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65화 (65/192)

#65 꼬인 매듭, 풀린 매듭, 다시 꼬인 매듭(6)

“우리가 앞으로 머물 곳은 이곳이오.”

자카리는 비앙카를 그들이 머물 숙소까지 에스코트했다.

왕은 성을 찾아온 귀족들을 위해 탑을 내어주었다. 귀족들의 신분과 권력에 따라 탑의 층수와 방의 화려함이 결정되었다. 자카리가 전쟁 영웅으로 이름을 날리는 만큼, 아르노 가는 꽤 좋은 방을 받을 수 있었다.

둥근 아치형의 창문이 벽난로의 좌우로 나란히 나 있었고, 벽난로에서 머지않은 곳에는 침대가 있었다. 궤짝 위에는 쿠션이 있었고, 벽난로 앞에는 불을 쬘 수 있도록 의자가 놓여 있었다.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 벽난로를 장식한 조각까지.

앞으로 몇 개월간 지내야 하는 방이 화려하니 비앙카의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비앙카와 자카리가 왕을 알현하는 동안 하인들이 짐을 옮겨 두었는지, 눈에 익은 궤짝과 물건들이 소소히 보였다.

“익숙한 물건이 보이니 우리 성에 있는 것 같네요.”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비앙카는 살짝 웃었다. 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밖의 전망을 보았다. 친근한 방 안과 달리 아르노 영지보다 번화한 모습이 생소하게 다가왔다.

자코브와의 일로 수도에 온 걸 잠깐 후회했지만, 방이 마음에 쏙 든 비앙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우리 성…. 과 비슷하게 느껴주니 다행이로군.”

자카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머뭇거림이 섞인 자카리의 미묘한 말투를 눈치채지 못한 비앙카는 두리번거리며 방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 모습이 마치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 같았다.

“수도에 따라오길 잘했어요.”

“그 또한 다행이고.”

기뻐하는 비앙카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자카리의 가슴 한구석이 뻑적지근해지면서 두근거렸다. 무뚝뚝한 답밖에 못하는 스스로가 답답하기도 했다.

그 순간 비앙카가 고개를 휙 돌려 자카리를 응시했다. 그윽한 시선이 흔들림 없이 자카리를 위아래로 훑었다. 갑작스레 자신을 살피는 비앙카의 모습에 자카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표정한 얼굴 아래, 혹시 자신이 비앙카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말을 했던 건 아닌지 걱정하는 소심한 사내가 있었다.

자카리에게는 영원처럼 긴 시간이었지만, 실제로는 비앙카가 자카리를 한번 훑어볼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저도 모르는 새 자카리를 마음 졸이게 한 비앙카는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했다.

“제가 당신 옷을 놓고 온 것도 다행인 거 같아요.”

“왜?”

“수도라 그런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화려하게 입고 다니더라고요. 예전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었더라면, 얕잡아 보였을지도 몰라요.”

전혀 감을 못 잡겠다는 듯한 자카리의 얼굴을 보며 비앙카는 피식 웃었다.

자카리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그나마 그가 갖고 있던 옷 중 괜찮은 옷이었다. 검은색 일색이라 다소 투박해 보이지만, 잘 보면 섬세한 옷감의 무늬가 고급스러웠다.

하지만 고티에 왕자나 자코브 왕자가 입고 있는 옷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붉은색이나 보랏빛의 값비싸고 귀한 옷감을 넉넉하게 썼고, 옷을 여미는 단추 또한 전부 금과 보석으로 세공했다. 자카리가 튼튼함을 위해 소가죽 부츠를 신는 것과 달리 신발은 여린 양가죽이었다.

자카리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그의 눈썹 위로 은회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차림새가 무슨 문제였는지 모르는 것 같아 보였다.

“난 계속 그렇게 입고 다녔지만 얕잡아 보인 적 없소.”

“그야 그랬겠죠.”

딱딱한 자카리의 말에 비앙카는 어련하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 누가 전쟁 영웅인 자카리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겠는가?

하지만 나라님 없는 곳에서는 나라님 욕도 하는 법이다. 그가 듣지 못하는 곳에서 무슨 소리가 오고 갔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제가 신경 쓰여서 그래요.”

비앙카가 자카리에게 다가왔다. 둘 사이의 거리가 지척이었다. 비앙카는 자카리를 다시 한 번 살폈다. 확실히 검은색 옷이 잘 어울린다. 햇빛 아래 그을린 피부 때문에 어설프게 밝은 색은 피하는 게 나을 것 같고. 오히려 머리카락이 은회색인 만큼 흰옷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확실히 체격이 좋다 보니 뭘 입혀도 좋을 것 같았다. 지금 입고 있는 옷처럼 장식은 최대한 배제하고, 눈에 띄는 배색보다 단색에 자잘한 패턴의 무늬가 은은히 들어간 옷이 낫겠다. 비앙카는 머릿속으로 자카리에게 어울릴 옷들을 가늠해 보았다. 자카리의 어깨나 가슴팍이 넓다 보니 천은 크게 써야겠다.

