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봄이 오는 소리(9)
얼마나 놀랐는지, 자카리는 육성으로 되묻고 말았다. 그의 얼굴이 새하얄 정도로 질렸다. 그렇게까지 꺼려할 제안은 아닌 것 같은데…. 비앙카는 떨떠름함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마차 안이 이렇게 넓은데…. 백작님은 밖에서 주무시는데, 저 혼자 마차 안에서 편하게 잔다고 하인들이 뭐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일은 없을 것이요.”
자카리의 대답이 단호했다. 칼로 내려친 것처럼 날카로운 답에 비앙카의 말문이 일순 막혔다. 그의 얼굴에는 ‘절대 이 마차에서 자진 않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한두 달 전의 비앙카라면 상처받고 바르르 떨었겠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비앙카도 많이 성장했다. 자카리의 거부에도 다시 도전해 볼 만큼의 근성이 생긴 것이다. 비앙카는 다시 한 번 자카리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떼었다.
“그래도….”
“마님, 식사는 어디서 할 겁니까? 마차 안으로 들여보낼까요?”
하필 그때, 눈치 없게 소뵈르가 마차 안으로 고개를 불쑥 들이밀며 물었다. 그 때문에 이야기의 흐름이 끊겨,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소뵈르를 째릿 노려보았다.
비앙카의 연녹색 눈동자가 못마땅하게 저를 바라보자, 소뵈르는 제가 뭘 잘못했나 싶어 깜짝 놀라 했다. 입을 합 다물고 눈동자를 데구르 굴리는 소뵈르의 모습에 비앙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 나긴 했지만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어차피 자카리가 한번 싫다 하였으니 안 될 일이기는 했다. 거기에 계제가 맞지 않기까지 하니, 오늘은 영 그른 모양이었다. 포기한 비앙카는 지친 듯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그래. 마차 안에서 먹으마.”
밖에서 먹어 봐야 힐끔거리는 시선 때문에 체하기밖에 더하겠는가. 우리 속 원숭이나 다름없는 꼴은 사절인 만큼, 비앙카의 답은 빨랐다.
이때다 싶었던 이본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제가 가져올게요, 마님.”
“그래. 부탁한다, 이본느.”
이본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 밖으로 나섰다. 마차 안에서 백작님과 마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던 만큼, 그녀는 지금이 바로 자리를 피해야 할 때라는 것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마님이 같이 자자 대놓고 요구했는데, 그걸 또 대놓고 거절하는 백작님이라니. 가운데 낀 사람으로서는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소뵈르도 떠나가고, 마차 안에는 비앙카와 자카리, 단둘만이 남았다. 단둘만이 남게 하려는 이본느의 의도와 달리, 비앙카는 당연히 자카리도 자리를 뜰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더 이상 이어나갈 대화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카리는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가만히 서 있는 그의 얼굴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출발할 때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 무슨 말이었을까? 비앙카는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자카리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비앙카는 애초에 인내심이 긴 편은 아니었다. 한참을 기다리는 동안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눈을 깜빡여도 될지, 저린 발을 주물러도 될지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자카리에게서 말이 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고 그를 재촉하고 말았다.
“마차에서 주무시기 싫으시다면서, 계속 남아 계신 이유가 뭐예요?”
“자기 싫어서가 아니라.”
다급히 변명하듯 내뱉은 자카리는 다시 입을 다물고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깊은 한숨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각오한 듯 자카리는 주먹을 꽉 쥐고, 비앙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니 비앙카 또한 덩달아 긴장하게 되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알 수가 없다. 하얗게 비어갈 뿐인 머릿속을 도리질 치며, 비앙카는 숨을 죽였다.
하지만 정작 자카리에게서 나온 말은 뜬금없는 것이었다.
“소뵈르와는 언제부터 그리 친해졌소?”
“소뵈르 경이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비앙카의 눈이 동그래졌다. 소뵈르 경이 왜 여기서 나오지? 그가 무슨 짓을 했나? 하지만 아무리 되짚어 봐도 별일은 없었다. 그냥 식사를 어디서 할 거냐 물어봤을 뿐이고, 오늘 오전에도….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닌데….”
영 짐작 가는 것이 없었던 비앙카는 말끝을 흐렸다.
비앙카의 하얀 얼굴은 곤혹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그런 비앙카를 바라보는 자카리의 속이 답답했다. 자카리가 본 비앙카와 소뵈르는 친한 사이가 아니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 소뵈르가 비앙카와 대화를 하는 것에 익숙해졌는지, 소뵈르가 비앙카의 옷매무새를 정돈해줄 정도로 가까워졌는지, 귀찮은 일을 싫어하는 소뵈르가 왜 식사 문제 같은 사소하고도 거추장스러운 일에 호위 기사인 가스파르를 대신하여 찾아온 건지.
