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토너먼트(2)
그냥 나 듣기 좋으라고 덧붙인 소리일 거야. 별다른 기대하지 마.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한 비앙카는 애써 태연한 척 말을 돌렸다.
“알았다, 알았어. 네가 그 정도로 나를 운동시키고 싶어 한다는 건 잘 알겠다. 일어날 테니 차림을 도와주렴.”
“제가 마님을 운동시키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제 말엔 거짓 한 톨 없답니다, 마님. 제가 언제나 마님께 진실만 고하는 건 아시잖아요.”
“그래, 그래.”
비앙카는 가볍게 웃었다. 빙긋 웃는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이본느의 말을 믿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본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님과 백작님 둘 다 고집이 세고 자존심도 세다 보니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기만 하랴? 상대방의 호의를 서로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니, 갈 길이 구만리였다.
이본느가 비앙카의 일을 이리 자신의 일처럼 걱정하는 것은 충의 때문이기도 했지만, 비앙카의 결혼 생활이 마치 제 여동생의 결혼 생활처럼 보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음을 열지 않는 부부, 어긋나는 소통.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때마다 가슴이 꽉 죄듯 답답해졌다.
이번 토너먼트가 기회가 되어 두 사람의 사이가 가까워지면 참 좋을 텐데. 그러기만 하면 묵직하게 가슴에 얹힌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본느는 정말로, 간절히 빌었다.
* * *
차림을 단장한 비앙카는 이본느와 함께 정원으로 향했다. 비앙카의 호위인 가스파르는 그녀들의 산책에 방해되지 않게 다섯 발짝 정도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그녀들을 따랐다.
정원은 성의 안주인의 감각이 어떠한지를 살펴보는 장소였다. 입김이든 손길이든, 안주인의 의사가 반영되는 곳이 바로 정원이었다. 안주인이 직접 전정가위를 들고 꾸미는 경우도 있고, 비앙카처럼 정원사에게 이것저것 지시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현재 왕성의 정원은 총 다섯 개였다. 왕비와 1왕자비의 것, 그리고 세 명의 왕녀들의 것이었다.
지금의 왕비는 왕의 세 번째 아내였다. 첫 번째 왕비가 고티에 왕자와 1왕녀를, 두 번째 왕비가 자코브를 낳았고, 현재의 왕비가 두 명의 딸을 낳았다. 왕자 둘, 왕녀 셋. 세브랑 왕가는 꼬이는 여자에 비해 자손의 수가 적은 편에 속했다.
첫 번째 왕비의 소생인 스물일곱인 1왕녀를 제외하고, 현 왕비의 소생인 다른 두 왕녀들은 모두 나이가 어렸다. 어린 두 왕녀의 정원은 토마토를 기르는 정도의 채소밭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비앙카가 갈 만한 정원은 세 곳이었고, 그녀가 제일 가고 싶었던 곳은 화려하기로 유명한 1왕녀의 정원이었다.
하지만 1왕녀의 숙소는 비앙카가 머무는 곳에서 한참을 가야 했고, 주인의 초대를 받아야지만 정원에 방문 가능한 것이 관례였다. 비앙카는 아직 1왕녀를 대면하지 못했기 때문에 1왕녀의 정원은 무리였다.
비앙카가 갈 수 있는 정원은 왕비의 정원과 1왕자비의 정원이었다. 건강도 좋지 않겠다. 조금이나마 가까운 1왕자비 정원이 낫겠지. 그리 결정한 비앙카와 일행은 느릿하게 발을 옮겼다.
1왕자비의 정원은 고지식할 정도로 구획에 맞춰 정돈되어 있었다. 꽃의 종과 색에 따라 엄격하게 구분된 정원이 신기할 정도였다.
정원을 구경 온 이는 비앙카 일행뿐이었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만족스러웠던 비앙카는 느릿하게 정원을 구경했다. 꽃향기가 싱그러웠다. 오월 중순이 되어 만개한 꽃이 더 늘어나면 한결 더 보기 좋을 것이다.
“간만에 꽃을 보니 화사하고 좋구나.”
“꽃도 예쁘지만, 마님도 예뻐요. 정원의 꽃과 마님이 분간되지 않을 정도인 걸요.”
“네 아부도 상당하구나, 이본느.”
“아니에요. 정말 아름다우세요. 평소에도 이리 화사하게 꾸미시면 좋을 텐데. 모처럼 수도에 왔고, 새로 옷도 맞추셨고….”
이본느는 안타까움에 탄식했다. 수도에 와서 새로 맞춘 금빛 자수로 장식된 검붉은 무늬의 새빨간 공단 드레스는 만개한 장미꽃처럼 화사했다. 페리도트 펜던트가 달린 진주 목걸이는 희고 투명한 목덜미와 쇄골 위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비앙카의 눈 색과 맞춘, 불순물 없이 투명하고 커다란 연녹색 페리도트는 비앙카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자카리가 선물해 준 것이었다.
