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70화 (70/192)

#70 꼬인 매듭, 풀린 매듭, 다시 꼬인 매듭(11)

그들에게서 한 발짝 떨어진 이 거리.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위치처럼 느껴졌다.

너는 아직 이 선 안으로 들어올 수 없어. 완전한 가족이 아니니까….

자카리는 아직 그녀와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완전한 가족이라고 말할 수 없어, 혼례를 물려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비앙카는 그런 이유를 들어 그를 여보라 부르길 거부하지 않았던가.

비앙카에게 있어 자카리는 ‘아르노 백작’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자유였다. 자카리는 그 자유를 존중했다. 그녀가 아직 열일곱이었기에.

열일곱과 열여덟의 차이가 그리 명쾌히 칼로 잘라 낼 수 있는 것처럼 뚜렷함이 아니었음에도, 그 세월의 차이를 지나 보내는 거룩한 의식을 치름으로써 그가 아내에 대한 정당성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장사의 대상으로써의 결혼이 아닌, 상호 존중, 그리고 사랑으로써의 결혼이 될 수 있다 믿었다.

그리고 자유라는 말은, 짊어지고 있는 위험한 책임들이 가득하다는 말과 동일했다. 그 책임을 짊어지는 것이 비앙카 그녀가 아니라, 자카리 그라는 점이 좀 달랐을 뿐. 그건 어쩔 수 없다. 그녀와의 관계에서 책임을 지는 것은 언제나 남편이자 연상인 그의 몫이었으니까.

지금까지 비앙카가 후계자에 관해 언급하며, 자카리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다가온 이유가 있었다. 블랑쉐포르 백작이 그녀를 받아주지 않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오랜만에 만난 딸의 모습에 마음이 흔들린 블랑쉐포르 백작은, 그녀가 자카리와 이혼하고 싶다 말해도 흔쾌히 들어주리라. 그녀와 이혼한다 하여도 자카리가 1왕자의 편이라는 건 변함없으니까. 10년이라는 시간은 사람의 인간성을 파악하기 충분한 시간이었고, 블랑쉐포르 백작은 자카리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알게 되었다….

이제 비앙카는 돌아가고자 하면 언제든 블랑쉐포르 가에 갈 수 있다. 그녀가 떠나고자 하면 자카리로서는 그녀를 잡을 명목이 없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기가 무섭게 자카리의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고, 꽉 쥔 주먹은 부르르 떨리며 손등에 힘줄이 툭 튀어 올랐다.

정말 비앙카가 다른 사내에게 빠져버리면. 그러면 나는….

‘솔직히 마님께서 백작님을 그리 썩 좋아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잠자리도 하지 않으시겠다니, 이 무슨 자신입니까?’

수도에 출발하기 전 소뵈르가 던졌던 말이 자카리의 마음속에 파문처럼 번져 갔다. 그때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외면했던 일이, 이제는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저 홀로 다른 곳에 서 있는 이질감을 느끼며, 자카리는 깊게 혼란한 마음속으로 침잠했다. 접대실의 소란스러운 소리는 그의 귓가에서 이명처럼 울렸다. 그만 뚝 떼어 어딘가로 옮겨 든 느낌.

그 사이를 비집고 들리는 것은, 그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나를 떠날 리 없어. 내가 좀 더 제대로 하면…. 그녀가 굳이 날 떠날 이유는 없잖아. 우리는 10년간 잘 해 왔어.’

‘확신할 수 있어?’

‘…….’

‘굳이 불안해할 것 없어. 그녀를 믿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잖아. 바로 그녀를 품으면 돼. 그러면 완벽하게 너에게 종속되지.’

‘그건 안 돼!!’

‘왜 안 돼? 그녀는 너의 아내고, 너의 후계자를 품기를 원하고 있어…. 안 될 이유는 전혀 없지. 네 알량한 자존심만 내려 두면 돼. 상호 존중? 사랑으로써의 결혼? 그에 그리도 확신을 갖고 있다면 지금 너는 왜 이리도 혼란스러워하는 거지?’

머릿속에 악마라도 들어앉았는지, 온갖 달콤하고도 유혹적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바닥은 지진이라도 난 듯 일렁거렸다. 격렬하게 흔들리는 군마의 위에서도 날렵하게 균형을 잡아내는 늘씬하고 커다란 몸이 충격으로 비틀거렸다.

자카리는 숨을 몰아쉬며 이성을 부여잡으려 노력했다. 흐려진 그의 눈빛 너머로 보이는 비앙카는,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모습에 눈물짓는 그녀는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는 그 혼자 마음을 단단히 다잡으면 된다 여겼지만, 이제는 그 자제심과 인내심만 믿고 버틸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번 고개를 들이민 욕망과 불안은 수시로 그를 괴롭힐 것이다. 몇 번이고 뿌리 뽑아도 다시 모습을 빠끔히 드러내면서.

자카리는 이를 악물었다.

‘이 모든 것이 나를 혼란스럽게 하려는 악마의 속삭임이다…. 지금 내가 참지 못하고 그녀를 품는다면…. 분명 나는, 그녀를 상처 입힐 거야. 나는 좀 더 참을 수 있어. 내가 바로 자카리 드 아르노가 아닌가. 지옥 같은 전장에서 나를 살려 낸 건 고통도 괴로움도 모조리 참아낼 수 있는 인내심이었지. 그 인내심이 나의 인생, 그리고 그녀와 나의 미래 또한 구원해 낼 거야….’