그들 사이의 간격이 그리 가까워지는 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자카리로서는 망치로 뒤통수를 후려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비앙카와 소뵈르라니, 어울릴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조합이었다. 차라리 호위기사로 있는 가스파르와 친해졌다면 이해라도 갈 것이다. 비앙카는 시끄럽고 무례하며 남이 간섭하는 걸 싫어하는 여자였고, 가스파르는 그런 비앙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은 채 공기처럼 잘 어울렸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뵈르는 아르노 성에서 경박함으로 따지자면 제일인 사내였다. 그리고 세 부장 중 유일하게 평민 출신이었다. 자카리는 그에 대해 별다른 편견은 없었지만, 비앙카가 그런 소뵈르의 출신을 꺼려할 수도 있겠다고 자각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고, 그랬던 만큼 소뵈르와 비앙카 사이의 친분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후계 문제가 거론되었을 때 소뵈르가 뱅상과 함께 비앙카의 편을 들었지. 그때는 별생각 없이 넘겼던 일이, 지금 되짚어 생각하니 비틀리고 과장되어 원치 않는 가설로 몸을 불려 갔다. 굳이 비앙카가 일찍 후계를 가져야 하는 이유. 소뵈르가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이유….
소뵈르와 비앙카 사이에 별일이 없으리란 걸 자카리도 알았다. 자신은 그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친분이 궁금했을 뿐이다. 자카리는 스스로의 가슴을 어지럽히는 열기를 단순히 그리 정의 내리려 했다.
그런 자카리의 심정은 하나도 모르는 비앙카는 모이를 조르는 새처럼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소뵈르 경과는 몇 번 이야기를 주고받은 게 다예요.”
“…그냥, 둘이 친할 거라 생각지 못해서.”
“아아, 마사에 갔다가 마사 안내를 받았어요. 산책할 때도 종종 마주치기도 하고….”
“산책하다 마주치는 이들과 모두 이야기를 나누는 편은 아닌 걸로 아는데.”
“그렇지만 소뵈르 경이 먼저 가스파르 경을 보고 다가오니까…. 잠깐, 지금 심문하는 거예요?”
“심문? 내가?”
뾰족하게 받아치는 비앙카의 질문에 자카리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그는 곤혹스레 자신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추궁하는 말투였다. 숨긴다고 숨긴 본능이 저도 모르는 새 불쑥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자카리의 눈가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렇게 느껴졌다면 미안하오.”
비앙카는 제 앞에서 눈을 내리깐 자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왜 소뵈르를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지 알 수가 없었다. 비앙카가 소뵈르와 잘 지내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걸까? 그렇다면 그냥 어울리지 말라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아니, 애초에 소뵈르에게 주의를 주면 되는 일 아닌가?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삼킨 채 이렇게 빙빙 돌려 말할 것 없이.
솔직히 비앙카가 소뵈르와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애초에 소뵈르에 대한 기대치가 낮기 때문이었다. 그가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에도 아무렇지 않은 것은 예의가 있는 행동을 할 거라는 기대 자체를 안 하기 때문이지, 그의 그런 행동까지 좋게 이해해 줄 정도로 아량이 넓기 때문은 아니었다.
굳이 그런 속사정을 알려줄 필요는 없지. 비앙카는 날카로워진 말투를 둥글게 다듬고 사르르 미소 지은 채, 자카리가 듣기 좋을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당신의 가신이잖아요. 당신을 지키는 자에게 제가 괜히 못되게 굴 필요는 없지요.”
“…비앙카.”
자카리가 비앙카의 말을 얼마나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이 그의 입맛에는 맞은 모양이었다. 비앙카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게 잠겨 있었고, 은회색 속눈썹 밑에서 빛나는 까만 눈동자는 알 수 없는 열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자카리의 손이 비앙카의 뺨을 향해 다가왔다. 힘을 주면 곧이라도 무너질 연약한 것을 만지는 듯한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뺨에 닿아오는 자카리의 체온에 비앙카의 등골이 쭈뼛 섰다. 이런 종류의 접촉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애초에 익숙할 일도 없었지만. 그렇다 하여 피할 수는 없었다. 비앙카가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는 해도, 지금이 놓치면 안 되는 좋은 기회라는 것만큼은 알았다.
어쩌면 오늘, 잠자리는 무리일지라도 그의 벽을 조금이나마 허물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하며 비앙카는 스르륵, 눈을 내리감았다. 마치 입맞춤을 기대하는 것처럼, 아니, 갈구하는 것처럼.
비앙카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마치 자카리의 숨결 같은 것이 비앙카의 살결에 느껴졌다. 눈을 뜨면 가까워진 그의 얼굴이 보일까? 까만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은 어떤 표정일까? 기대에 가득한 표정? 아니면 두려워하는 표정? 과연 그는 오늘 나에게 입술을 허락하여 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