머리를 양옆으로 곱게 땋아 뒤로 한데 묶은 솜씨 또한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이본느의 솜씨였다. 마님의 간만의 외출에 있는 힘껏 재주를 부려 보았는데 결과물이 상상 이상이었다. 비앙카도 마음에 들었는지 다음에도 이리 해 달라며 청할 정도였다.
처음 꾸밀 때만 하더라도 간만에 기분이나 내자는 심정이었지만, 막상 결과물이 흡족하다 보니 아쉽기까지 했다. 이본느는 아쉬움 어린 신음을 흘렸다.
“다른 분들에게도 우리 마님이 이렇게 어여쁘다 보여드려야 하는데.”
“난 나 혼자서도 흡족하니 되었다.”
비앙카는 심드렁히 꽃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비앙카가 매 철마다 새로 산 옷들. 한적한 아르노 영지에서 그 옷들을 입고 비앙카가 무얼 했겠는가? 새로 산 옷을 혼자서 입고 즐기는 것만으로도 비앙카는 충분히 만족했다. 치장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타인의 시선을 달가워하지 않기도 했다.
비앙카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지금 이 상황을 즐기는 것과 달리, 이본느는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본느가 오늘따라 유난히 비앙카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본느가 비앙카의 곁에서 24시간 가까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따로 돌아다니는 일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자잘한 소문을 듣곤 했는데, 그중엔 비앙카에 관련된 소문이 있었다.
그 소문이 무엇인가 하니, 구국의 영웅, 자카리 드 아르노 백작의 부인인 비앙카가 세기의 더할 나위 없는 악처惡妻라는 이야기였다. 여우처럼 뾰족하니 못난 얼굴, 빼빼 마른 빈약한 몸매로 항상 신경질적이고, 질투는 예사요, 패악질은 어찌나 떨어대는지 아르노 백작 또한 비앙카를 어찌하지 못한다는 소문을 들은 이본느는 입을 딱 벌렸다.
물론 아르노 영지에서도 비슷한 소문이 돌기는 했다. 비앙카가 이번 겨울 아르노 영지를 둘러보며 많이 가라앉기는 하였다만, 초반에는 그 때문에 꽤 고생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소문이 수도에까지 퍼졌을 줄이야.
다른 건 몰라도 못난 얼굴과 빈약한 몸매라는 건 말도 안 됐다. 안 그래도 가녀린 비앙카가 코르셋으로 가슴까지 억누르니 더 가냘파 보이기는 한다만, 빼빼 말랐다는 어조와는 느낌이 달랐다. 누가 봐도 악의적으로 곡해한 단어 선택이다. 이본느는 화가 나서 해명하려 했지만, 그 소문을 속삭이던 하녀들은 그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이본느는 결국 화를 삭이며 숙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비앙카에게 산책을 제안할 때만 하더라도 그런 소문을 해명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산책 준비를 하면서 점차 ‘남들에게도 우리 마님이 얼마나 어여쁜지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차올랐다. 하다못해 지나가는 사람에게라도 이 모습을 보여주면 참 좋을 텐데. 그런데 오늘은 무슨 마라도 낀 건지, 정원에 오기까지 하인 몇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마주하지 못했다.
그런 이본느의 바람이 하늘에 닿은 걸까. 오래되지 않아 정원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여자들의 목소리가 까르르 들리자, 비앙카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최근 들어 낯선 사람을 만나는 족족 피로가 쌓였던 만큼, 비앙카가 예민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제발 정원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길.’
하지만 목소리는 점점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이게 전부 다보빌 백작 부인 덕이네요.”
“제가 뭘요.”
“다보빌 백작 부인께서 1왕자비님의 사촌이신 덕에 이렇게 정원 출입 허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잖아요. 그러니 백작 부인 덕이 맞지요.”
모퉁이를 돌아 등장한 이들은 귀족 여인 넷과 그 뒤를 따르는 하녀들이었다. 귀족 여인들 중 셋은 다른 색이 섞인 금발이었고, 다보빌 백작 부인이라 불린 이는 타오르는 적발이었다. 다보빌 백작 부인이 일행 중 제일 신분이 높고 부유한지, 그녀의 옷차림은 다른 귀족 여인들과 확연히 달랐다. 하지만 위축된 어깨, 콧잔등에 놓인 주근깨를 신경 쓰는 듯 연신 코 쪽으로 가는 손길과 같이 사소한 것들이 일행에서 그녀의 위치가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앗…?”
한 박자 늦게 비앙카를 발견한 그들이 수군거렸다. 한적한 정원에서 맞닥트리니, 인사를 안 하고 지나갈 수도 없었다. 짙은 금갈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턱이 얇고 코가 긴 귀족 여인 하나가 비앙카에게 말을 걸었다.
“선객이 있으신 줄 모르고 소란을 피웠네요. 실례지만 어느 가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