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봄이 오는 소리(7)
“그런데 어쩐 일로 가스파르 경이 아니라 제가 찾아온 건지 묻진 않으십니까?”
“자네가 할 일이 없었나 보지.”
“너무 하십니다.”
소뵈르는 엄살을 떨었다. 이런 종류의 농담은 받아치기가 수월했다. 차라리 뾰족한 화살이 제 쪽으로 오는 쪽이 낫다. 다만 문제는, 이번에는 농담이 아닌 비앙카의 진심이었다는 것이지만.
진심이든 아니든 소뵈르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대의를 위해 능글맞은 웃음을 띤 소뵈르는 비앙카에게 아양 떨듯 말했다.
“사실 마님께 허락받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무언가?”
“집사한테 들으니, 마님께서 백작님 옷을 못마땅해하셨다 하던데….”
“그랬지.”
비앙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들어 뿌듯한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소뵈르가 왜 거기에 관심을 갖는지 알 수 없었던 비앙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소뵈르는 비앙카를 살살 구슬리듯, 그녀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게 조용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 옷은 영지에서만 입게 되시는 겁니까?”
“아니. 아주 이 기회에 수도에서 맞출 생각이네만.”
“그럼 그 옷은 버리는 건가요?”
“글쎄. 처분은 뱅상이 알아서 하지 않겠나.”
이때다. 지금껏 조곤조곤했던 소뵈르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어 손을 번쩍 들고는 폴짝폴짝 뛰었다.
“그럼 저! 저!”
“응?”
경박한 소뵈르의 모습에 비앙카가 깜짝 놀라 물러섰다. 그녀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건장한 체격의 기사가 손을 들고 뛰기까지 하니 거대하다 못해 위협적이었다.
조금 겁에 질린 비앙카가 짜증스레 소뵈르를 올려다보자, 그제야 자신의 행동을 깨달은 소뵈르가 큼큼 헛기침을 하고 들었던 손을 조심스레 아래로 내렸다. 소뵈르는 비앙카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가져가도 되나요?”
“…나야 상관없다만. 백작님이나 집사에게는 허락을 받아야….”
“백작님이야 그런 거 신경 안 쓰시는 분이고, 집사는 마님 소관의 일이니 마님께 허락받아 오라 했어요. 어차피 백작님과 체구가 비슷한 건 저나 로베르 정도 아닙니까. 가스파르는 너무 크고, 뱅상은 너무 말랐잖아요. 로베르보다 먼저 찜하러 왔지요.”
소뵈르는 자신이 자카리의 ‘버릴’ 옷을 가져가야만 하는 정당한 이유에 대해 줄줄 설명했다.
비앙카는 로베르가 누구였더라, 하고 잠시 고민했다. 오래지 않아 자신에게 유난히 적대적인 자카리의 부장이라는 걸 깨달았다. 비앙카의 입술에 비웃음이 걸렸다. 소뵈르가 말하는 로베르가 그녀가 아는 로베르라면, 절대 자신에게 옷을 받겠다느니 하는 이유로 다가올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앙카로서는 그 옷을 두 번 다시 자카리에게 입힐 생각이 없으니, 그냥 두면 가만히 썩기밖에 더하겠는가. 소뵈르가 이리도 바라니, 그가 가져가는 게 좋은 선택 같았다. 비앙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대가 바라면 가져가도록 하게.”
“좋았어!”
소뵈르는 주먹을 불끈 쥐고 방방 떴다. 과하게 기뻐하는 걸 보니, 너무 기쁜 나머지 비앙카가 그의 모습에 위협을 느꼈다는 것을 까먹은 것 같았다.
뒤늦게 아차 한 소뵈르는 엉덩이를 두들겨 맞은 개처럼 얌전히 꼬리를 말고 의기소침해진 채 비앙카의 눈치를 보았다. 혹시나 비앙카가 너에게 옷을 주지 못하겠다 취소할까 봐서였다.
덩치 큰 개 같은 모습에 비앙카는 픽 웃었다. 노골적이라고 해야 할까, 가식이 없다고 해야 할까. 저돌적으로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못한 채 치근대는 이는 또 처음이었다. 비앙카에게 호의적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싫지는 않았지만, 더 말을 섞고 싶지는 않았다. 솔직히 소뵈르와는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별말 없이 소뵈르를 휙 지나쳐 1층으로 내려갔다. 비앙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는 소뵈르는 불안에 떨며 그녀의 뒤를 종종 따랐다.
“마님, 정말 저 주시는 거 맞지요?”
“그렇다 하지 않았느냐.”
“말 바꾸시면 안 돼요.”
“내가 왜 그런 귀찮은 일을…. 쯧, 저기 가스파르 경도 있으니, 그대는 이만 돌아가거라.”
치대는 소뵈르가 귀찮았던 비앙카는 손을 내저었다. 비앙카의 말 대로였다. 그들을 발견한 가스파르가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차는 저쪽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님.”
