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꼬인 매듭, 풀린 매듭, 다시 꼬인 매듭(9)
“그대가 싫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비앙카가 아르노 가에 온 뒤로, 자카리는 그녀를 극진히 보살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먹을 수 있게. 갖고 싶은 것이라면 가질 수 있게. 그녀에게 의무는 모조리 빼앗고 권리만을 안겼다. 그렇게 애지중지해 온 그의 아내였다.
비록 자카리가 모자란 점이 많은 남편이기는 하였다만, 이런 상황에서 그녀를 지켜주지 못할 정도로 무력하진 않았다.
비앙카가 무엇 때문에 친정인 블랑쉐포르 가를 꺼리는지 자카리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척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녀가 만남을 꺼리면 굳이 만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자카리의 생각이었다.
비앙카와의 만남을 자카리가 차단한다면 블랑쉐포르 가에서 반발할 수도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떠나 버린 어린 딸아이요, 여동생일 뿐이니까. 하지만 상관없다. 그 정도의 불만의 목소리는 능히 감당할 수 있다.
자카리의 눈빛이 제 무리를 지키는 늑대처럼 위험하게 빛났다. 그 검은 눈빛이 얼마나 살벌했으면, 바로 곁에 있는 비앙카마저 숨을 집어삼킬 정도였다. 하지만 살벌한 살기보다도, 그녀를 휩싸 안은 것은 더 큰 위로였다.
언제나 모두는 그녀에게 하라고만 말했다. 백작 영애로서의 의무, 백작 부인으로서의 의무, 수녀로서의 의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였으니 너는 쓸모없는 존재라 했다.
자카리는 누구보다도 그녀에게 의무에 대해 캐물을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하기 싫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말해주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지!
마음의 짐이 한결 덜어진 비앙카는 보다 냉정하게 상황을 살필 수 있었다. 언제까지고 가족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한번 만나 봐야만 했고, 이번이 가족을 만날 수 있는 적기였다. 이불을 꽉 그러쥔 비앙카는 결심 어린 단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에요. 언제까지고 피하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그대에게 있어 백작은 피해야만 하는 상대요? 라는 물음이 자카리의 목 끝까지 치밀었다. 물론 그것을 입에 담지 않을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그대 편할 대로 하시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우선이오.”
“그리고 당신의 옷도 맞추고요. 제가 당신을 구박한다는 말을 듣고 싶진 않으니까요.”
비앙카는 살풋 웃으며 자카리를 올려 보았다. 농을 건넬 정도로 좋아진 분위기에 자카리도 마주 웃었다. 하지만 비앙카에 대한 걱정을 떨쳐내지 못한 그의 웃음은 어딘지 모르게 어설펐다.
* * *
다행인지 불행인지, 블랑쉐포르 가에서 수도에 도착했을 때쯤 비앙카는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병석에서 일어났다고는 하나 병색이 남아 있는 해쓱한 얼굴에 자카리는 우려스러움을 드러냈다.
“만남을 미루는 건 어떻소?”
“백작이나 되시는 분인 걸요. 바쁘실 거예요. 여기까지 와주셨는데 약속을 바꾼다며 번거롭게 구느니 그냥 만나는 게 나아요.”
태연스레 말하는 비앙카의 말에 자카리의 눈빛이 안타깝게 빛났다. 백작이 아무리 공사다망하다 하여도, 십여 년 만에 만나는 딸의 만남을 번거롭게 여길 리 없다. 도대체 블랑쉐포르 백작과 비앙카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내심 궁금했음에도 그는 차마 묻지 못하고 묵묵히 비앙카가 화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혈색 없는 뺨에 분홍빛 가루로 생기를 더한다. 살짝 내리깐 긴 속눈썹이 파르르 흔들리며 눈 밑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비의 날갯짓 같은 그 움직임에 자카리는 저도 모르게 비앙카를 빤히 바라보았다.
비앙카는 나름대로 머리가 복잡했다.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미처 영글지 못한 마음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준비를 끝낸 비앙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휘청이는 그녀의 몸짓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불안했다. 자카리가 성큼 비앙카에게로 다가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이제는 제법 에스코트에 익숙해진 비앙카가 주저 없이 그의 손에 손을 얹었다. 자카리의 손에 느껴지는 것은, 작은 새가 앉은 것처럼 미약한 무게였다.
비앙카는 자카리의 에스코트를 받아,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기다리고 있는 접대실로 향했다. 멀지 않은 길이었지만, 가는 내내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비앙카가 접대실에 들어섰다. 방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이가 들어 머리가 하얗게 새었음에도 허리가 꼿꼿한 남자와, 어설픈 기사처럼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비앙카 그녀의 가족임이 분명한 남자들. 하지만 기억에서는 그저 흐려져 있을 뿐인, 그런 남자들…. 기억 속에서 지워진 가족의 초상화와 지금의 모습을 대조하는 데에만도 한참이 걸렸다.