그 순간 비앙카가 그를 돌아보았다. 눈물로 얼룩진 뺨으로, 환하게 웃는 모습은 어여뻤다. 자카리는 비앙카에게 마주 웃어주려 노력했다. 뺨이 아플 정도로 당겼고, 입 끝은 뻣뻣했다. 자카리는 본인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미소로나마 가장하여 그녀에게 안도를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 * *

그날의 만남이 잘 풀리고 나서 비앙카는 종종 블랑쉐포르 가와 같이 저녁 식사를 하곤 했다. 아르노 가의 숙소와 블랑쉐포르 가의 숙소를 번갈아 가며 방문했지만 대부분 블랑쉐포르 가의 숙소로 비앙카와 자카리가 찾아가곤 했다.

십여 년 만의 만남이다 보니 많은 것이 바뀌어져 있었다. 조아생과 귀스타브는 비앙카의 까다로운 입맛과 적은 식사량, 그리고 그에 대해 메뉴 하나하나를 신경 쓰는 세브랑의 영웅을 보며 놀람에 놀람을 거듭했다.

특히 비앙카의 식성에 대해 놀라 했는데, 그들의 기억 속의 비앙카는 식사 후 초콜릿 케이크를 받으면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웃음 짓는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아이가 콩을 셀 수 있을 정도의 식사량이라니! 그들은 새 모이만큼이나 조금 먹는 비앙카의 식사량을 믿을 수가 없어 했다.

자카리는 쓰게 웃었다. 비앙카의 까다로운 입맛은 그에게도 골칫덩이였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몸이 좋지 않은데, 잘 먹기라도 해야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말해 봐야 비앙카는 듣지 않을 것이라, 자카리 혼자 걱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비앙카가 병석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그녀의 빈약한 체력을 위해 다들 자리를 빨리 파했다. 그녀가 새 모이만큼 먹어서 그런가, 세 남자는 비앙카가 작은 새 새끼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비앙카와 자카리는 그들의 숙소로 돌아갔다. 평소에도 그들이 대화를 자주 나누는 부부는 아니었고, 비앙카 그녀도 사근사근히 말을 거는 편은 아니었다. 자카리가 무뚝뚝한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정말 끔찍했다. 자카리의 태도가 이상하게 변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비앙카는 금방 답을 내릴 수 있었다. 바로 아버지와 조우한 그날이었다.

그 당시의 말실수를 떠올리면 다시 한 번 가슴이 철렁였다. 잘 해결되어 정말 다행이었다. 이제 아버지의 비호가 있으니, 자카리가 그녀의 말실수를 핑계로 저를 우습게 볼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여튼, 자카리의 태도가 이상하게 변한 건 그 뒤였다. 원래 무뚝뚝한 남자라고는 해도 최근에는 정도가 심했다.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그래도 좀 누그러진 반응을 보여주었지만, 단둘이 있으면 여실 없었다. 그는 비앙카에게 말을 거는 일이 없었고, 비앙카가 아직 꺼내지 않은 말조차 튕겨낼 듯 단단해 보였다. 그들 사이에 내려앉은 것이 죽음 같은 침묵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가족을 만난 뒤로 신경이 곤두서 있던 찰나였다. 지금까지는 모르는 척 눈을 내질러 감아 무시했지만, 이렇게 마주하고 나니 그들의 죽음을 간과해 넘길 수는 없었다. 비앙카의 신경줄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조아생이 죽는 건 그녀가 스무 살 때, 세브랑의 변경인 알고트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에서였다. 알고트 지역은 세브랑의 요충지였던 만큼, 아라곤 왕국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모두가 총력전을 벌였다. 아마 자카리 또한 그 전쟁에 참여했으리라. 전쟁이라면 빠지지 않는 남자니까.

비앙카가 그 전쟁을 유난히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조아생뿐만 아니라 고티에 왕자까지 그 전쟁에서 죽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후계자와 지금껏 모셔 온 주군마저 잃게 되어버린 귀스타브가 삶의 미련의 끈을 놓아버리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그러니 비앙카로서는 어떻게든 그 전쟁에서 조아생이 죽지 않게 해야만 했다. 고티에 왕자도 살면 좋지만, 어찌 되었든 조아생만이라도 구해내야 귀스타브가 헛된 포기를 하지 않을 터였다. 귀스타브는 명망 있는 귀족이었고, 그의 입김은 이곳저곳에 닿는 편이었다. 그가 살아준다면, 비앙카로서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니. 아니다. 그냥, 비앙카는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도 좋으니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살기를 바랐다.

하여튼 가족의 죽음까지 염려하게 되니 비앙카의 머리에 열이 올랐다. 그런 상황에서 남편인 자카리가 도와주기는커녕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뚱하고 토라져 있으니, 비앙카로서는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속이 더부룩할 정도였다.

그렇게 비앙카와 자카리가 어색한 침묵으로 총총히 회랑을 지나고 있던 찰나, 반대쪽에서 낯선 사람과 마주했다. 어둠이 내려앉고, 회랑을 밝히는 것은 달빛과 횃불 정도였다. 건너에서 오는 사람이 점점 다가왔다. 그가 지척에 다다라서야 그들은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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