“그래.”
비앙카는 가스파르가 안내하는 곳으로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소뵈르는 돌아가라는 비앙카의 말에도 꿋꿋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소란스러운 소뵈르가 비앙카의 주변을 맴돌며 치대니, 상대적으로 말수가 적은 이본느와 가스파르는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가스파르는 흘끔 이본느를 곁눈질해 보았다. 그녀의 손에 커다란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가스파르는 대뜸 이본느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주시오.”
“……? 이건 제 짐이에요.”
“이리 주시오.”
“저 혼자도 들 수 있어요.”
“이리 주시오.”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가스파르의 모습에 이본느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녀가 들고 있는 보따리는 부피만 크지 무겁지 않았다. 그녀 혼자서도 충분히 들 수 있는데 왜 자꾸 달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옆에서 소뵈르가 징징이는 것도 모자라 이본느와 가스파르마저 뒤에서 옥신각신 거리자, 소란스러움에 익숙지 않은 비앙카의 머리가 욱신거렸다. 싫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피곤했다.
비앙카가 나직이 한숨을 내쉰 순간, 돌연 돌풍이 불어왔다.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어지러이 흩어졌다. 어쩔 수 없네. 비앙카는 바람을 핑계 삼아 이본느를 불렀다.
“이본느. 그건 가스파르 경에게 넘기고 이리 와서 내 후드를 정돈해 주거라. 방금 바람에 뒤집힌 것 같구나.”
“앗, 네, 마님!”
방금까지 네가 드니 마니 실랑이를 벌이던 것이 우습게도, 비앙카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본느는 그대로 가스파르의 가슴팍에 자신의 짐을 던지듯 건네주고는 비앙카에게 훌쩍 달려갔다. 가스파르는 이본느의 짐을 들고 묵묵히 뒤를 따랐다. 언제나 무뚝뚝해 보이는 그의 얼굴은 여전했다.
하지만 이본느가 비앙카에게 다가가기 전에 먼저 움직이는 이가 있었다. 비앙카의 곁을 맴돌며 시끄럽게 굴던 소뵈르였다. 비앙카가 이본느를 부르기가 무섭게, 소뵈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비앙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많이 뒤집어 진 건 아니고, 조금 구겨졌을 뿐이에요.”
섬세하지 못한 소뵈르의 손끝이 비앙카의 외투 후드에 닿았다. 부드러운 천의 감촉에 익숙하지 못한 듯, 거칠게 툭툭 털어내는 손길. 겉으로는 자못 다정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이었다.
소뵈르가 왜 이렇게까지 치근덕대는지 알 수 없었던 비앙카는 떨떠름하게 그의 손길을 가만히 받았다. 비앙카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당황한 건 비앙카뿐만이 아닌지, 이본느의 얼굴도 딱딱해져 있었다.
별로 개의치 않는 건지, 아니면 눈치채지 못한 건지. 여자 둘의 당혹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소뵈르는 능청스레 혼잣말을 계속했다.
“캬…. 옷감 감촉이 느낌부터 다르네요. 역시 마님.”
“…도와줘서 고맙네. 하지만 다음부터는 먼저 허락을 구하게.”
비앙카는 소뵈르에게서 반 발짝 떨어지며 외투 자락을 잡아끌었다. 소뵈르는 단순히 그녀를 도와줬을 뿐이지만, 사내의 접근에 익숙하지 못한 비앙카에게는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회귀 전에는 잠자리를 하기도 하고, 파국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연애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해 본 적 있다’ 하여 그에 익숙한 것은 아니었고, 수도원에서 생활한 기간이 길다 보니 그마저도 까마득했다.
비앙카가 고작 이런 도움에도 거부감을 느낀다고는 생각하지 못한 소뵈르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무슨 허락이요?”
“그대가 도와줘도 되겠냐는 허락 말일세.”
“귀족 마님한테는 다 그렇게 일일이 물어봐야 하는 겁니까?”
“그렇지.”
어린아이에게 글을 가르치듯, 비앙카는 인내심 있게 대답을 계속했다.
소뵈르가 그녀를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그녀를 괴롭히기 위해 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저 아는 게 없고 숙녀를 대하는 데 무지할 뿐이겠지. 생각해보면 소뵈르 같은 하급 기사가 어디에서 숙녀를 만나보았겠는가? 아는 게 없다면 가르쳐 주면 되는 일이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조금이나마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눴다고, 소뵈르를 마냥 매정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비앙카는 인내심을 가지고 소뵈르를 잘 타일렀다.
그렇게 비앙카가 소뵈르를 잘 타이르는 찰나, 누군가가 그녀를 바라보는 듯 따끔한 시선이 그녀의 뺨을 찔렀다.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시선이 있으리라 짐작된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그대로 그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그곳에 있던 것은 바로 자카리였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 세밀한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