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69화 (69/192)

#69 꼬인 매듭, 풀린 매듭, 다시 꼬인 매듭(10)

“제가 돌아오기를 바란 적도 없잖아요! 너는 이제 아르노 사람이다. 아르노 가에서 죽을 생각을 해라! 그렇게 말하셨잖아요!”

조곤히, 속삭이는 것으로 시작한 목소리의 끝은 통한이 서린 외침이었다. 부릅뜬 연녹빛 눈동자에는 물기 하나 없이 이글이글했다.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자카리의 손을 꽉 쥐었다. 자카리에게는 별 느낌도 없을, 병아리의 날갯짓 같은 악력이었다. 하지만 필사적인 그녀의 손에서는 뿌리칠 수 없는 강한 낙인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비앙카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드물었다. 거기에 내용도 내용이었던 만큼, 자카리의 눈이 크게 뜨였다.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가 깨달은 비앙카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자카리의 팔을 강하게 잡고 있던 손에 스르륵 힘이 빠지며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가까이 있던 자카리가 그녀를 부축했다. 비앙카는 자카리의 품 안에서 숨을 몰아쉬며, 홧김에 저질러버린 자신의 실수를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비앙카로서는 절대 자카리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내용이었다.

‘친정에서 절대 돌아오지 말라 호언장담한 신부라니. 남편이 막 대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잖아.’

지금의 일로써 자카리는 비앙카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도 있었다. 그만큼, 귀스타브가 비앙카를 몰아넣은 곳은 발 한 발짝 디디면 떨어져 내릴 절벽이나 다름없었다. 순간의 격정으로 어리석은 선택을 한 자신을 힐난하며, 비앙카는 잘게 몸을 떨었다.

“비앙카….”

귀스타브는 말문이 막힌 채, 자카리의 품에서 씨근덕 숨을 고르는 비앙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딸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추호도 몰랐다. 아니. 그건 자신의 기만이다. 딸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그리 말했었다….

그가 미처 알지 못한 것은, 딸이 그의 말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 그리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홀로 울음을 참아 내었는지였다.

비앙카는 그의 생각보다도 강한 아이였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었다면 진즉 울며 달려왔을 상황에서도, 꿋꿋이 슬픔을 곱씹어 속으로 삼켜내었다.

귀스타브는 그저 비앙카가 낯선 곳에서 집에 돌아가겠다 어리광부리지 않게 하기 위해 엄히 이른 것일 뿐이었다. 비앙카를 돌봐 줄 어른은 유모 쟌밖에 없었으니까. 아무리 어린아이라 해도 매일 집에 돌아가고 싶다며 떼를 쓴다면 금방 눈 밖에 나는 법이었다.

하지만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고. 유모 쟌이 죽었다는 부고가 들려와도 비앙카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내가 먼저 비앙카를 찾아왔었어야만 했는데….’

하지만 너무 늦어버린 시기가, 귀스타브로 하여금 용기를 빼앗아 갔다. 과거의 어리석은 선택은 이제야 부메랑처럼 돌아와 귀스타브의 심장을 꿰뚫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딸아이의 눈동자. 일찍 죽은 제 어미를 쏙 빼어 닮은 그 눈동자에 서린 적대감에 그는 침통한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아비인 귀스타브가 느끼는 만큼, 비앙카의 오빠 조아생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조아생은 어린 여동생과 퍽 잘 지내곤 했다. 하지만 여동생의 결혼이 결정되었을 때, 그는 케이크를 빼앗겼다며 울어대곤 하던 여동생보다 처남이 될 아르노 백작에 더 관심이 쏠렸다.

그는 그 결혼을 쌍수 들고 환영했다. 당시 아르노 남작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 그는 당연히 여동생이 잘 살 거라고 생각했다. 사고의 의지조차 잃은 막연하고도 안일한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편했으니까. 자신이 마음 쓸 일이 없었으니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동생이 어련히 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대면한 여동생의 모습은…. 케이크를 빼앗기고 울음을 터트리던 울보 여동생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비앙카의 분노는 격정적이었지만, 동시에 정제된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모두 꾹꾹 억누른 채, 그녀의 연두색 눈동자만 번뜩이며 빛났다.

지금껏 그녀를 모르는 채 방치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조아생의 가슴이 죄듯 아파왔다. 차마 동생을 바라볼 수 없었던 그는 얼굴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두 블랑쉐포르의 참담한 모습에 비앙카의 마음이 흔들렸다. 안 만난 지 하도 오래되었으니, 심장이 돌처럼 굳어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그녀 앞에 죄인처럼 조아리는 모습만 보아도 괜히 눈물이 북받쳐 올랐다. 비앙카는 울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물기가 서렸다.

