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꼬인 매듭, 풀린 매듭, 다시 꼬인 매듭(2)
성채의 첫 관문을 지난 뒤로도 일행은 세 번 더 관문을 지나야 했다. 라호즈의 본성은 첨탑처럼 높이 솟아 있었고, 그 밑으로 세 겹이나 되는 성채가 본성을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숲을 지나는 동안 마차 안에 꽁 숨어 있던 비앙카도 수도 구경은 참을 수가 없었다. 비앙카는 창문의 장막을 슬쩍 걷어내고 그 틈새로 밖을 구경했다.
본성으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이들의 옷차림이 화려해졌다. 수도인 만큼 길드도 활성화되어 있고 부유한 사람들도 많아, 일반 평민이라 할지라도 어지간한 귀족과 구분되지 않는 차림새를 하고 있기도 했다.
사람들은 모두 바쁘게 일상을 사는 듯 조급한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걸음걸이조차 빨랐다. 평범한 영지의 평민이었다면 화려한 귀족의 행렬에 넋을 빼놓았겠지만 그들에게는 이것이 일상인지, 덤덤히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 일행의 깃발을 발견한 몇몇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했다.
“아르노! 아르노 가의 문장이야!”
“철혈의 백작! 전장의 신, 무패의 기사!”
“아르노 백작님! 여길 봐 주세요!”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반응에 얼떨떨해진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마차에 같이 타고 있던 이본느가 살짝 웃었다.
“백작님께서는 세브랑의 영웅이시니까요. 그분이 아니었다면 이곳 사람들도 이렇게 평온한 삶을 유지하지 못했을 거예요.”
“…….”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행렬의 앞, 자카리를 향해 있었다. 자카리에게는 익숙한 일인지 그는 덤덤히 말을 몰았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회색 머리칼, 봄바람 결에 펄럭이는 검은 망토, 흔들림 없는 표정은 고결해 보이기까지 했다. 비앙카에게 있어 자카리는 항상 영지를 비우는 남편일 뿐이었는데, 다른 이들에게는 영웅이라니. 그 간극이 생소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이 새삼스러운 것은 그저 비앙카가 자카리에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자카리뿐만이랴? 그녀는 국가 정세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자카리가 아라곤 왕국과 싸워 왔다는 것만 알 뿐, 도대체 아라곤 왕국이 왜 세브랑을 침략하는지, 무슨 이익 관계가 얽혀 있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자카리가 전쟁에서 죽기 전까지는.
아르노 가에서 쫓겨난 뒤, 살기 위해 이리저리 눈치를 보면서 온갖 이야기를 주워듣고 나서야 비앙카는 지금껏 벌어진 전쟁이 바로 세브랑 왕가의 후계 관계 때문에 벌어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현 왕은 1왕자인 고티에를 차기 왕으로 생각했지만, 2왕자인 자코브는 왕좌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야욕이 넘치는 음험한 사내였다. 세브랑과 적대적인 관계인 아라곤 왕국과 몰래 손을 잡고 세브랑 왕국을 뒤흔들어, 혼란한 시기에 자신은 영웅이 되고 고티에를 전쟁 통에 처리할 계책을 꾸렸다.
고티에 왕자의 편에 선 귀족들은 대부분 문관 출신이었고, 전쟁에 능한 자는 없었다. 그에 비해 자코브는 마창 시합에서 몇 번이나 우승했을 정도로 싸움에 재능에 있었다. 자코브가 전쟁에 나서서 아라곤을 제압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왕도 저를 다시 평가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쟁 영웅이 되려는 자신만만한 자코브의 생각은 무너지고 말았다. 자카리가 혜성처럼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자카리가 승승장구하더니,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전쟁 영웅의 칭호는 자코브가 아닌 자카리에게 주어졌다.
자신의 계획이 어그러졌으나, 그때만 하더라도 자코브는 여유로웠다. 자코브가 되려는 것은 영웅이 아닌 왕이었다. 자카리를 자신의 편으로 꾀기만 하면, 자코브의 입장에서는 위험부담도 없이 왕위를 차지할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고 이리라.
다만 문제는, 그러기 위해서는 자카리를 자신의 편으로 꾀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 사실을 자코브만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자코브보다 먼저 움직인 자가 있었으니, 바로 고티에의 심복인 블랑쉐포르 백작이었다. 그는 바로 자카리에게 혼사를 제안했고, 자카리는 그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게 블랑쉐포르는 자카리를 사위로 맞아 고티에 왕자의 편으로 합류시켰고, 자코브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그러니 좀 더 어린 시절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해도, 난 결국 이 남자랑 결혼하게 되었을 거야.’
자카리는 연전연승, 무패 행진이었다.
번번히 자카리에게 패배하고, 그렇다 하여 동맹을 맺은 자코브 왕자의 입지가 좋아지는 것도 아니다. 아라곤 왕국의 입장에서는 자코브와의 동맹을 계속 지속하는 것이 옳은지 의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과정에서 자코브가 무슨 결정을 내렸는지 비앙카는 알지 못했다. 어찌 되었든 고티에 왕자는 전쟁에서 죽게 되고, 자카리는 고티에 왕자의 아들인 알베르 왕세손을 왕위로 올리려 노력하였지만 그마저도 전쟁에서 죽게 된다. 결국 왕이 된 것은 자코브였다.
