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63화 (63/192)

#63 꼬인 매듭, 풀린 매듭, 다시 꼬인 매듭(4)

“단지 그것 때문은 아니오. 2왕자는….”

자카리는 말끝을 흐렸다.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그의 입안에서 떠올랐다 사라진 것들은 과연 어떤 말들이었을까. 비앙카는 차분히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음험한 사내요.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만큼, 나는 그대가 그와 가까이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한참 끝에서야 자카리는 자코브를 ‘음험한 사내’로 정의 내렸다. 자코브가 왕자라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단호한 정의였다.

자코브에 대해 말하는 자카리의 목소리에선 불쾌감이 묻어났다. 항상 무덤덤하여 호불호가 강하게 드러나지 않는 자카리가 이리 반응할 정도니, 그가 자코브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단지 정치적 숙적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카리의 미묘한 어투에서 비앙카와 자코브가 엮이는 것 자체를 꺼려하는 게 느껴졌다.

어쩌면 자코브가 비앙카에게 ‘불편한 걸 말하라’ 했던 것을 추근거리는 것으로 착각한 걸지도 모른다. 어엿하게 남편인 자카리가 옆에 있는데,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행위라고 받아들이는 것도 당연했다.

자카리가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든, 비앙카는 자코브와 가까이하지 말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자카리와는 수많은 갈등만을 빚었지만, 자코브에 관한 것만큼은 비앙카도 동감이었다.

그는 확실히, 음험한 사내였다.

아라곤 왕국과 손을 잡은 것만 해도 그랬다. 거의 이십여 년간이다. 얼마나 꽁꽁 숨겼는지, 자코브가 아라곤과 손을 잡았다는 게 밝혀진 것은 그가 세브랑을 전부 집어삼키고 나서였다. 왕좌에 오른 자코브는 아라곤의 왕녀와 결혼했다. 아마 동맹을 확고히 하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단지 그랬을 뿐이라면, 비앙카가 자코브를 이리 꺼려 하지는 않았으리라. 자코브가 왕이 되고 오래되지 않아 아라곤 왕녀의 불륜으로 시끌시끌해진 일이 있었다. 상대는 아라곤에서 같이 온 왕녀의 호위기사. 그와 짐승처럼 잠자리하는 모습을 자코브가 발견했다 하였다.

타향살이로 인한 향수와 외로움. 불륜에 대한 이유로 추측되는 것들은 많고 많았다. 다들 왕녀를 욕했다. 하물며 아라곤 왕국에서도 이 일에 대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코브가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만큼 아라곤 왕국의 기세가 등등했지만, 왕녀의 불륜 이후, 불륜을 저질렀음에도 내쫓지 않고 그녀를 왕비로 두는 자코브의 자비에 감사해할 뿐이었다.

하지만 비앙카는 왕녀를 욕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선 기시감이 느껴졌다. 비앙카 또한 그런 이유로 내쫓기지 않았던가. 만들어진 덫에 아무것도 모르고 제 발로 들어갔었다. 왕녀도 그랬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자코브는 그런 사내였다.

비앙카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던 푸른 눈빛을 떠올렸다. 뱀이 기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방금 있었던 일처럼 선명했다. 자카리가 이렇게 당부하지 않아도 비앙카가 먼저 뒤돌아서 달아나야 할 상황이었다. 비앙카는 다시금 피부에 떠오르는 소름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비앙카의 목소리는 재고의 여지조차 없다는 듯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자카리는 여전히 불안함을 지우지 못했다. 그는 비앙카에게 몇 번이고 더 신신당부했다. 듣는 비앙카로서는 지겨울 정도였다.

“혹여 마주칠 일이라도 생기거든,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서라도 빠져나오시오. 항상 가스파르와 함께 다니고.”

“걱정 마세요. 2왕자도 공사다망할 텐데, 이 넓은 성 안에서 그리 쉽게 마주치겠어요?”

비앙카는 걱정 말라는 듯 웃었지만, 자카리는 대답하지 않은 채 입만 꾹 다물었다. 비앙카의 말에 동의하지 못하는 듯, 그의 미간이 일그러지며 눈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마음 같아서는 비앙카를 방 안에 가둬 두고 싶다는 느낌이 풀풀 풍겼다. 원래 이렇게까지 잔걱정이 많은 사내였나? 전쟁터에서 생사의 경계를 오가는 일이 잦은 만큼, 좀 더 대범할 거라 생각했는데….

비앙카는 예상치 못한 남편의 소심한 모습에 놀랐다. 솔직히 자코브는 음험한 사내였지만, 그렇다 하여 저렇게 걱정할 정도의 상황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리 활동적인 편이 아니었고, 굳이 자코브가 그녀를 찾아오지 않는 한 마주칠 일이 없을 테니까.

