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꼬인 매듭, 풀린 매듭, 다시 꼬인 매듭(8)
침대에 누운 비앙카는 땀을 뻘뻘 흘렸다. 그녀의 둥글고 흰 이마에 땀에 젖은 앞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었다. 이본느는 흰 아마포에 물을 적셔, 비앙카의 땀을 계속해서 닦아주었다. 끙끙 앓는 비앙카의 모습에 이본느는 연신 안타까이 신음을 흘렸다.
살풋 감긴 눈꺼풀 아래 비앙카의 연녹빛 눈동자가 어물어물 흔들렸다. 그녀의 시선 끝에 자카리가 보였다. 언제부터 서 있었던 걸까.
구석에 우뚝 서서 낯선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모습은 죽음의 신 같았다. 퀭하니 뚫린 사신의 눈동자처럼, 그의 까만 눈동자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비앙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입술이 벌어졌다. 평소 보드랍고 매끄러워 보였던 입술은 거슬거슬하니 터 있었다.
“…재단사를 불러야 하는데요.”
“몸이 낫거든 얼마든지 부르시오. 그대가 갖고 싶은 건 내 뭐든 사 주리라.”
꺼져 가는 등불과도 같은 미약한 비앙카의 목소리. 말 한 마디 하는 게 얼마나 힘겨울까 싶었던 자카리는 다급히 덧붙였다. 아니나 다를까, 비앙카는 몇 마디 잇지도 못하고 콜록였다.
비앙카와 자카리의 대화에 방해되지 않게 뒤로 빠져 있던 이본느가 당황스레 다가왔다. 하지만 자카리가 먼저였다. 언제 다가온 건지, 구석에 서 있던 자카리가 이본느에게 손수건을 빼앗아 비앙카에게로 향했다.
부드러운 실크 손수건 너머로 자카리의 투박한 손길이 그대로 느껴졌다. 달걀을 쥔 듯 조심스러우면서도, 그대로 굳어버린 듯 꿈쩍도 하지 않는 단단한 손길. 그 손길이 부담스러웠지만 밀어낼 기력이 없던 비앙카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에 의지하여 기침을 뱉어냈다.
몇 번이나 기침을 했을까. 그제야 기침을 멈춘 비앙카가 지친 기색으로, 희뿌연 미소를 띤 채 자카리를 향해 눈짓했다.
“제 옷이 아니라, 백작님 옷이요.”
“…….”
자카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잔뜩 찌푸린 눈썹 아래 깊게 패인 눈동자가 분노로 타올랐다. 자카리는 화가 났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화였다. 얼마나 제 옷차림새가 미흡했으면, 비앙카가 아픈 와중에도 신경 쓴단 말인가?
지금까지 외모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대충 뱅상이 챙겨주는 대로 입어 왔는데, 그것이 실책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비앙카가 지금껏 자카리만 보면 얼굴을 찡그렸던 일도, 그의 옷차림새가 차마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자카리는 전쟁에 능통했고, 마술이라면 당할 자가 없었으며, 온갖 무기와 병법을 섭렵하고 있었다. 영지의 세율에도 눈이 밝았고, 농사일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 영지민들의 불만이 적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자카리가 잘하는 것은 그의 세계의 일일 뿐, 비앙카의 세계의 일들엔 눈뜬장님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뱅상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만큼도 못해 냈을 테지만, 뱅상마저 비앙카의 눈에 차지 않는다는 걸 생각하니 자카리의 가슴에 돌이 쿵, 하고 얹혔다. 지금껏 비앙카가 바라는 건 무엇이든 들어주려 노력했다는 건, 그저 자신의 착각이었을 뿐이다….
자카리가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곱씹고 있을 때, 비앙카는 자카리가 자신에게 화를 낸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도통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자카리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아픈 여자에게 와서 화를 내는 남자가 아니라는 건 안다. 옷을 새로 맞추는 것이 그가 불편함을 숨기지 못할 정도로 번거로운 일인 걸까? 비앙카는 어깨를 움츠러트리며, 조심스레 말했다.
“옷을 새로 맞추는 게 번거로우시긴 하겠지만…. 괜찮은 옷 몇 벌 정도는 있어야지요.”
“나는 번거롭지 않소. 그대가 아픈 와중에 그런 걸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서 그런 것이오. 내 옷은 걱정 마시오.”
딱딱하나마 진심이 담긴 대답이었다. 그가 비앙카에게 화난 게 아니라는 사실에, 비앙카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전히 그녀는 그의 눈치를 본다. 그것은 무척 지치는 일이었다. 몸살이 나서 시름시름 한 상태라서 더더욱. 머리가 몽롱하다 보니 빠릿빠릿하게 돌아가지도 않고…. 어쩌면 자카리가 화난 것처럼 보인 것도 그녀의 환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치 없는 자카리는 비앙카가 한숨 돌릴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자카리는 느릿하게 한숨을 내뱉는 비앙카의 위로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던졌다.
“이제 며칠 뒤면 블랑쉐포르 가에서도 수도에 도착할 것이오. 그 전에 나았으면 좋겠군.”
“아….”
자카리는 나름 비앙카를 신경 써서 건넨 말이었을 테지만, 비앙카의 입장에서는 뒤통수를 맞은 듯 얼떨떨했다. 블랑쉐포르 가 또한 명문이니, 당연히 왕실의 결혼식과 같은 대소사에 참여할 것이다. 왜 지금껏 단 한 번도 생각을 못 했지?