비앙카를 아르노 가에서 빈손으로 내쫓은 것은 자카리의 형인 위그 자작이었지만, 비앙카의 것을 모조리 빼앗은 상대는 자코브나 다름없었다. 그가 왕위를 얻기 위해 벌린 전쟁에서 비앙카는 아버지와 오라버니, 남편,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잃었다.
지금은 아르노 가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다지느라 잠시 생각하지 않았을 뿐, 자신의 원수가 누구인지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앙카의 가슴 아래 분노와 복수심이 불처럼 타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백작 부인일 뿐이다. 군을 이끌 수도 없고, 정치를 할 수도 없으며, 심지어 영주인 자카리가 전쟁에 나가면 영지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그런, 무능력한 백작 부인.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알았고, 상대의 영역인 수도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귀족으로서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위험을 간과할 정도로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차라리 자카리에게 말하는 건 어떨까? 그가 자코브의 속셈을 안다면 적극적으로 그를 제거하려 할 테고, 그렇다면 나로서는 걱정 한 짐 덜 수 있을 거야.’
이내 비앙카는 고개를 내저었다. 도대체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비앙카는 이제 막 수도에 왔을 뿐이고, 국가 정세에는 관심도 없었으니 말해 봐야 수상쩍어 보일 뿐이다. 안 그래도 후계자를 갖고 싶다 말한 것만으로도 자카리가 자신을 경계하는데….
‘그래. 일단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것에 집중하자.’
비앙카는 입을 꾹 다물고, 스스로를 다스리려 노력했다. 쉽지 않지만, 해야만 했다.
수도에 온 귀족들은 바로 왕을 알현하러 가야만 했다. 비앙카 또한 백작 부인으로서 참석해야만 했다. 자카리는 몇 번이고 방문한 듯, 익숙하게 성의 접견실로 향했다. 그 뒤를 따르며 비앙카는 심호흡을 했다. 그녀의 하얀 얼굴이 도자기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었고, 연녹빛 눈동자는 깊게 침잠했다.
평소보다 더 희게 질린 얼굴. 얼핏 보면 긴장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계속해서 비앙카를 흘끔흘끔 주시하던 자카리가 우려스레 덧붙였다.
“너무 긴장하지 마시오. 별일 없을 테니. 폐하께서는 혹여 그대가 실수한다 하여도 나무라실 분은 아니오.”
비앙카가 처음으로 수도에 와서 왕을 알현하게 된 것에 긴장한다 생각한 자카리는 비앙카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알고 있어요. 고마워요.”
그 때문에 긴장한 것이 아니지만, 자신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주절주절 말할 수 없어 비앙카는 적당히 대답해 넘겼다. 자카리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비앙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자카리는 다시 발을 옮겼고, 오래되지 않아 그들은 접견실에 도착했다. 접견실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자카리를 알아보고는 문을 가로막고 있던 몸을 비스듬히 비켜주었다. 기사의 눈빛에서 자카리를 향한 경외감이 어려 있었다.
접견실은 드넓었다. 천장은 목을 꺾어야지만 끝을 볼 수 있을 것처럼 드높았고, 하얀 돌벽 위에는 세브랑 왕가를 상징하는 붉은 장미가 수놓아진 태피스트리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양옆으로는 판금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들이 이 열 횡대로 서 있었다. 투구에 가려진 모습들이 자못 위압적이었다.
기사들의 끝, 접견실의 한가운데에는 돌을 조각해 만든 거대한 왕좌가 있었다. 왕좌에 앉아 있는 이는 세브랑 왕국의 늙은 왕, 빅토르 드 세브랑이었다. 얼굴은 주름으로 뒤덮였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날렵한 얼굴선, 곧은 콧대, 짙은 눈썹 등이 젊은 시절의 미모를 짐작케 하였다.
세브랑 왕가의 상징이 장미인 것은, 세브랑 왕가의 시조가 바로 장미의 기사라 불린 금발의 수려한 미소년 오윈 세브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인지 세브랑의 피를 이은 이들은 태양을 닮은 반짝이는 금발과 미형으로 유명했다.
왕의 좌우에는 왕을 닮았지만, 서로는 닮지 않은 두 사내가 서 있었다. 금발 벽안인 두 미남자들의 분위기는 극단적으로 갈렸다. 부드러우나 유약하고, 보다 가는 선의 사내가 고티에 왕자요, 좀 더 건장하고 냉막한 얼굴의 사내가 자코브 왕자일 것으로 추측되었다.
접견실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위풍당당하게 들어서는 자카리에게로 꽂혔다. 그에 비해 비앙카는 상대적으로 존재감을 죽였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별다른 말을 섞지 않고 끝내는 게 비앙카의 이번 알현 목표였다.
왕의 앞에 선 자카리는 절도 있게 경례했다.
“자카리 드 아르노, 폐하를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