그리고 자코브가 그녀를 찾아올 일도 없었다. 안 그래도 자코브는 고티에 왕자파에게 설마 하는 불안감만 안겨준 채, 지금 한창 ‘내숭’을 떨고 있을 시기였다. 자코브가 그녀를 노려본 것은 그녀가 블랑쉐포르의 딸이자 아르노 백작 부인이기 때문이었고, 다시 말하면 그에게 있어 그녀의 가치는 그뿐이었다. 굳이 그녀의 아버지도, 남편인 자카리도 아닌 비앙카를 찾아올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때만 하더라도 비앙카는 자코브와의 해프닝을 가볍게 여겼다. 정말로. 설마 했던 일이 벌어지게 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 * *

비앙카와 자카리가 나가고, 오래되지 않아 왕의 오수 시간이 되어 고티에와 자코브도 밖으로 나왔다. 왕의 앞에서는 생글생글 웃으며 나름 우애 좋은 형제처럼 굴었지만, 접견실을 나오기가 무섭게 둘의 표정이 굳었다.

고티에는 바로 자코브를 돌아보며 아까 전의 대화에 대해 추궁하듯 캐물었다. 유약한 시인처럼 보이는 것에 비해, 기세가 자못 사나웠다.

“우리 알베르의 약혼을 축하해?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 저에게 말해? 도대체 무슨 꿍꿍이냐?”

“꿍꿍이라니? 내가 무슨 의도가 있다는 것처럼 들리네.”

“그게 아니란 말이냐?”

“순수한 호의지, 호의.”

자코브는 능청스레 어깨를 끄덕였다. 짧은 대화에서 오가는 신경전이 날카로웠다.

자코브는 자신의 야욕을 완전히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렇다 하여 형인 고티에에게 좋은 동생인 척할 정도로 배알이 없진 않았다. 성격에 맞지도 않고. 어느 정도 야욕이 있다는 걸 드러내는 쪽이 속 편했다. 거짓말을 하려면 진실에 섞어라. 그게 아니었다면 십여 년간이나 속내를 완벽히 숨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 덕인지, 고티에는 자코브가 그저 권력욕이 있구나 정도로 생각할 뿐 그가 왕이 되고자 한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왕은 고티에를 후계자로 지목했고,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인재들 또한 많았다. 자코브가 ‘어느 정도’ 욕심을 내도 그가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숨겨지지 않은 자코브의 욕심이 얼마나 장대하고, 그를 위해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지를 알았더라면 자코브를 그냥 두진 않았을 테지만, 결론은 ‘알지 못한다’였으니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어차피 아르노 경은 형의 충실한 개잖아. 내가 거기에 가서 치근덕댄다고 나한테 꼬리를 살랑거릴 만큼 호락호락한 개는 아닐 텐데?”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개에게, 갑자기 무슨 호의지? 넌 보답 받지 못할 일은 하지 않는 성격이잖니. 엉뚱한 말로 논점을 흐리지 마라, 자코브.”

이 정도 수위의 대화는 두 형제 간에 자주 오가곤 했다. 자코브는 ‘욕심이 있지만 그를 미처 감추지 못하는, 역량이 다소 부족한 둘째’의 역할을 잘 행하고 있었고, 고티에는 그에 껌뻑 속아 넘어갔다.

블랑쉐포르 백작은 자코브를 ‘음험하고 속을 모르는 자’라고 평가했지만, 고티에는 고개를 내저었다. 등 뒤에 비수를 감추는 이에 비한다면,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것이 뻔히 보이는 상대는 별로 위험하지 않다. 어차피 왕위는 저에게 올 텐데, 괜히 분란을 일으켜 아버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고티에는 자코브를 그냥 두었다.

고티에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경고했다.

“네가 블랑쉐포르 백작과 아르노 백작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아녀자를 이용하려는 생각이면 그만둬. 기사답지도, 왕가의 사내답지도 못한 행동이다.”

“아, 내가 그녀를 노리는 걸 눈치챘어?”

“자코브!!”

농담 어린 자코브의 반문에 고티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는 몸에서 나오는 힘 있는 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하지만 자코브는 배를 잡고 낄낄 웃을 뿐이었다. 고티에는 얼굴을 굳히고는, 참을성 있게 그의 조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웃었을까. 손가락으로 눈가를 훔친 자코브는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내가 그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건 아니지. 그들이 날 눈엣가시처럼 여기니까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자코브.”

“내가 몸만 잘 쓰는 거에 비해 형은 머리 좋잖아. 그 좋은 머리로 생각하는 게 고작 내가 아녀자를 이용한다는 거라니 좀 안타깝네.”

자코브는 비꼬는 말투로 고티에의 속을 닥닥 긁었다. 고티에는 일렁이는 파도와 같은 새파란 눈동자로 자코브를 빤히 노려본 뒤, ‘허튼짓 하지 마’라고 덧붙이고는 휙 몸을 돌려 저 멀리로 총총 떠났다.

고티에의 뒷모습이 사라지기까지, 복도에 한참을 우뚝 서 있던 자코브의 입술이 삐뚜름히 올라갔다.

“하여간 둔한 주제에 이럴 땐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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