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꼬인 매듭, 풀린 매듭, 다시 꼬인 매듭(5)
“하여간 둔한 주제에 이럴 땐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니까.”
한숨 쉰 자코브는 뒷목을 긁적였다. 깜짝 놀랐다고는 하나 얼굴은 미끈미끈하니 천연덕스럽다.
자코브는 표정 관리가 철저한 남자였다. 안색이 낯에 쉽게 드러났다면, 적국과 손을 잡고 고국을 공격하면서도 지금껏 들키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희대의 연극배우는 아닐지라도, 희로애락 정도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법으로 드러낼 정도는 되었다. 자코브는 태연한 낯으로 쩝, 입맛을 다셨다.
“그만큼 내가 너무 노골적이었나? 하긴. 불편한 걸 말하라는 건 좀 오지랖 같아 보이긴 했겠군. 아버님이 웬일이냐 물었을 정도였으니….”
자코브는 턱을 매만지며 아까 전 일을 회상했다. 굳이 고티에가 따라붙어 이상한 짓 하지 말라 엄포를 놓고 간 걸 보아하니 어지간하긴 했던 모양이다.
표정 관리에 자신이 있는 만큼, 자코브는 단지 자신의 엉뚱한 제안이 문제였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돌이켜 생각했을 때도 뜬금없는 제안이기는 했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이미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입 밖으로 나온 뒤였는걸.
“깜짝 놀랐단 말이지….”
비앙카가 접견실에 들어왔을 때, 자코브는 뒤통수를 후려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까닥이며 숙인 가는 목 너머로 흘러내리는 고동빛 머리카락. 지금껏 딱히 특정 대상에 성적 쾌감을 느낀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비앙카의 짙은 머리카락은 그를 순식간에 옭아맸다. 자코브는 처음으로 자신이 짙은 색 머리카락에 흥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겨울에 내린 눈처럼 새하얀 피부는 머리카락 색과 대비되어 더욱 창백해 보였다. 저 하얀 피부가 이미 다른 남자의 손을 탔다는 사실은, 순결한 베일이 진흙 발로 짓이겨진 듯한 분노를 일으켰다.
그녀의 몸매는 빈말으로라도 풍만하지 못했지만, 가는 몸 선이 맵시 있고 매끄러웠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버드나무같이 낭창한 몸은 한 손에 잡힐 정도였다. 설핏 보인 얼굴은 섬세하게 빚어 놓은 인형처럼 아름다웠지만, 그녀를 더 매혹적으로 보이게 한 것은 바로 얼굴에 드러난 표정이었다. 단정하게 정돈된 눈썹과 길게 뻗은 속눈썹 아래 연녹빛 눈동자는 그녀의 도도하고도 높은 자존심을 나타내듯 서늘하게 빛났다.
지금껏 자코브는 귀족 여인들의 부질없는 자존심을 비웃어 왔지만, 비앙카를 만난 순간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비웃어야 하는 건, 자신만큼은 그런 여인네들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던 자코브, 본인이었다.
자코브는 비앙카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못 박힌 것처럼, 자코브의 눈길이 비앙카를 좇았다. 눈이라도 한번 마주치면 좋으련만, 비앙카는 계속해서 고개를 비스듬히 숙인 채였다. 오죽하면 일부러 자카리의 시선을 피하나 싶을 정도였다.
이상한 제안, 이상한 태도. 아마 고티에는 그런 자코브의 태도에 더 수상쩍어 했으리라. 자코브 스스로도 평소의 저답지 않았다는 건 인정했다. 비앙카에겐 자코브를 순식간에 사로잡을 만큼,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래. 확실히 탐이 나기는 하단 말이지….”
자코브는 입맛을 다셨다. 그와 눈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는, 거리 두는 모습이 도망치는 토끼와 같아서 쫓고 싶은 본능이 치밀었다. 그래서 더 눈으로 그녀를 좇은 것일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결국 그녀도 여자다. 촌구석에서 이제 막 수도로 올라온지라 정숙한 척 구는 것일 뿐이다. 사치스럽고 쾌락이 넘치는, 수도의 화려한 생활을 영위하고 나면 꽁꽁 닫힌 그녀의 빗장도 스르르 풀릴 것이다. 자코브는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자코브는 여자의 틈을 공략하는 일에 무척 자신 있었다. 세브랑 왕가의 피를 이은 자코브의 외모는 화사하기 그지없었고, 고티에에 비한다면 남자다운 매력도 넘쳤다. 그녀의 남편인 자카리 또한 무인으로서 건장하고, 잘생긴 편이었지만 무뚝뚝하고 매섭기 그지없으니, 화사하고도 화려한 자코브의 외모라면 그녀의 여심도 흔들릴 것이다. 그녀가 특이한 취향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다행이라 해야 할지, 그녀는 그렇게까지 남편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일은 쉽게 풀리리라.
