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꼬인 매듭, 풀린 매듭, 다시 꼬인 매듭(13)
자카리도 함부로 검을 빼어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왕족의 앞이요, 하물며 상대는 존속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런 사실에도 자카리의 기분은 진정되지 않은 채 더더욱 저조해질 뿐이었다.
원인은 명백했다. 비앙카를 질척하게 바라보는 자코브의 시선! 그는 남편인 자카리가 앞에 있음에도 거리낌 없이 집요하게 비앙카를 훑어보았다. 그나마 어둠 덕에 그녀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가려진 것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비앙카에게 드리운 횃불과 달빛이 그녀를 더욱 몽환적으로 보이게 할는지도 몰랐다.
자카리는 당장 자코브의 목을 꺾어 버리고 싶은 심정을 꾹꾹 내리누르며, 어떻게 해야 큰 소란 없이 이 자리를 피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정말로 이대로 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것도 그가 감당 못 할 큰일이.
자코브 또한 자카리의 불편한 심기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걸 느꼈다. 여기서 더 자극하면 안 되겠지.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비앙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나름대로 비앙카를 유혹할 자신이 있었다. 그를 경계하는 고티에 왕자의 아내마저 자코브를 보고 얼굴을 붉히지 않았던가. 하물며 이제 막 열일곱 된 여자애 정도야, 손쉽게 품에 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앙카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오히려 자코브를 싫어하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풀풀 풍겼다.
그래서 더 그녀에게 집착하는 걸지도 몰랐다. 본디 높디높은 성벽이 승부욕을 돋우는 법이니까. 비앙카가 그를 본척만척할 때마다 뱃속이 열기로 차오르며 기이하게 부글부글 끓었다. 그를 보자마자 만개한 꽃처럼 웃으며 두 팔 벌려 달려오는 여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좋아. 어차피 급하게 굴어 봤자 경계심만 높일 뿐이겠지. 작은 동물을 길들이듯 천천히 다가가는 거야…. 일단 이번 토너먼트를 이용하자. 거기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외도 따위는 생각도 못할 것처럼 고지식해 보이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자신이 그녀를 넘어트렸을 때의 쾌감과 정복감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본디 고난 끝에 얻게 된 열매가 더 단 법이니까.
‘자카리만 없애면 그녀는 결국 내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거야. 남편을 잃은 그녀는 분명 불안하고 초조하겠지…. 고립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변에 있는 사내에게 기대려 할 거야. 그리고 그때 내가 슬며시 그녀에게 구애하는 거지!’
자코브의 입가가 의미심장하게 호선을 그렸다. 자코브의 망상에 가까운 생각은 얼핏 그럴듯해 보였으나, 문제는 비앙카가 아르노 가와 블랑쉐포르 가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카리가 죽게 되면 아르노 가는 백작 부인의 것이 되고, 그녀 홀로 가문을 다스린다는 선택지를 택하면 자코브도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할까. 자코브의 고민은 오래하지 않았다. 비앙카의 뒷배가 문제라면, 그녀를 지지해주는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으면 되는 일이다.
자코브는 옆에 있는 위그 자작을 흘끔거렸다. 평소에는 목소리만 크고 행동은 굼뜨지만, 자기 잇속 챙기는 일만큼은 약삭빨랐기에 그다지 달갑지 않은 사내였다. 하지만 그가 자카리의 형이라니…. 그는 그것만으로도 쓸모를 다했다.
‘그래. 위그 자작을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자카리를 죽인 뒤 그 영지를 그에게 준다고 하면, 어떻게든 그녀를 내쫓으려 하겠지. 블랑쉐포르 가에서 내쫓긴 그녀를 받아줄 수도 있지만, 치욕적이고 불명예스러운 낙인을 찍으면 그조차 쉽지 않을걸.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내칠 거야. 오갈 데 없어진 그녀를 잘 보살피면, 그녀도 나에게 다리를 벌리지 않을 수 없을 거야….’
자코브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비앙카는 알지 못했지만, 그의 시선이 닿기 무섭게 소름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불쾌한 남자다.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비앙카는 자카리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여보, 머리가 어지러워요.”
비앙카는 어리광 부리듯 자카리의 팔뚝에 이마를 기댔다. 비앙카가 움직이기가 무섭게 자카리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거기에 여보라니. 말을 선물했을 때도 여보라 불러주지 않았던 그녀였다. 여보라는 호칭을 들은 건 좋지만, 지금이 이런 상황이기에 기쁨을 맘껏 누리는 대신 상황을 이성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에 화가 났다.
그 모든 생각을 속으로 삼킨 자카리는 비앙카의 의도대로 무뚝뚝하게 작별을 통보했다.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 그럼 이만, 저희는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순순히 물러설 자코브가 아니었다.
