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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장사-58화 (58/192)

#58 봄이 오는 소리(8)

그의 시선이 얼마나 빤하니 흔들림이 없는지, 흡사 노려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아니, 노려보는 게 맞을지도. 또 뭐가 그의 비위를 거스른 걸까 싶었던 비앙카의 심장이 덜컹였다.

‘왜 또 오늘따라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지? 너무 오래 기다려서 화가 났나? 그게 아니면 내가 마음대로 옷을 버리라고 해서…?’

고작 옷을 버리라고 했다 하여 화를 낼 정도로 자카리가 소인배는 아니라는 건 비앙카도 알았다. 하지만 아내라는 이름으로 그의 짐을 간섭한 것은 불쾌하다면 불쾌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차라리 이러이러해서 화가 났다 말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자카리는 불편한 티는 팍팍 내면서 정작 무엇이 그의 심기를 거스른 건지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그게 비앙카는 귀찮고 짜증 났다.

비앙카가 가만히 서 있는 사이, 자카리가 성큼 비앙카를 향해 다가왔다. 분위기를 읽은 모두가 한 발짝 물러서서 자리를 피했다. 자카리는 나직이 비앙카를 불렀다.

“비앙카.”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니네.”

불쾌해하는 낯과 달리 비앙카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상냥했다. 그는 무언가 묻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지만, 질문을 내뱉는 대신 삼키고 비앙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비앙카는 저에게 내밀어진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은 덮고도 남을 만큼 크고 단단한 손은 흔들림 없이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앙카는 조심스레 그 위에 제 손을 얹었다.

비앙카의 손끝이 자카리의 손바닥에 닿기가 무섭게 그의 길고 굵은 손가락이 덫이라도 된 것처럼 비앙카의 손을 꽉 옥죄었다. 마치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자카리와 맞닿은 손바닥이 간질간질했다. 체온이 전해지며 땀이 차는 습한 느낌. 가까이 있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사향내. 비앙카는 손을 빼고 싶은 충동을 참아 눌렀다.

그렇게 자카리의 손을 잡은 채, 비앙카는 마차 앞에 도달했다. 어지간한 초가집보다도 커다란 마차는 외장도 내장도 완벽했다. 마차를 끄는 네 마리의 말이 콧김을 뿜었다.

마차가 커다란 만큼 바퀴도 컸고, 계단을 올라야지만 마차에 오를 수가 있었다. 비앙카는 마차 앞에 놓인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자카리는 비앙카가 무사히 마차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는 것까지 확인을 한 뒤에야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카리는 마지막으로 우려스레 덧붙였다.

“여행은 오랜만이라 힘들 것이오. 힘들면 바로 말 하시오.”

“걱정 마세요.”

그리 말은 했지만, 비앙카는 힘들다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차피 힘들다 하여도 여행은 계속돼야 할 텐데, 괜히 까다롭게 군다는 악명만 얻게 될 것이다.

유난스럽기까지 한 에스코트가 끝나고 나서야 비앙카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의자의 쿠션 깊숙이 몸을 묻은 비앙카가 창가를 향해 시선을 돌린 사이 이본느도 마차에 올랐다. 비앙카의 말 시중 겸 그녀를 돌봐주기 위해서였다. 둘만 있어도 될까 싶을 정도로 마차는 넉넉했다. 이본느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화려한 마차 안을 보며 감탄했다.

“우와…. 백작님께서 마차에 신경 많이 쓰신 것 같아요.”

“그래. 그런 것 같구나.”

비앙카는 설핏 미소를 띤 채 마차의 창문틀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창문틀마저 조각으로 장식되어있을 정도로 마차에는 허투룬 것이 없었다.

마차 밖에서는 마지막 점검을 하는 듯 소란스러움이 일었다. 익숙한 목소리와 말발굽 소리,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이리저리 뒤섞이더니, 마차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쿠션을 푹신하게 만들었다고는 하나, 바퀴가 굴러가며 덜거덕거리는 느낌이 비앙카의 몸에 찌르르 울렸다. 처음 말에 탔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었다.

마차에 타는 게 처음인 이본느는 마차가 굴러가는 동안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괜찮으세요?”

“그래. 아직은 괜찮아.”

걸어서 도시와 도시를 걸었을 적도 있던 것에 비하면, 마차 여행은 정말 쾌적했다. 비앙카는 마차 옆에 작게 난 창문으로 바깥 풍경을 보았다. 그녀를 호위하는 가스파르가 마차 근처에서 말을 몰았고, 자카리의 두 부장인 로베르와 소뵈르는 좀 더 앞에 있었다.

일행의 선두에 있는 것은 자카리였다. 흑마를 타고 있는 당당한 모습은 전쟁 영웅의 위엄에 걸맞았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자카리의 등을 잠시 응시한 비앙카는, 곧 시선을 돌렸다.

도개교를 지나고, 굽이질 치는 길을 지나 그들은 떠나갔다. 마차가 논과 밭을 지나자, 일하고 있던 농노들이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디선가 양치기가 양을 몰고 있는지, 메에에, 양 우는 소리가 멀찍이서 들려왔다.