멍한 비앙카의 모습에 자카리는 걱정스레 물었다.
“왜 그러시오?”
“아뇨. 만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비앙카의 씁쓰레한 중얼거림이 무엇 때문인지 자카리는 알지 못했다. 당연히 아버지를 만나게 되어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주저하는 걸까?
‘혹시 내가 반대할까 봐 그러는 걸까.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지금껏 십 년이 넘는 동안 친정에 한 번도 보내지 않은 매정한 남편이니까….’
자카리로서는 변명할 이유가 잔뜩 있었지만, 가족과 떨어진 채 십 년의 세월을 보낸 비앙카에게는 부질없을 뿐이다. 자카리는 자신의 죄를 사죄하듯, 비앙카 앞에 잔뜩 머리를 조아렸다.
“그대의 친정이오. 당연히 만날 수 있소. 그대가 아르노 가에 오고 나서 10년이나 흘렀소. 그동안 친정에 가지 못한 것도 미안한데, 내 어찌 그대가 아버지와 만나는 걸 막겠소?”
“아뇨, 아니에요. 당신 때문이 아니라….”
비앙카는 자신의 앞에서 움츠러드는 자카리의 넓은 어깨를 보며 당황스레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뚝은 몇 번 손을 내젓기가 무섭게 침대로 허물어졌다. 기력이 없는 상태에서 흥분하다 보니 숨이 찼다.
“블랑쉐포르 백작도 그대를 보고 싶어 할 것이오.”
“…그럴까요.”
“당연하지.”
“자신이 없는데.”
십 년 만에 가족을 만나는 일임에도 비앙카는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에 띌 정도의 거부감만이 느껴졌다. 자카리처럼 형에 의해 쫓겨난 것도 아니고, 일곱 살에 집을 떠난 비앙카가 무슨 이유가 있어 가족을 꺼린단 말인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자카리는 그가 느낀 궁금증을 그대로 입에 담았다.
“아버지를 만나기 싫소?”
“아뇨. 그건 아니고.”
자카리의 질문은 지나치게 곧았다. 이런 말은 좀 빙빙 돌려서 해줘도 좋으련만. 비앙카는 쓰게 웃었다.
아버지를 만나지 않은 지도 십여 년, 회귀 전까지 합친다면 거의 삼십여 년이 넘어간다. 그녀가 아버지에게 품고 있는 것은 명쾌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움, 애틋함, 어색함….
그리고 내쳐졌다는 기억.
그녀가 자카리와 결혼하고 블랑쉐포르 가의 저택에서 떠나갈 때, 아버지가 비앙카에게 단단히 당부했던 말이 그녀의 귓가에 웅웅거렸다.
잊을 수 없는 그 말. 어렸던 비앙카가 블랑쉐포르 가로 돌아가고 싶다 떼써 본 적이 없는 이유. 그녀가 받은 유일한 편지가 바로 가족의 부고였던 이유. 회귀한 그녀가 단 한 번도 가족을 찾아본 적 없는 이유….
‘너는 이제 아르노 사람이다. 블랑쉐포르 가로 돌아올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말거라! 집으로 돌아오면 그대로 내쫓을 줄 알아!’
쩌렁쩌렁 귓가에 울리던 엄격한 외침. 그녀를 블랑쉐포르 저택에서 밀어내는 듯한 그 목소리를 떠올리면 목이 죄는 느낌에 숨이 막혔다. 비앙카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녀의 하얀 손가락 끝이 다른 쪽 손의 손등을 이유 없이 어루만졌다.
“그냥…. 기뻐하실지 잘 모르겠어서요.”
언제나 턱 끝을 바짝 당긴 채 목을 꼿꼿이 세우는 그녀답지 않게, 드물게 자신 없어 하는 비앙카의 얼굴은 희게 질려 있었다. 그것이 그저 몸이 좋지 않아서는 아니라는 걸 자카리는 알았다.
자카리의 얼굴이 비틀렸다. 그의 까만 눈동자는 고통으로 얼룩진 채 비앙카를 응시했다. 답지 않은 그녀의 모습 위로 자카리 본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에게 내쳐지던, 열여섯 살의 자카리. 세상 모든 것에서 내쫓겼던 그때의 자신이.
블랑쉐포르 백작은 썩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다소 엄격하고 냉정했고, 귀족으로서 고압적인 면은 있을지언정 수탈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지민들에게 믿을 만한 영주였고, 세브랑 왕가에 있어서는 충성스러운 가신이었다. 비단 장인어른이기에 평가가 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세브랑을 위하는 충신이었다. 적통성 있는 1왕자의 세력을 견고히 하기 위해 일곱 살 난 딸아이를 결혼 장사의 제물로 바칠 정도로.
하지만 좋은 백작이라 하여 좋은 아비란 보장은 없는 법이었다. 그가 좋은 아비였다면, 비앙카가 이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다. 자카리는 확신했다.
가까이 있으니 비앙카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까지 보였다. 안쓰러운 모습에 자카리의 속이 뒤집어질듯 불이 붙었다. 자카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싫으면 만나지 않아도 되오.”
“그래도.”
“그대가 싫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