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꼬인 매듭, 풀린 매듭, 다시 꼬인 매듭(12)
상대를 알아본 자카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앙카 또한 크게 숨을 들이켰다. 상대의 외모는 낯설었지만, 비앙카의 기억 속에 낙인처럼 뚜렷이 새겨진 사람이었다.
비앙카는 결코 그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그녀가 회귀하기가 무섭게 복수하겠다 다짐한 증오스러운 상대….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가기 위해 쥐새끼 같은 계략을 펼친 간악한 사내.
그들이 반갑지 못하기는 상대도 마찬가지인지, 상대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그들을 향해 이죽거렸다.
“이게 누구야. 세브랑의 영웅, 아르노 백작 아니신가.”
“…….”
“왜, 반겨주기도 싫어? 우리 영웅님께서는 출세하셔서 아직 자작 나부랭이인 형님은 눈에도 안 보이는 모양이지?”
자카리의 형, 위그 자작이 비아냥거렸다.
적대감을 숨기지 않는 노골적인 태도는 천박했다. 비앙카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위그 자작에게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기 위해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에게선 역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인간쓰레기의 냄새였다.
이번 왕세손의 연회 때 어지간한 귀족들은 다 불려왔고, 불리지 않은 귀족들도 높으신 분들에게 눈도장을 찍고, 떨어진 고기조각이라도 얻어먹을까 싶어 너나 할 것 없이 수도로 모였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위그 자작은 불리지 않은 쪽이 틀림없었다. 위그 가에서 자카리가 태어난 것은 말 그대로 연에서 매가 난 격이었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이 넓은 성안에서 떡하니 마주칠 게 뭐람. 비앙카의 입술이 비틀렸다.
‘블랑쉐포르의 창녀가, 한낱 광대에게 빠져 가문을 욕보였다! 아르노 가를 물려받을 나로서는 이를 간과할 수 없구나! 그래도 내 동생과 살을 맞대고 산 옛정을 보아, 네년을 매질하지 않고 보내주마. 하지만 아르노의 것은 모두 두고 가야 할 것이야! 여봐라, 저 창녀가 아무것도 들고 갈 수 없게 해라!’
회귀 전, 위그 자작이 비앙카를 내쫓으며 했던 폭언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그때의 굴욕.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비앙카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위그 자작을 노려보았다.
위그 자작은 기억 속의 모습보다 조금 더 젊었다. 자카리와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경박한 승냥이 같은 외모, 얍삽하고도 비굴한 품성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그녀의 날 선 시선을 느낀 걸까. 위그 자작은 과장되게 놀란 척하며 비앙카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이쪽은…. 오, 제수씨! 우리 아르노 백작님이 남작이던 시절, 인신 공양하듯 팔려 와서 그를 백작으로 만들어 준 그 제수씨 아닌가! 안 그래도 아르노 백작이 ‘그’ 백작 부인을 데려왔다고 사교계가 시끌시끌하더구나.”
“그 입 다무시죠, 형님.”
위그 자작은 호들갑을 떨며 비앙카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하지만 그가 비앙카에게 다가오기 전, 자카리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앙카의 시야가 자카리의 너른 등에 가로막혔다.
비앙카의 위치에서는 자카리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들리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으르렁거리듯 위그 자작을 위협하는 자카리의 기세는 범인이라면 꼬리를 가랑이 사이로 말고 줄행랑칠 만큼 살벌했다.
그래도 혈육은 혈육인 걸까? 무시무시한 자카리의 기세에도 불구하고 위그 자작은 오히려 콧대를 세우며 큰소리를 쳤다.
“왜. 내가 거짓말이라도 했느냐? 네가 결혼했을 때, 제수씨가 일곱 살…? 맞나? 키야, 블랑쉐포르 가에 굽실거리기 위해 코흘리개 같은 어린아이와도 결혼할 정도였으니, 좋아! 백작 위 정도는 달아줘야지!”
그들을 마주치기 전에 술이라도 거하게 들이켰는지, 술주정하는 듯한 말과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듣고 있는 상대가 세브랑에서 위명을 떨치는 영웅 자카리라는 것도, 그 아내가 세브랑의 명문가 블랑쉐포르 가의 여식이라는 것도 잊은 듯한 말투였다.
위그 자작의 말에 비앙카의 얼굴이 벌게졌다. 저자는 언제나, 이보다 더 모욕적일 수는 없는 방법으로 나에게 굴욕감을 준다.
위그 자작이 지적한 것은 하필 비앙카가 최근 들어 예민하게 생각하고 있는 ‘나이’였다. 안 그래도 자카리가 자신을 피하는 것이 그녀의 어린 나이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는 만큼,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어 부관참시 하는 위그 자작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위그 자작은 흘끔 비앙카를 보았다. 비앙카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분노로 바들바들 떠는 모습을 수줍어 그러는 거라 착각한 그는 쩝, 입맛을 다셨다.