저도 모르게 비앙카의 손이 자카리의 어깨와 가슴을 툭툭 건드렸다. 자카리는 크게 움찔했지만, 비앙카의 손을 피하지 않은 채 꿈쩍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비앙카는 자카리의 옷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 고심하느라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급하게 옷을 맞춰야 했으니 천을 새로 짜게 할 시간은 없었다. 있는 천을 이용해 옷을 만들게 시켜야 하니 결국 재단사를 불러야 해결되는 일이었다.

자신이 무의식중에 무슨 짓을 했는지 자각하지 못한 비앙카는 빙긋 웃으며 자카리를 달래듯 말했다.

“당신은 제 남편이잖아요. 남편에 대해 좋은 평가만 받고 싶거든요. 근 시일 내로 재단사를 불러야겠어요. 당신 옷이 제일 시급하니까.”

자카리의 말문이 막혔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무언가 말하듯 일렁였다. 이제 비앙카도 자카리의 표정을 잘 구분한다고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의 생각을 짐작하는 재주까지는 없었다.

재단사를 불러서 옷을 맞추는 것이 귀찮다는 걸까? 내가 유난을 떤다고 생각하는 걸까? 비앙카가 자카리의 표정을 읽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이, 자카리는 평소처럼 바늘 한 땀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무뚝뚝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대 좋을 대로 하시오. 하지만 오늘은 방에서 쉬는 걸 권유하고 싶군.”

“안 그래도 오늘은 지쳤어요.”

비앙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마차 안에서 뒹굴거리기는 했지만 여행이라는 것이 은근 체력을 잡아먹는 법. 거기에 왕을 알현한답시고 간만에 잔뜩 긴장하기도 했고, 자코브의 일로 신경 쓰다 보니 머리도 지끈지끈했다.

자카리는 비앙카의 눈 밑에 매달린 피로함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그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겉으로 드러내면 좋으련만. 자카리는 속내가 전혀 드러나지 않은 무던한 목소리로 말했다.

“쉬고 있으시오. 나는 일을 보고 오겠소.”

“네.”

“쉬고 있으래도.”

“당신 가는 것만 보고요.”

그만 쉬라는 자카리의 만류에도 비앙카는 부득불 그의 등을 떠밀며 문 앞까지 자카리를 배웅 나갔다. 적극적인 그녀의 태도를 강하게 거절할 수는 없는지라, 자카리는 저항을 포기한 채 순순히 그녀의 손길에 떠밀려 나갔다.

“…내일 보도록 하지.”

“그래요.”

비앙카는 문에 비스듬히 기댄 채 자카리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카리는 비앙카의 배웅이 어색한 듯, 몇 번이고 뒤돌아보았다. 그것이 마치 집에서 내쫓긴 어린애처럼 처량맞아 보였던 비앙카는 픽 웃었다.

‘어린애 같기는 무슨…. 나도 배짱이 늘었나 보네.”

철혈 백작이라 불릴 정도로 전쟁에서 악명을 날리는 자카리다. 처음에 그와 마주했을 때는 눈을 마주치기가 무섭게 울어버렸을 정도로, 그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는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전장을 누비며 살기가 몸에 배어버린 건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그는 마주한 사람을 주눅 들게 했다.

그랬던 자카리를 보고 어린애 같다고 생각하다니!

비앙카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옷차림새를 신경 써주는 건 객관적으로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자카리의 생활에 있어서 비앙카의 손길이 한 번이라도 더 닿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익숙해지고, 그의 삶에 녹아드는 느낌.

처음에 어떻게든 그를 유혹해서 애를 가져야 한다는 것에만 집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카리와 같이 어울리는 이 상황이 퍽 즐겁게 느껴졌다. 그건 좋은 점이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와 함께 있을 텐데, 부부 사이가 불편한 것보다는 편하고 즐거운 쪽이 나은 건 당연하니까.

하지만 단지 즐거움을 느낀 것일 뿐이었다. 즐겁다 확답조차 하기 부족한, 어렴풋한 감정. 부부 간의 사랑을 떠올리기에는 멀어도 한참 먼 상태였다.

그래도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앞에 서던 때에 비하면 일보 전진임에는 틀림없었다. 지난 겨울에 비하면 많은 것이 바뀌었고, 그것은 모두 비앙카가 포기하지 않고 자카리에게 치근덕거려 이루어낸 성과였다. 비앙카는 스스로를 자화자찬하며 용기를 북돋았다.

하지만 현실의 벽이 그녀의 마음을 한풀 꺾이게 하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같은 침실을 쓰지 않게 된 건 좀 충격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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