자코브가 비앙카를 꼬시기로 결정하는 데에는 비앙카가 이미 결혼했다는 사실도, 그녀의 남편이 자코브의 적이라는 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다른 사내의 손이 탔다는 생각에 눈에 불길이 치솟기는 했다. 하지만 곰곰이 아라곤의 약조를 떠올려 보니, 오히려 비앙카가 결혼한 상태여서 다행이었다. 비앙카가 처녀였다면 불장난은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치고는 위험부담이 컸을 것이다. 덜컥 뒷덜미가 잡혀 결혼이라도 말이 오가게 되면 큰일이었기에 지금껏 창녀나 유부녀만을 상대해 온 것이 아니던가.
자코브는 아라곤과 동맹을 맺기 위해 수많은 약조를 했다. 그중 아라곤이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아라곤의 왕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에게 세브랑의 왕실을 잇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세브랑이 풍요롭고 살기 좋은 것에 비해 아라곤은 눈발이 거세게 휘몰아치는 척박한 나라였다. 먹고살기 팍팍한 아라곤과 달리 세브랑은 점점 더 발전해 나갔고, 벌어지는 격차 아래 아라곤을 야만국이라 폄훼하곤 했다. 바다의 강자 카스티야 왕국과는 몇 번이고 결혼 동맹을 성사시켰지만, 아라곤과는 단 한 번도 왕가의 결합을 맺은 적이 없는 것도 그러한 일환의 일이었다.
왕가의 결혼에 끼는 것!
그건 자존심 문제였고, 아라곤의 숙원과도 같은 일이었다. 오죽했으면 이십여 년간 도박이나 다름없는 전쟁을, 자코브만을 믿고 일으켰겠는가.
결혼 적령기가 한참 지났는 데도 불구하고 자코브가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은 것은 그런 아라곤 왕가에 대한 신의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자코브 입장에선 나쁠 것 없는 일이었다. 언제든지 손을 뻗으면 취할 수 있는 창관의 여인들이나 그에게 추파를 던지는 귀부인들이 있으니 여자가 부족한 것도 아니요, 아르곤 왕가는 미래의 외척으로서 그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물며 전쟁일지라도.
게다가 그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가중되는 반란 의혹을 어느 정도 잠재울 수도 있었다. 왕이 되려는 자는 보통 사돈 인척을 이용해서 기반을 쌓는 것에 비해 자코브는 그런 일들에 심드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왕과 고티에는 자코브가 욕심이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것이 심하게 경계해야 할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자코브는 아라곤과의 동맹을 흡족히 여겼다. 아라곤이 주는 이 많은 혜택을 거부하고 아내로 삼고 싶을 정도로 탐나는 여자도 없었다. 비앙카 또한 마찬가지다. 아라곤과의 동맹을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다….
자코브는 스스로를 잘 알았다. 그는 욕심이 많아 갖고자 하는 걸 전부 가져야 속이 풀렸지만, 동시에 변덕스러운 기질이 있었다. 지금은 비앙카를 갖고 싶은 욕심이 그를 뒤흔들었지만, 그녀를 꾀고 나면 그에게 남아 있는 질척이는 미련이 뚝 떨어질 것이다.
만약 그녀를 품고 나서도 그녀를 원하게 된다면, 자카리를 죽이면 된다. 어차피 자코브는 자카리를 처리해야 했다. 그는 비앙카의 남편이었지만, 동시에 고티에의 창이자 방패였으니까. 그리고 자카리를 죽이기 위해서라도 아라곤의 협력은 중요했다. 결국 자코브는 아라곤 왕국과 함께해야만 했다.
‘자카리가 죽고 나면 과부가 된 그녀를 정부로 둘 수 있잖아? 어차피 아라곤 왕녀와 금슬 좋게 지낼 생각은 없었으니까.’
아라곤의 왕녀 정도야, 구워삶는 건 일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자코브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번졌다.
“아녀자를 이용하는 건 기사답지도 않고, 왕자답지도 않다라…. 하지만 왕이 되고자 하는 자로서는 그럴 수도 있는 행동이지. 안 그래? 그러니까 형이 안 되는 거야. 적통으로 태어나서, 아버지의 편애를 받으면서도, 나 때문에 왕위가 위태로운 건 형이 너무 정의로워서라고.”
그런 식으로라도 해서, 손에 더러운 피를 묻히게 되더라도 이용할 건 이용해야 했다. 여자든, 아이든, 모조리 이용할 수 있는 탐욕스러운 자만이 왕좌에 앉을 수 있는 법이었다. 고티에 혼자 고결한 척하라지. 그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기에 자코브는 아라곤과의 동맹을 맺을 수 있었고, 그래서나마 왕좌가 손에 잡힐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자코브의 위로 그의 화사한 외모조차 덮어버릴 듯한 음침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양심도 명예도 모조리 내다 팔은, 매국노의 그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