자카리를 모욕하기 위해 그녀를 코흘리개라 깎아내리기는 했지만, 어리다는 것만을 제외하면 비앙카는 퍽 예쁜 아이였다. 올라간 눈꼬리에 담긴 자존심과 달리 어딘지 모르는 처연함이 감도는 분위기가 사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만약 저 새초롬한 눈길을 비스듬히 흘린 채, 눈웃음이라도 치면,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은 끔뻑 넘어갈 것이다. 조금만 더 나이를 먹고 농염함을 품게 되면 이렇게 비웃을 수도 없게 되겠지.
지금의 비앙카는 어리다는 것이 비웃음이 될 나이였지만, 앞으로 몇 년 만 지나면 사내들 모두가 젊은 아내를 곁에 둔 자카리를 부러워할 것이다. 하물며 아내의 태생이 블랑쉐포르여서야.
사실 자카리가 혼례를 올리던 당시만 하더라도, 자신이 그 혼사를 대신하고 싶다 주장하는 귀족 사내들도 많았다. 아내가 어리다는 건 기실 별 문제가 아니었다. 정부를 두면 되는 일이니까.
위그 자작의 도발에도 자카리는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는 것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꽉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피가 몰렸는지 손등이 하얗게 질렸다. 당장에라도 주먹을 들어 위그 자작의 턱주가리를 날려버릴 것 같은 자카리의 모습에 비앙카는 덜컥 겁이 났다.
자카리는 전쟁 영웅이었고, 세간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술에 취한 형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물론 그런 행동에 열광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반감을 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위그 자작은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난리를 칠 것이고, 자카리의 명예를 깎아내리기 위해서라면 위증도 서슴지 않을 사내였다.
자카리의 위명이 곧 비앙카의 목숨줄과 연관 있는 만큼, 덜컥 겁이 난 비앙카는 자카리를 말리려 그의 팔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끝이 자카리에게 닿기 전, 또 다른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하필이면 이번에도 달갑지 않은 인사였다. 위그 자작보다도 더 기피하고 싶은 상대가 있을까 싶었는데, 손수 그 얼굴을 비춰주시니 비앙카는 할 말을 잊었다.
“무슨 일인가?”
2왕자 자코브의 등장에 세 사람의 희비가 엇갈렸다. 비앙카와 자카리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운 것과 달리 위그 자작은 반색을 하며 자코브를 반겼다.
“아이고, 2왕자님 아니십니까.”
“이 야밤에 왜 이리 소란스러워?”
“간만에 가족 상봉을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위그 자작은 과장스레 허리를 숙였다. 마치 광대가 연극이라도 하는 것 같은 꼴이었다. 기도 차지 않았던 비앙카가 헛웃음을 짓는 사이, 그들을 둘러본 자코브가 상황을 파악한 듯 싱긋 웃었다. 화사한 외모로 사르르 짓는 미소는 누가 보아도 잘생겼으나, 비앙카의 눈에는 혀를 날름거리는 꽃뱀처럼 보일 뿐이었다.
자코브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뗀 채, 능청스레 위그 자작에게 물었다.
“아하. 아르노 백작이 위그 자작, 그대의 동생이었나?”
“뛰어난 동생이죠. 얼마나 뛰어난지, 남작이던 시절 일곱 살 난 신부와 결혼해 가며 출세를 했겠습니까. 제가 결혼만 안 했었더라면, 그 자세를 본받았을 겁니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꼴이 한두 번 입을 맞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지나치게 친밀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비앙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과거의 위그 자작은 2왕자 파였고, 그 결과 자카리가 죽은 뒤 아르노 영지와 블랑쉐포르 영지까지 집어삼킬 것을 ‘허락’받았다. 아마 그 ‘허락’도 이런 식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오간 이야기였겠지. 농담 따먹기라도 하는 듯이. 순간 비앙카의 머리까지 열이 확 뻗쳤다.
그들의 대화로써 화가 난 것은 비앙카뿐만이 아니었다. 침이 튀길 정도로 수다스레 나불대는 위그 자작의 말은 자카리의 신경 또한 슬슬 긁었다.
“형님께서 술이 과했나 봅니다. 잘도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위그 자작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자카리를 불쾌하게 했다. 형이라고 하나 있는 것이 불구대천의 원수나 다름없었다.
자카리의 눈빛에서 불똥이 파직파직 뛰었다. 조금만 더 자카리의 심기가 불편해진다면 그의 허리춤에 있는 검이 뽑힐지도 몰랐다.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것일까. 위그 자작의 손이 저도 모르게 허리춤의 검으로 슬그머니 향했다.
사태가 일촉즉발로 치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