아르노 성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비앙카는 아르노 성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창밖을 보았다.

아르노 영지를 떠나, 수도로 가는 여정의 출발이었다.

* * *

장거리 마차 여행은 결혼식 이후로 처음이었다. 회귀까지 한 비앙카로서는 까마득히 오래전이었다. 그때는 어땠더라. 아르노 영지까지 오는 내내 울음을 멈추지 못했던 지라 사실 남아있는 기억이 잘 없었다.

설레하는 이본느와 달리 점잖은 척하기는 했지만, 비앙카도 내심 들떠있었다. 하지만 여행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길을 가야만 하는 만큼 어쩔 수 없이 지루해지는지라, 비앙카는 코끝에 닿아오는 숲의 풀 냄새와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잠시 졸다 깨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마차 안은 이미 어두워진 지 오래였다. 숲속의 해는 금방 떨어진다. 그들은 오늘의 여정을 멈추고, 노숙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비앙카가 할 일은 없었다. 그녀는 가만히 마차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되었다. 비앙카는 피로 어린 하품을 내뱉고는 가볍게 허리를 폈다. 계속 앉아만 있어서 그런가, 허리가 딱딱했다.

그때 마차의 장막이 펄럭이며 열리고, 자카리가 비앙카의 마차에 불쑥 들어섰다. 하루 종일 말을 타고 움직였음에도, 그의 모습은 아침에 출발할 때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어두워진 와중에도 자카리의 은발은 반짝이듯 빛났다.

“오늘 심심하진 않았소?”

“바깥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어요.”

“다행이오.”

그리 말한 자카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말하기를 주저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다리지 못한 비앙카가 먼저 캐물었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제가 뭐 해야 할 거라도?”

“그건 아니고.”

자카리는 면구스러워 보였다. 곤혹스러운 듯 혀를 찬 그는 마지못해 운을 떼었다.

“오늘 노숙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제야 비앙카는 자카리가 걱정스러워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비앙카가 어떻게 자신을 노숙시킬 수가 있느냐며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한 게 분명하다. 비앙카는 쓰게 웃었다.

자카리라 해서 노숙을 반긴 건 아니었다. 비앙카가 있는 만큼 어떻게 해서든 마을에 도착하고 싶었지만, 일행이 많다 보니 쉽지 않았다. 굳이 데려왔는데 여행 첫날부터 노숙이라니. 비앙카가 여행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을 품게 될까 싶었던 자카리는 침통한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비앙카는 가벼운 목소리로, 흔쾌히 되물었다.

“그러면 저는 어디서 자면 되나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비앙카의 모습에 자카리는 눈을 깜빡였다. 혹시 비앙카가 노숙이라는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카리는 비앙카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답했다.

“…그대는 마차에서 자면 되오.”

“알겠어요.”

자카리의 우려와 달리 비앙카는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장거리 여행인데 노숙 정도야. 어지간히도 절 철없는 아이로 보고 있었구나 싶었다. 사실 과거의, 정말로 열여섯이었을 비앙카는 노숙이라는 말에 경기를 일으켰을 게 분명하니 자카리의 착각은 크게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비앙카는 노숙이라면 이골이 났다. 풀잎에 이슬이 맺히는 땅바닥 위에서, 돌에 등을 기대고 몸을 둥글게 말고 잔 적도 있었다. 마차에서 비단 이불을 덮고 자는 노숙이라니, 회귀 전 수도원에서 자는 것도 이보다는 불편했을 것이다.

비앙카는 마차를 둘러보았다. 그녀 혼자 자기엔 충분히 크고 넓은 마차였다. 영주의 가족들이 모두 타는 크기의 마차를 그녀 혼자 독식하고 있으니 당연했다. 그러고 보니 짐마차를 제외한 마차는 비앙카의 것이 유일했다.

그럼 자카리는 어디서 자는 걸까? 궁금했던 비앙카는 그대로 물었다.

“백작님은 어디에서 주무시나요?”

“…나는 밖에서.”

자카리의 답에 비앙카의 얼굴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그 이야기인즉슨 그녀 혼자 이 편한 곳에서 잠을 자고, 다른 이들은 전부 밖에서 잠을 잔단 말이었다.

비앙카는 하인들의 잠자리를 걱정할 정도로 상냥한 성품은 아니었다. 하인들과 귀족의 잠자리가 다른 건 당연했다. 하지만 제 남편, 백작인 자카리마저 밖에서 자는 것은 이야기가 달랐다.

수하들은 그들 부부가 어떠한지 모르는 만큼, 비앙카가 자카리를 마차 밖으로 쫓아냈다 생각할지도 몰랐다. 오해받는 것은 질릴 정도로 익숙했지만, 수도까지 같이 가야 하는 기간 내내 오해에 찬 시선과 대꾸를 받는 것은 불편했다. 유난히 비앙카를 꺼려하는 로베르도 일행에 끼어 있지 않던가.

생각해 보면 이건 기회였다. 비앙카는 얼굴 표정을 가다듬고, 천연덕스레 물었다.

“마차 안에서 같이 안 주무시구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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