 1왕자비를 만나러 갔다. 1왕자비는 예의 있게 그들을 맞이했지만, 험담과 뒷이야기, 노골적인 추켜세움이 주로 이루어지는 그들의 대화를 무척 곤혹스러워했다.
그러니까, 지금과 같은 대화들 말이다.
“머리색도 어둡고 칙칙한 떡갈나무색이고, 성격도 저리 음침하고 까칠하니 무슨 보석을 가져다 대도 안 어울릴 걸요. 아르노 백작님은 저런 부인을 잘도 데리고 다니시는군요.”
“그러니 지금껏 영지에 두고 다니신 것이겠지요. 이번에야 원체 큰 경사니 어쩔 수 없었을 테고….”
세브랑에서는 금발이 전통적인 미남 미녀의 조건이었다. 세브랑 왕가가 대대로 금발에 푸른 눈의 미남 미녀였던 것이, 점차 금발 벽안을 미남 미녀의 조건으로 삼는 것으로 변해 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금발에 가까운 이들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랑스러워했다.
카트린과 같이 있는 세 명의 귀족 영애들이 그러했다. 꿀을 녹인 듯한 화사한 금발에 비교하면 나무껍질이나 다름없는 색임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머리칼을 금발이라고 우겼다.
그리고 카트린은 금발이라 우길 수도 없을 만큼 머리색이 붉었다. 비앙카가 아니라 자기가 욕을 먹은 것 같은 기분에 카트린의 귀가 빨개졌다. 카트린은 조금 용기를 내어 비앙카를 두둔했다.
“하지만 정말로 몸이 안 좋을 수도 있잖아요. 피부도 창백하게 질린 것이 아파 보였어요.”
“아픈 사람이 그렇게 차려입고 정원을 돌아다닐 리가 없잖아요. 아, 혹시….”
“뭔가 짐작되는 게 있나요, 셀린느?”
다른 여인이 셀린느에게 물었다. 잠깐 머뭇거린 셀린느는 이내 못 이기는 척 말했다.
“밀회 상대를 찾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저희들이 같이 산책하자고 한 걸 달가워하지 않은 게 아닐까요? 아,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