“언제든 돌아오라 말하고야 싶었지. 하지만 나는 네가, 아르노 가에서 잘 적응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리 매정하게 굴었어.”

귀스타브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의 앞에 꼿꼿이 서 있는 비앙카가 그 누구보다도 귀족다운 기품을 지니게 되는 데에 그가 일조한 것은 없었다. 이렇게 잘 자랄 줄 알았더라면, 그리 냉정하게 내치지 않았을 텐데.

후회해 봐야 늦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어그러진 것을 되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정도였다.

“그럴 필요 없이도, 넌 잘 해내는 아이였는데.”

귀스타브가 어색하게 웃었다. 억지로 잡아당긴 입꼬리 옆으로 움푹 팬 주름이 세월의 흐름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별거 아닌 미소였다. 평범하디평범한.

하지만 그 순간, 비앙카는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떠나간 과거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때의 아버지는 나를 걱정하긴 하셨을까. 아니면 지금처럼, 알아서 잘 해낼 거라 믿으셨을까.’

과거의 비앙카는 아버지가 자신에 대해 다소 무심하다 했어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블랑쉐포르 가로 돌아올 생각 하지 말라 말하신 것에 상처받기는 했지만, 귀족의 결합이 그런 것이라는 걸 쟌에게 몇 번이고 들어 이해했다. 그러니까 구태여 만나지 않더라도, 그냥 그곳에 건재하다는 풍문만 들어도 흡족했었다.

그랬었다.

과거의 비앙카는 아버지에게 내쳐지듯 아르노 가로 팔려 오기는 했지만, 가족을 사랑했다.

비앙카의 가슴이 시렸다. 그녀가 애써 덮어 둔 과거의 편린이 삐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다. 그동안 서로가 할 수 있는 것은 온갖 감정을 켜켜이 쌓아 두는 것뿐이었다. 특히 비앙카는 더했다. 그들의 죽음까지 견뎌내야 하지 않았던가. 서신으로 전해진, 그녀는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던 유리된 죽음.

비앙카의 오빠 조아생이 전장에서 죽고, 귀스타브는 늙은 몸을 이끌고 전장에 나섰다. 복수? 아니면 포기? 귀스타브는 전장에 익숙하지 못한, 태생이 문관인 사내였다. 그런 그가 전장에 나선다는 건 조아생의 뒤를 따르겠다는 결정이나 다름없었다.

귀스타브가 정말로 비앙카를 생각했다면, 그리 쉽게 전장으로 나서서는 아니 되었을 것이었다. 그가 죽고 혼자 남은 비앙카가 그녀를 비호할 아무 세력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휘둘리다 죽었을지, 그리도 현명하고 똑똑한 아버지였다면 알고 있었어야만 했다.

비앙카가 블랑쉐포르 백작에게 화를 내는 건 무엇 하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켜켜이 쌓여 온 모든 것이 뒤범벅되어 그녀를 뒤흔들었다.

아르노 영지에서 정을 붙이지 못하고, 돌아갈 곳도 없었다. 그렇게 외로웠기에, 더더욱 페르낭에게 빠져들었다. 사랑하는 페르낭과 함께 블랑쉐포르 영지를 다스리자. 그것이 비앙카를 지탱하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나는.”

비앙카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방 안에 있는 모두의 신경이 그리로 쏠렸다.

비앙카의 눈이 멍하니 초점을 잃었다. 그녀 스스로도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고, 혼란스러움은 그대로 드러났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그녀의 마음은 분노와 반가움 사이를 정처 없이 오갔다. 그 사이에서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은, 지금껏 꼭꼭 숨겨 온 그녀의 본심이었으리라.

“보고 싶었어요. 그냥….”

“비앙카….”

지금껏 애써 참았던 눈물이 허물어진 제방처럼 그녀의 뺨으로 흘러내렸다. 비앙카의 고동빛 머리카락이 가는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귀스타브 백작은 비앙카에게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팔을 벌렸다. 비앙카는 훌쩍이며 그 품에 안겼다. 조아생도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얼굴도 눈물로 범벅이 된 채였다.

서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데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말로서 해결되는 일들도 많지만, 가끔은 말이 사족이 될 때가 있었다.

지금 이 순간처럼.

* * *

자카리는 서로 오해를 푸는 비앙카와 블랑쉐포르 가의 사내들을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그녀가 가족으로 고통받았던 심내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던 자카리는 지금 이 결과에 안도하였다.

비앙카가 저렇게까지 냉정하게 떠밀려 그에게 왔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두려움에 비앙카는 더더욱 자카리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도 내쫓긴 상태나 다름없다 생각했을 테니까.

그래도 이제 블랑쉐포르 백작이 그녀를 받아들이고, 과거의 잘못을 정정하여 다행이었다. 가족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외면받는 건 저만으로도 족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이 욱신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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