“아아, 그래. 한동안 자리보전했었다지. 내가 여성의 몸에 좋다는 귀한 약들을 추려 보내주겠네.”
“괜찮….”
“거절할 필요 없네. 내 성의니까.”
자코브는 자신이 선심 쓴다는 듯 말했다. 자카리가 무어라 하든 그는 억지로 떠넘길 것이라는 의지가 느껴졌다. 마치 제 여자를 챙기는 듯한 모습이 역겹기 짝이 없다.
짜증 나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비앙카가 쓰러진 것에 대해서 자코브가 어찌 안단 말인가? 비앙카의 행적을 하나하나 꿰고 있는 것이, 주변에 귀를 붙여 둔 게 틀림없었다. 아니면 돈으로 매수를 했든지.
당장 숙소로 돌아가자마자 그부터 처리해야겠다 다짐한 자카리는 적대감을 감추지 않은 채 이를 드러냈다.
“제 아내가 입에 대는 것은 전부 제가 추스르고 골라 허락한 것들뿐입니다. 왕자 전하의 배려는 감사드립니다만, 아마 전하께서 보내신 것에 제 아내가 입을 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 이만.”
부질없는 짓 하지 말고 들어가 쉬라는 어조가 풀풀 느껴지는, 공격적인 작별 인사였다. 자카리는 고개를 까닥 숙여 인사하고는 이어지는 자코브의 말은 듣지도 않은 채 휙 돌아섰다. 뒤돌아선 자카리는 한 손으로 비앙카의 어깨를 단단히 쥔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비앙카 또한 그에 맞춰 종종걸음 하듯 보폭을 맞췄다. 자신도 저 사람들과 더 어울리는 것은 사양이었다. 머뭇거림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가는 자카리와 비앙카의 뒷모습에서는 칼바람이 쌩쌩 불었다.
위그 자작은 그들의 뒤에 대고 욕지거리를 했다. 분통이 터지는지 삿대질까지 개의치 않을 정도였다.
“저, 저 버릇없는…! 전하, 저것이 일찍이 전쟁터에서 구르느라 못 배워 먹어 저러한 것이니 제가 대신 사죄드립니다.”
위그 자작은 자코브에게 연신 꾸벅꾸벅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사죄는 그저 자카리를 헐뜯고 비방하며 깎아내리기 위함일 뿐이었다.
끊임없는 적의. 도대체 자카리가 뭘 했다고? 듣고 있는 자신도 질릴 정도인데, 자카리는 어떨까 궁금했던 비앙카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밑에서 보이는 그의 턱은 언제나처럼 강인하고 단단했다. 저런 적의 따위는 익숙하다는 듯이.
순간 비앙카의 머리가 어질어질하며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졌다. 역겨운 공기를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것 같았다. 아까는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머리 아픈 척을 했는데, 이제는 정말로 머리가 아파 왔다. 비앙카는 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서 다행이었다.
비앙카의 몸이 휘청거리는 것을 제일 먼저 알아챈 것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다시피 하여 발걸음을 옮긴 자카리였다. 당황한 자카리가 그녀를 내려다보았을 때는, 이미 비앙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뒤였다.
“몸이 많이 안 좋은 모양이로군. 난 그저 그 자리를 피하기 위한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아까는 분명 거짓말이었어요.”
“오늘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난 것 같군.”
“그러게요. 그것도 달갑지 않은 사람을요.”
비앙카는 내향적인 성향이었고, 사람 만나는 것에 익숙지 않은 만큼 정도 이상의 사람과 대화를 나누게 되면 급격히 피로가 쌓이곤 했다. 오늘 만난 위그 자작과 자코브는 단둘만으로도 비앙카의 임계 수치를 넘기기 충분했다. 그만큼 꺼려지는 상대다. 앞으로도 그들과 마주칠 생각을 하니 비앙카의 위가 쓰려 왔다.
비틀거리는 비앙카의 모습에 자카리가 우려스레 물었다.
“걸을 순 있소?”
“물론이지요.”
말은 당차게 했지만, 그녀의 머리는 핑핑 돌았다. 현기증이 올라오면서 시야는 까맣게 잠식되었고, 한 발 앞으로 내디디는 것마저 힘들었다. 자카리는 그런 비앙카의 상태를 잠잠히 지켜보더니, 한참 끝에 결심한 듯 넌지시 말했다.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안아주는 건 어떻소?”
“남들 눈이 있어요.”
비앙카가 화들짝 놀랐다. 아무리 귀족 부인이 남들 손에 모든 것을 다 맡긴다 하더라도 언제나 꼿꼿이 허리를 편 채, 기품을 지켜야만 했다. 걸음도 마치 백조가 호수 위를 유유히 헤엄치듯 매끄러워야 했다. 거동이 불편하면 차라리 가마 위에 앉을지언정, 안겨서 오고 가는 것은 추태였다. 상대가 남편일지라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