이런 모습이었었나. 비앙카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들을 빤히 응시했다.
몇십 년 만인지. 과거의 삶에서 비앙카는, 결혼한 뒤로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만난 적이 없었다. 단지 두 통의 서신만을 받았을 뿐. 그녀의 오라버니 조아생, 그리고 아버지 귀스타브의 부고였다.
귀스타브의 부고를 받았지만 비앙카는 그의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차피 자주 뵙지 못한, 기억에도 드문 아버지였으니까. 죽음이라는 것의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기는 했지만, 그 당시의 그녀는 무엇이 달라졌는지 쉬이 깨닫지 못했다.
그녀가 귀스타브의 존재의 든든함에 대해 깨달은 것은 아르노 가에서 쫓겨나는, 그 늦은 순간에서였다. 아버지가 얼마나 든든한 울타리였는지,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그들이 자신을 이렇게 내치지는 못했을 텐데,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아버지가….
하지만 부질없는 외침이었다. 그녀를 비호해 줄 이는 아무도 남지 않았으며, 그녀는 혼자서 자신의 실수에 대한 업보를 짊어졌어야만 했다. 그녀가 그로써 깨달은 것은, 그녀를 그녀답게 하기 위해서는 그녀 스스로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앙카의 시선이 블랑쉐포르 백작, 귀스타브에게로 꽂혔다. 그 당시에 그리도 애타게 존재를 부르짖었지만, 결국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던 아버지였다. 기억 속의 모습보다 더 노쇠한 그는 비앙카가 방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반색했다.
“비앙카.”
“…오랜만이에요, 아버지, 오라버니.”
“정말 잘 자랐구나. 네 엄마를 꼭 빼닮았어.”
“…….”
귀스타브의 다정하고도 그리움이 가득 담긴 어조에 비앙카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단호하고, 엄격하며, 귀족으로서의 품위와 예절을 철저히 지켰다. 그리고 딸도 그러하도록 키웠다.
자카리는 가족의 해후를 위해 자리를 비키려 했다. 하지만 그가 손을 슬쩍 빼기가 무섭게 비앙카가 와락, 그의 손을 잡았다. 깜짝 놀란 자카리가 비앙카를 내려다보았다.
비앙카의 옆모습은 무서울 정도로 차갑고, 냉정했다. 그녀 스스로도 인지 못한 무의식적인 반응인 것 같았다. 결국 자카리는 비앙카를 에스코트한 그대로, 접견실에 우뚝 서서 블랑쉐포르 가의 상봉을 지켜보았다.
“너,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낯을 가리는 모양이로구나.”
쉬이 입을 떼지 못하는 비앙카의 모습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블랑쉐포르 백작이었다. 정치에 있어서는 단 한 번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준 적 없는, 칼날과도 같은 철면피인 그가 묘하게 초조해 보였다. 마치 비앙카의 눈치를 보는 듯이.
결혼할 당시만 해도 어린아이였는데, 훌쩍 커서 완연한 성인의 모습이 되어 돌아온 다 큰 딸자식을 어려워하는 걸 수도 있었다.
어려운 건 비앙카 또한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살가운 부녀 사이도 아니었거니와, 마지막으로 헤어지던 당시 귀스타브가 그녀에게 쏟아내던 엄격한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아직도 족쇄처럼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르노 백작이 잘 해주니?”
“…네.”
“그런데 왜 이렇게 해쓱해져 있어. 피부가 창백한데.”
“…….”
그래서 더 귀스타브의 걱정스러운 질문이 부담스러웠다. 정말로 걱정되기는 해? 비앙카의 마음에 불퉁한 반박의 소리가 치밀었다. 이를 알지 못한 귀스타브는 비앙카를 달래듯 덧붙였다.
“네 유모가 죽었다는 연락은 받았다. 상심이 컸겠구나.”
“…….”
“그래도 돌아오겠다는 말을 하지 않고 잘 버텨줘서 이 아비가 기쁘구나.”
그 순간, 비앙카의 안에서 무언가가 툭 터졌다. 마치 잔뜩 부풀어 오른 돼지의 염통에 칼을 찔러 넣은 듯, 마음에서 솟구친 피가 머리로 몰렸다. 비앙카의 눈빛이 위험스레 번뜩였다. 지금껏 꾹 다문 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입술에서 독기가 흘러나왔다.
“돌아오겠다는 말을 애초에 못 꺼내게 하셨잖아요.”
“…비앙카.”
“제가 돌아오기를 바란 적도 없잖아요! 너는 이제 아르노 사람이다. 아르노 가에서 죽을 생각을 해라! 그렇게 말하셨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